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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사회적 사명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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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사회적 사명 (창 18:22-33)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용모가 변화되시는 것을 본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를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한다.(눅9: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다. 또한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성도라고 해도, 이 땅에서 혼자 살지 않는다.

항상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이것이 인생이다. 다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기독교는 불교처럼 속세를 떠나, 산 속에다 집을 짓고, 도 닦는 종교, 도피주의가 아니다. 수도원의 종교도 아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풍조에 밀려, 함께 멸망 길로 떠내려가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 속에 머물고 살면서, 고칠 것은 고치고, 삶의 질을 높이고, 마귀에게 묶여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면서,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애쓰는 적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를 맑고 밝게 이끌어 가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 그런데 우리 이웃들을 보면, 좋은 이웃도 많지만, 나쁜 이웃도 많이 있다. 좋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악의를 품고 있고, 음모를 꾸미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는 그리 쉽지 않다. 나쁜 이웃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자기도 똑같이, 그 사람을 공격하고, 악의를 가지고 대한다.

그렇지만 나쁜 이웃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결코 쉽지 않지만, 그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고, 또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권능을 힘입게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중보 기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창18:20-21)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지역 사회를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심판을 경고했던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곳을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갔다(22). 경고를 받은 아브라함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 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는가? 하나님의 사자가 떠나기 전에, 놀라운 축복의 소리를 듣는다. 내년 이맘때 아들을 주겠다(창18:14).

나의 하려는 일(비밀)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고 알려 준다(17). 아브라함을 통해 강대한 나라를 이루고, 천하가 너로 인하여 복 받고, 네 자손들이 강한 민족을 이룬다(18). 자녀, 비밀, 강대한 나라, 사모하던 축복의 말씀을 한꺼번에 모두 들었다.

얼마나 가슴이 터지고 감격스런 말인가? 정말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즐거운 소식으로 잔치를 배설할 만한데, 침묵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집만 복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날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개인의 안전과 행복, 축복, 강한 자손으로 이어지는 복된 말씀을 생각하지 않았다. 소돔성의 불쌍한 영혼들의 죽음을 보았다. 한 도시가 송두리째 망하는데, 자기만 복 받고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기독교는 유일한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우리가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를 즉시 시작했다. 다른 모든 일을 놓아두고, 지역사회를 위해 기도했다. 아브라함은 개인의 욕구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를 구하거나, 영광된 삶을 바라서가 아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브라함은 기도의 중요성을 믿었다.

기도 사역의 우선순위를 믿었기에, 먼저 기도를 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을 위해, 용서하지 않겠습니까? 의인 45명이 있다면, 40명이 있다면, 30명이 있다면, 20명이 있다면, 10명이 있다면 하면서, 10명으로 내려간다.

물론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사람을 위한 기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거기에만 머무른다면, 기도의 위력을 너무나 좁게 만든다. 우리는 기도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만 아니라, 여러 다른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를 할 때, 주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말했다.

(딤전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했다.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말한다.

그것은 네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인데, 특별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는데, 왜 높은 사람인가? 하나님도 높은 사람을 선호하시기 때문일까? No. 그 이유는 그들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할 때, 그들의 정책 결정이 우리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딤전2:2)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어떤 내용인가? 아니 기도를 하기는 하는가? 한다면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마 대부분 나 자신과 우리 자식들을 위한,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현실이 하도 안타까워서, 어느 젊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밤낮 우리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좀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또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부모님을 위해서 좀 기도하자.”면서 “오늘은 절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하면서,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 목사님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시켰는데, 어떤 자매가 이렇게 기도하더란다. 아마 이 자매가 ‘노처녀’였던 모양이에요. “하나님, 오늘은 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부모님에게 좋은 사위가 필요하오니, 사위감을 주시옵소서.”

이 이야기는 우리 기도가, 이기심이라는 영역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살기 힘든 때니,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나라의 지도자들이 올바로 정치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란다. 기도를 믿으신다면,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자.


2. 의인을 찾아 세워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 도성에서 의인 50명만 찾으면, 이 도성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집단을 셀 때, 가장 기본단위가 100명이었다고 어떤 성경학자는 말한다. 그러니까 100명 중에서 아마 50명은 되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나님 절반인, 50명만 찾을 수 있다면, 이 도시를 좀 봐주세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에 절반까지는 안 되고, 한 사회에 10%만 의로울 수 있다고 해도, 그 사회는 아주 건강할 수가 있다. 아니, 바다에는 소금이 4%만 있어도, 그 바닷물은 절대 썩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이 한국 땅에, 기독교인의 숫자만 약19%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총체적 부패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을 다 못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민주사회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의인을 찾아 세우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이 추구하는 의, 사람들의 의인됨, 이런 것은 아주 상대적이고, 하나님의 의와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음엔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의는, 모두 상대적이다. 거기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다.

