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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힘 (눅 5: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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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힘 (눅 5:17~26)

기독교 믿음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앞에 두고 인간은 자기편에서 안심할 수 있는 증거들과 경험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강 건너편에는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믿음이란 바로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행위이다.’ 그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오직 이 믿음으로만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고 불가능해 보이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 다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인간편에서 보면 이 강은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또 건너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세상적인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세상의 설명이나 표현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아니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있는 것을 기독교 믿음의 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를 말씀하시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독교 믿음에는 어떤 힘이 있는가를 오늘 우리들에게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기독교의 믿음에는 무리를 불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사람들이 한 일은 상당히 무리입니다. 좀 심하고 지나친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옥상처럼 편편합니다. 당시는 시멘트가 없었기 때문에 1m간격으로 대들보를 깔고 일일이 대들보 기둥을 깔 수 없으므로 지푸라기나 아주 질긴 풀들을 진흙들과 섞어서 대들보 사이에 얹게 되는데 그러면 편편하게 됩니다. 그리고 흙이 있으므로 나무와 풀이 자라게 되고 저녁에는 올라가서 쉬기도 합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바깥에 있는데 이 중풍병자도 그 바깥계단을 통해서 지붕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이 환자를 들어내기 위해서 데리고 간 사람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1m정도 되는 대들보 사이의 흙을 파서 구멍을 만들어 침상을 내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중풍병자의 치료를 위해서 남의 집을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간한 무리가 아닙니다. 우선 바깥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 순서가 되어도 혹시라도 순서가 바뀌었나 하고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번호표가 없는 개인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 늦게 온 것 같은 사람이 먼저 들어가면 속이 상합니다. 모두가 급하고 중요한 일에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들만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무리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남의 귀한 집을 부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공의의 하나님, 질서의 우리 주님께서 좋아하시고 받아주실까요? 과연 이런 사람들의 그릇이 준비되고, 특별한 기적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때로는 상당한 무리를 불사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 번 보십시오. 때로는 같이 예수를 믿어도 좀 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저럴 수 있는가 라고 생각되는 것은 제 3자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지만 어느 날 내가 그 당사자가 될 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아들의 문제, 내 딸의 문제가 절박하고 내 경제문제가 정말로 절박한데 그렇게 고상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까? 틀림없이 이것만 하면 해결될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믿음은 때로는 상당한 무리라도 불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늘 그럴 수는 없지만 이것을 이해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고 적어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져야합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그것이 현실로 다가올 때 그것이 나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사업장의 힘이 될 수 있고,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독교의 믿음에는 장애를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집안에는 물론 집 입구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으므로 그 누구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언제 떠나실지 모르므로 매우 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있는 장애가 있어서 도저히 넘어갈 수 없습니다. 도무지 넘어갈 수 없는 장애, 가능성이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내 아들, 내 딸, 정말로 내 사랑하는 남편의 문제가 될 때 그런 것은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믿음을 가지면 천리를 불사하고 뛰어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장애가 없습니다.

한 이방인 여인이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시려고 좀 다른 말로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은혜의 기적을 받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정말로 예수님답지 않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우리가 듣기에도 민망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 때 그 여인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뛰어넘어간 것입니다. 그 무시당함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내 딸의 문제였습니다. 그 딸의 문제만 아니라 예수는 틀림없이 내 딸을 사랑해줄 것이고 내 기도를 받아주고 내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저 분에게는 그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 뛰어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늘 보고 아주 고상하고 편안하게 살 때보는 것들이 아닌 뛰어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악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꼭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을 통치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을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과부는 아주 억울한 일이 있어 재판관을 수차례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재판관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뇌물이 없이는 절대로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돈에 따라서 재판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재판관은 그 여자가 밤낮으로 찾아와서 애원하니까 성가셔서 차라리 뇌물을 포기하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객관적으로 이 여인을 본 사람은 그 여자가 어리석고 바보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장애였지만 믿음이 있는 이 여인에게는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믿음에는 장애를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세 번째, 기독교의 믿음에는 때로는 원칙과 법을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원칙을 좋아하시고 법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적에는 본인의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믿음은 때로는 하나님 당신 스스로 만드신 법과 원칙마저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한 분 계십니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 작가는 글도 냉철하게 쓰고 번역도 잘하고 사랑도 많으신 이성과 지성과 감정이 같이 있는 분입니다. 어느 날 한국 사람인데 일본으로 귀화한 가수가 부르는 노래 음반을 틀어놓고 아내와 한참 듣다가 갑자기 옆에 있는 아내 품에 쓰러져 통곡을 하였습니다. 아내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노래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남편들은 아내 앞에서 눈물을 잘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 앞에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작가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를 인용한 것 같은데 ‘아름답기 위해서는 넘지 못할 법이 없다’ 라는 말입니다. 참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항상 또는 자주 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사실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법을 좋아하십니다. 질서를 좋아하고 원칙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의 법마저 넘어가는 일들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돌아가는 태양이 하루 동안 멈추는 일도 있고, 우박을 내려 수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일들도 있습니다.

