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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적성숙의 길(6) - 주님사랑 (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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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성숙의 길(6) - 주님사랑 (요 21:15-23)

  성경의 역사는 인물이 중심입니다.  그 인물들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만난 뒤에 그들의 삶이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창세기의 기록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의 삶을 출발한 뒤 변화가 되어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모세도 그렇고, 다윗도, 바울도, 모두가 그런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님을 만난 뒤에 가장 극적으로 삶의 변화와 내적성숙을 이룬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의 생애는 한마디로 변화, 그 자체입니다.  처음 그가 성경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세월과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변화와 성숙의 동기, 혹은 출발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그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으로 출발을 찾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베드로의 내적성숙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변화의 성숙의 출발과 동기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의 승천직전에 제자들을 만나고, 특히 베드로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디베랴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셨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의 이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실패와 좌절의 아픔으로 눈물과 통곡으로 지내야 하는 베드로의 모든 고민과 상처를 치유하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질문 앞에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다짐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는 간절한 고백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베드로는 다시 출발합니다.  변화와 내적성숙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 고백없이 베드로는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이 과정 없이 베드로는 성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 없이 사도행전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의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풀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사랑에서부터 베드로는 내적성숙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내적으로 성숙하기를 다짐하며 출발하고 있습니다.  내적성숙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 기도, 예배, 치유, 순종과 함께 주님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과 주님의 생애를 통해 보여준 그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나를 잘 알려줍니다.

첫째, 영원한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자 중에 특히 베드로를 부르는 것으로 문을 엽니다.  그리고 마지막도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부르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한 개인의 관점에서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시작해서 베드로로 끝난다고 봅니다.  물론 그 중간에 베드로와 관련된 아픔과 고통의 여러 사건들이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구구절절이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다시 주님은 그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를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떤 상황, 어떤 형
편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 부르시고, 택하시고, 한 번 사랑하겠다고 한 사람을 주님은 어떤 경우에서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 끊어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도 잘하지만 끊어지기도 잘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드라마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는 죽음처럼 강하다가도 끊어질 때는 냉정한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그렇지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에 어떤 사람도,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이 곤고하고, 잘되던 일이 꼬이고, 고난과 아픔이 찾아오면 혹 주님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말 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이 오는가, 이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기도도 잊어버리고 한숨을 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일이 점점 길어지고, 심하면 때론 원망과 불평으로 탄식할 때
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선언하게 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당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시련이 있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그치지 않는가를 생가하며 그들은 괴로워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될 줄 알았는데 꼬여만 가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에 아픔은 있습니다.  시련도 있습니다.  풀쑥 고통도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삶의 여러 상황, 여러 경우에도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괴로워할 때 잠자고 계시지 않습니다.  나의 아픔을 불난 집 불구경하듯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파하면 우리보다 더 괴로워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같이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반대로 혹 내가 잘못하면 주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불안해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가 죄를 범했습니다.  생애 치욕적인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 해도 베드로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여기에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있더라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몽둥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부자관계를 끊으려고 법적절차를 준비하고 있었습니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도 아들을 잊지 않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이 죄를 범해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생명에서 죽음까지, 여기부터 저기까지, 아니 죽음너머 저곳까지 주님의 사랑은 이어집니다.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확신하면서 어떤 경우에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단순히 찾아오신 정도가 아니라 그와 대화하는 내용이 사랑이라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3번 반복하신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는 조그만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중에
는 저주까지 하는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새벽닭이 울 때 그는 자신의 어리석고 연약한 모습 때문에 통곡합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이제 통곡해도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직접 사죄 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평생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야만 했습니
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고 하늘로 가셨다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만나주지 않으면 해결될 수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아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십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향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를 보면서 감격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를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서 가장 귀한 사랑은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서 용서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후의 만찬으로 가기까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행했던 가장 귀한 행동은 세족식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에 이들 24개의 발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아셨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배반을 내다보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발들이 어떤 발들로
변할 것을 아신 예수님이 말없이 대야에 물을 떠서 씻겼습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십시오.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식에 가룟유다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자기 길로 갈 것을 아신 예수님이 유다의 발을 씻겼습니다.  성경은 어떤 제자부터 발을 씻겼는지 언급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용서로 표현되는 측면에서 저는 유다부터 씻겼을
것으로 믿습니다.  베드로가 다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멀리 떠날 발부터 씻기셨던 것입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족식이 마친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무엇을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 말은 곧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네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대라는 것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은 용서입니다.

사랑에서 용서가 빠지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를 향하여 용서를 말씀합니다.  이제 용서의 사랑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셋째, 사람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제나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고, 베드로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사람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제 주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쏟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는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4:20)  이것이 주님사랑입니다.  주님사랑은 사람사랑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매일 만나는 많은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
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지금 여기 계시지 않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가, 주님은 여기에서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한글성경에는 여기 양이란 단어가 어린양, 양 두 가지로만 구별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기 양이란 말은 각기 다른 단어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사용하신 단어는 어린양, 갓 태어난 양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사용하신 단어는 성장 중에 있는 양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용하신 단어는 성장이 끝난 양을 의미합니다.  갓 태어난 양은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청년기에 있는 양은 나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성장이 끝난 사람 양은 나보다 높은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은 무시하고 소홀하기가 쉽습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대합니다.  또 나하고 비슷한 사람은 경쟁상대로 보려고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사람끼리는 참 사랑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질시의 대상이나 때론 아부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부터 나보다 월등하게 수준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 용서하는 사랑, 그리고 사람사랑입니다.  나를 향한 이런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도 매일 보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이루어 가면서 더욱 더 내적으로 성숙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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