엄격하게 성경적으로 말하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영국에서 작가 코난 도일이, 런던의 가장 유명인사 12명의 리스트를 작성한 다음, 그 12명에게 일제히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모든 것이 탄로 났다. 즉시 피신하라”

그 이튿날 12명이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모두, 부정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죄인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여전히, 의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면 성경이 강조하는 의인은 어떤 의인인가?

창15장에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 ‘의’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아브라함도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고, 많은 잘못이 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수용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이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창15:6).

우리가 의인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내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함이 의의 출발이다. 그러나 내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의의 종착역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 성도가 되었다면, 이제부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삶의 시작이어야 한다.

우리 인격을 통해서, 우리 존재를 통해서,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닮을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창조주와 인간의 질적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닮으라고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우리가 추구하는 의는, 상대적 의일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성경은 여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그런 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정치와 선거에 적용하여 살펴보자.

신학자 가운데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윤리를 통한 신학을 전개했는데, 이 사람의 신학적 입장을 가리켜서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우리들의 대부분의 선택은, 의와 불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선택은, 커다란 악과 작은 악 사이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적은 악을 선택한다. 어쨌든 두 사람이 다 부패했으면, 덜 부패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이게 라인홀드 니버가 가르쳐 준 실제적인 지혜다.

정치가 더럽다고 해도, 외면하지 말고, 우리가 투표함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두려워하는 사람, 거룩하신 하나님과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애쓰는 사람, 이런 의인들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마음에 근접해 있는 사람을 찾고 세우기 시작할 때, 그만큼 우리 사회는 건강해진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사회적 소명 중의 하나다.
 

3. 우리 사회가 의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자.

아브라함의 기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 기도문을 보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그래서 정의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수위를 넘자, 그 도성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

여기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이 전재되어 있다. 주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사회를 심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동시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50을 찾아 세운다면, 이 성을 용서해 주시겠냐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했다.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내가 용서하리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분이다.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신다. 단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신다. 우리가 죄를 돌이키고, 주 앞에 나와서 용서를 구한다면, 회개한다면 주님은 기쁘게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가 용서하리라.”

성경은 언제나, 의와 사랑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에 미칠 수 없는 우리의 불의함, 추악함, 연약함을 아신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축복하신다. 그것이 십자가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할 수 없었다. 불의한 인간, 죄를 범한 인간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 그래서 전 인류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짊어지우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셨다.

정의는 집행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인류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그래서 정의를 만족시켰다. 우리를 심판하는 대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짊어지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대신 받고 죽으셨다.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이 놀라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과 공동체다. 이를 추구하되, 동시에 사랑과 긍휼을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다.

한 사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정의가 있어야 한다.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 정의는 빠져버리고, 사랑만 구하는 사회, 그 사랑은 감상적이다. 그런 사랑만으로는 한 사회를 향한 올바른 방향의 제시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의를 생각해 보세요.

사랑이 빠져버린 의는, 아주 냉혹하고 잔혹한 의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이 빠져버린 의만으로는, 사회변혁의 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의와 사랑의 균형을,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의인의 존재여부와, 얼마나 의인의 확산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러한 도전은, 나 자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쉽게 정치인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 정치인을 비판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얼마나 의의 사람이고, 나는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며, 나는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하고,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인가? 이 질문은 나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늘 아브라함의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게 하나 있다. 왜 10명에서 끝났을까? 그게 안타깝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제가 있잖아요? 저를 봐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렘5:1)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이게 한 사람의 중요성이다. 한 사람의 중요성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1645년 단 한 표의 투표 차로, 대영제국은 올리버 크롬웰에게, 전 영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부여했다. 1649년 영국 왕 찰스1세는 단 한 표 때문에 처형되었고, 1776년 미국은 단 한 표 차로, 독일어 대신 영어를 국어로 채택하였다.

1875년 프랑스는 단 한 표 차로,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는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1923년 아돌프 히틀러는 단 한 표 때문에, 세계 역사를 바꾸어놓는 나치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역할! 그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더구나 그 ‘한 사람’이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시대마다, 타락한 시대마다, 오합지졸이 아닌 헌신된 ‘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타락의 나락에서 허덕이던 인류 앞에, 의로운 삶을 보여준 노아, 노예의 속박에서 신음하던 민족에게, 자유의 대로를 열어준 민족의 영웅 모세, 지도자의 부재로 방황하던 백성들 앞에, 소망의 닻을 내려준 성군 다윗, 죄와 부도덕이 난무하던 시대에 신앙의 부흥을 외쳤던 엘리야,

외로운 이방 땅에서 좌절과 절망 속에 주저앉은 이들에게 소망의 빛을 지펴준 다니엘… 모두가 칠흑 같은 흑암의 시대에, 눈부신 광명의 횃불을 들었던, 하나님의 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어두운 시대만 탓하지 말고, 우리가 그런 사람, 그런 공동체를 이루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다. 성도는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

(1) 중보 기도의 책임이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위해 기도하자.
(2) 의인을 찾아 세우자. 의인을 세우는 일에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자.
(3) 의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자. 특별히 내가 의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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