어느 날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종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종을 데리고 와야 하는데 그는 혼자 왔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습니까? 당시 로마 백부장은 정말로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으며 당시 노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란 말하는 도구입니다. 로마백부장이 사람도 아닌, 짐승과도 같은 자기 하인인 노예를 위하여 부탁을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신 예수님께서 그 집에 가서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귀하신 분이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보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믿음이 아닌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법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하인이 믿는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백부장을 보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나아만이 문둥병 고친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나중에는 믿음이 생겼지만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닙니다. 아내의 여자아이 종과 아내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아마 믿지 못한 채 긴가민가하면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이왕 왔으니 엘리사의 말대로 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때도 믿음이 하나도 없었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설득을 듣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나았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본인이 믿음이 없어도 낫는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그런 원칙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제한받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 사람은 이렇다 저 사람은 저렇다고 말하는 것이 힘든데 더군다나 하나님께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때로는 원칙과 법을 뛰어넘는 일을 하는데 특별한 믿음이 있을 경우 그렇게 하십니다.

네 번째, 기독교의 믿음에는 손해를 뛰어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힘든 수고 어려운 수고를 하게하는 힘이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손해를 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은 쉽지만 내 돈을 내는 것, 내 시간을 뺏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멀쩡한 남의 집 지붕을 뜯고 나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뻔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욕도 엄청나게 먹었을 것이고 고소당할 각오도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고쳐주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들 것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것을 감행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예수에게 가면 이 사람이 나을 것이라는 그 믿음, 예수는 이 사람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것 때문에라도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저런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부터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문제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도 그런 사람들과 일하지 못하지만 하나님도 그런 사람과 일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과는 일하기 싫고 말하기 싫습니다. 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철저한 계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싫은 소리 안 들으려고 하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절대로 손해 보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문제를 먼저 생각합니다. 긍정을 모릅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양보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가 신성모독한다고 자기들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알지만 당시 사람들은 정말로 몰랐던 것인데 모르고 틀린 것을 자기네들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처럼 아집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결과를 보십시오. 정말로 신성모독이며 정말로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까? 25절과 26절은 그 사람이 낫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계산할 줄 모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살면서 자주 스스로 ‘내가 왜 이렇게 계산할 줄 모르는가?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은 노릇을 했는가? 내가 이렇게 살다가 제대로 살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진짜 믿음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캐도릭의 김수환 추기경이 지금 병상에 누워계신다고 하니 마음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참으로 좋은 어른인데 말입니다. 그 분이 언젠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삐뚤삐뚤하게 그렸는데 잘 그리지는 못했지만 영 못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림보다는 그림 밑에 ‘바보야’ 라고 써놓고 그 오른쪽에 날짜가 있고 그 위에 ‘김수환 자화상’이라고 썼습니다. 참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바보같이 살았는데 어쩌다 추기경이 되었고 대교구장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우리가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으면 훨씬 더 선교를 잘하고 전도를 잘 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뽑는 것도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만약 여러분 같으면 제자들을 그렇게 뽑았겠습니까? 바보 같았습니다. 일을 하다보면 잘나고 크고 높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 복음도 효율적으로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주로 어부들, 세리들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정말 바보같은 분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사셨습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일을 못하느냐? 예수가 그렇게 잘하지 못하셨습니다. 일이 잘 돌아가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본래 교회를 만드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으므로 진짜 예수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불러옵니다.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불쌍한 것, 안타까운 것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불쌍하게 여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혀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주머니는 채워져서 꼼짝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정말로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돈이 모일 날이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대신 손가락질하고 책망하고 따지고 것을 잘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똑똑하고 잘 났습니다. 세상 사람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내 속에 예수가 있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사랑이 있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지 예수믿는 값을 합니다.

여섯 번째 기독교의 믿음에는 놀라운 결과를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도취되고, 세뇌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 있는데 놀라운 결과가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본문에서도 이 결과에 대해서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공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2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싸우고 따지기만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그 기적보다 더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결과가 생기기 전에, 그런 기적이 만들어지기 전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누립니다.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결과가 생기기 전에, 기적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리 당겨서 누리게 하는 힘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여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의 어느 마을에 비가 오지 않아 난리가 났습니다. 아주 중대한 위기입니다. 갈수록 문제가 심해져서 교회가 모든 동네 사람들이 모여 기도회를 가지자고 결정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오라고 하였는데 워낙 급하다 보니 다 모였습니다. 목사님이 마당의 단상에 올라가서 기도회를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맨 앞에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너무나 행복한 모습으로 웃으셨습니다. 구름도 하나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냥 왔지만 이 여자아이는 빨간 우산을 들고 온 것입니다. 이 여자아이는 이미 비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바로 이런 힘이 있습니다.

게다다 그런 결과를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중풍병자가 나아서 길을 가는데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2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본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 결과와 기적을 누리고 앞으로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기적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입니다. 오늘 저는 1부 예배시 대표기도에서 대통령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복을 받아야지 국민들이 복을 받는 것을 수년 동안 잘 보시지 않았습니까? 복을 받고 받은 복을 우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나라가 잘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을 잘 벌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많이 소원하지만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단 하나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의 믿음을 제대로 가지기만 하면 이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믿음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해결되고 그 영광과 기적을 다 누리게 됩니다. 구제도 마찬가지이고 봉사도,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저절로 됩니다.

한 위대한 신앙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배우게 되면 어둠 속에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처럼 걸어갑니다. 또한 가뭄의 때에도 결실의 계절을 사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걸어가게 됩니다. 이 믿음은 내가 붙들고 있는 믿음, 나에 의해서 좌우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믿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비바람에 조금도 요동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믿음을 받기만 하면 우리는 어둠속에서도 빛 가운데 걸어가는 것처럼, 가뭄 속에서도 결실의 가을을 걸어가는 것처럼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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