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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이 사람을 보라! (요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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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요 19:23-30)

지금은 교회 절기 상 사순절(四旬節)입니다. 사순절이란 열흘 순(旬) 자를 써서 부활절 직전 40일을 기념하는 절기를 의미합니다. 주일을 제외하고 계산해서 40일이므로 주일을 포함하면 47일에 걸쳐진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을 가리켜 ‘재의 수요일’라고 부릅니다. (금년의 경우 2월 6일이고, 부활절은 3월 23일임.) ‘재’는 회개를 상징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상징적 제스처로 재를 뒤집어쓰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혹시 우리 신앙이 나태해졌던 회개하고 다시 회복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보면 40일은 경건한 삶과 관련된 상징적인 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도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을 저 광야에서 훈련받았습니다. 이렇게 40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한 해에 한 번은 40일 동안 절제하며 경건을 힘써 연습하자는 뜻에서 사순절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성경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흔히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제자가 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의 고난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비하면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 승천과 같은 기사는 이상하리만큼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 버립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중심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샘이 됩니다. 바울도 그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십자가의 도'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부활을 등한히 했다거나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는 부활은,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의 고통과 침 뱉음의 모욕을 당하시면서 그 길을 걸으시고 결국은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을 이사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십자가의 잔인함은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틀에다 눕혀놓고 손발에 철 못을 박는 것만큼 잔인 할 수 있겠습니까? 톱으로 켜임을 당해 죽는 것은 5분이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까무러쳐서 그대로 죽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느낄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모든 고통을 다 받게 하는 사형제도라 하는데 이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이 있습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서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고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땡볕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릴 때, 온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나갑니다. 온 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십자가에서 혼절하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혼절하곤 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부터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체포되신 후에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불법 재판을 받으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주먹질 당하고, 욕설을 듣고, ...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기다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치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쇠붙이가 살에 박히며 살점을 뜯어내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왕관처럼 만들어 씌운 겁니다. 그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 피범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자신이 매달릴 60kg가 다 되는 십자가를 몸소 메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형극의 길을 의미하는 비아 돌로로사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까지 1.5㎞의 길입니다. 맨몸으로 가도 숨이 가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셨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첫째는 우리 대신 치르신 고통의 대가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22:14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시편 22:6절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왜 이렇게 말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뭇잎을 얽어 가지고 부끄러운 하체를 가리고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중에는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 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현장입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세요. 본문을 보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 바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 이렇게 다섯 명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비극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다른 세 여인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밝히는지는 않지만, 요한이 있습니다. 여기 모친 마리아는 자신의 태에 10달 동안 품고 있었고,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고, 자신의 품속에서 말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자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30년 동안이나 한 집에서 모자지간으로 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친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유로 키워오지 않았음의 증거였습니다.

또 요한을 보세요.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미가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은밀히 부당한 청탁을 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던 인간이었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모셨을 때 단지 마리아만 섬겼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모신 주님으로부터 늘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그의 심중에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마리아 봉양이 끝났을 때에, 노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요한1서, 2서, 3서를,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았더라면 결코 가능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한평생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니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날마다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1 4: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고 십자가 가까이 그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눅8:2).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쓸모 없는 한심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좇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줄 안 이상,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놀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더불어 끝까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 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 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용서하며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부여잡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떠납니다. 후회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고난이 오고 아픔이 올찌라도, 담대하게 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이제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머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아직도 죄가운데 있다면 그 십자가에 보혈에 자신을 담그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우리 교회는 고난 주간 기간 동안 "이 사람을 보라!!" 는 주제로 모든 구원받은 성도가 십자가 앞에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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