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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삶 (요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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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삶 (요 13:4~7)

1. 들어가는 말

장관 내정자 3명이 낙마했다. 부동산 투기의혹과 세금탈루 그리고 자녀의 외국시민권 등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르고 고른 정치 최고위층 인사가 능력 외에도 도덕성을 묻는 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본인은 억울하다고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지라는 지도자의  사회적 책임성은 점차 강화될 것으로 보여진다.

얼마 전 교회의 목회자 세습 문제가 교계를 넘어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세습 자체이기보다 영광의 세습이라는 내용에 있다.
농촌과 어느 외딴섬의 미자립교회에서 목회자가 3대째 세습하면서 목회를 한다면 이 고난의 세습은 아마도 언론에 대서특필 되며 칭찬이 자자할 것이다.

성경에는 두 군데의 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는 기사가 나온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며 섬김의 삶을 주문하고 있다.  마가복음 10:45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오셨다는 말씀을 실천하고 계시다.

또 한 곳은 붙잡아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요구에 어쩔 수 없는(?) 빌라도의 사형선고이다. 빌라도는 그 부분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책임전가의 표식으로 대야에 손을 씻고 있다. 변명과 핑계와 책임전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 십자가의 사형선고를 하여 당시 승자가 된 빌라도는 역사상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까지 배반하고 홀로 십자가에 달려 패배한 듯 보였던 예수는 온 인류가 우러르며 존경하고 있다.
섬김의 삶이 궁극적으로 승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총회가 정한 사회봉사주일이자 새문안교회의 자원봉사주일을 맞아 섬김의 삶을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자.

2. 성경 속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요약해 놓은 구절이 마가복음 10:45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가 우리 본문 앞에 나온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인사청탁을 한다. 마태복음서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예수님께 인사청탁을 하고 있다. 주님이 정권을 잡으시면 이 사람을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다. 최소한 장관은 되게 해달라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른 열 제자 또한 이 장면을 보고 분히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하시고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위해 오셨다고 선포하신다.
예나 지금이나 자리 욕심은 여전하다.

첫째로 섬김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섬기러 오신 주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섬김의 구체적인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다. 아니 삶의 본보기라기보다는 섬김이 그 분의 본질이셨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도 아닌 짐승의 먹이통인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다른 생명의 먹잇감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남을 누르고 다른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아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향하여 모두 것들을 활용하려는 현실에서 태어 나시면서까지 자신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는 출생이셨다.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사람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 먹고 입고 따뜻하게 하고 편리하게 하는 모든 것은 생명체들이다. 아침에 먹고 나온 밥과 반찬이 그렇고, 우리 몸을 따스하게 하고 멋지게 만드는 옷이 그러하고, 에너지의 대표적인 석유가 화석에서 나오고, 하루에도 수없이 쓰고 버리는 종이가 나무라는 생명에서 나온다.
오늘의 나는 부모님을 포함하여 수많은 생명체가 희생하여 섬김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생명의 속성 중 하나는 섬김이다.
생명의 잉태나 양육과정은 부모의 철저한 희생을 전제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마 7: 9~10).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다 내놓는 성만찬을 제정하신다. 33년의 젊은 나이면서도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사신 주님은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의 것이랄 수 있는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제공하시는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던 다미앤신부가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문둥병)에 걸린이들과 평생을 살다가 한센병에 걸리게 되고, 자신의 육체가 누구의 것인지 조차 몰라볼 정도로 흉측하게 변해버렸을 때 마지막으로 이런 기도를 하였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이 땅에 와서 그 어느 것에도 다미앤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내도 자식도 집도 제 이름을 붙일 것은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저의 초라한 육체조차도 그것이 다미앤의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저의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어쩌면 자기 이름을 많이 붙이면 붙일수록 그것이 성공이라고 평가되는 사회에서 우리 주님과 다미앤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로 섬김의 삶은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으로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모든 권한을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시험 중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으실 수도 있었고, 당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열두 영되는 천사들을 불러 진멸시킬 수도 있으셨지만 그런 모든 권한을 자제하셨다. 하늘의 뜻을 이루시고자!
진정한 섬김은 이렇게 자신의 권한을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는 것이다.
자신의 권한이 100이라면 80을 쓰고 20을 절제할 때 참으로 보기가 좋다.

한국은행의 총재를 지내고 이제는 고인이 된 전철환씨가 있었다. 재임 중에 자녀의 결혼이 있었는데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혼례식을 치렀다. 이후에 주변에서 알게 되어 총재에게 결혼식을 왜 알리지 않았는가를 물으니, 여러 사람에게 괜히 폐를 끼치지 않겠냐는 것이다. 금융계의 수장으로 금융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축의금은 받지 못했고, 결혼식을 통해 많은 하객으로 과시를 하지 못했지만 그 분은 두고두고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경건과 절제는 쌍둥이와 같다. 절제가 곧 경건은 아니지만 경건한 사람은 반드시 절제의 삶을 살게 된다.

셋째로 섬김을 받기위함이 아니라 섬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섬김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는 신약성서에 34회 사용되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삶과 선교의 핵심이었다. 본래 이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일 곧 노예의 기능을 디아코니아라고 칭하였다. 모세나 다윗 그리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일컬어졌다.

마가복음 10:45은 섬김을 목적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에 대한 마가의 기독론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의 기독론은 구약성경 이사야서 ‘고난의 종’의 사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빌립보서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기독론도 예수는 원래 하나님의 본체와 동등하였으나 인간의 모습, 나아가서는 ‘종의 형체’를 입고 구원과 해방의 사역을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노예의 기능으로 식사 중에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하는 디아코니아!
반찬이 떨어지면 갖다 달라고 하기 전에 채워주고 잘 먹지 않는 음식이 있으면 빼내가고, 국물을 찾을만하면 국물이 있는 탕을 가져다주고,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필요로 할 때쯤에는 후식 주문을 받아 후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좋은 식당과 일류식당일수록 이러한 식사시중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그러나 요란하지도 않고 손님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섬김이란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제공자 중심이 아니라 수요자 중심이라는 점이다.

청소년복지의 대명사인 돈 보스꼬는 이런 말을 한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 청소년이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는 섬기는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한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에는 방에도, 식사에도 계급이 있다고 했다.
아랫목과 윗목, 상석과 말석, 어른의 식사 뒤에 어린이와 여성들이 식사를 했으니 말이다.
정구를 처음 들여와 어느 양반이 땀을 흘리며 정구를 하자 ‘그런 일일랑 상놈들 시키시지. 뭐하러 직접 하시나!’
요즘도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경제적 부가 커지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성공과 출세로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가치관이다.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60이 넘어서도 무척이나 젊어 보이는 그에게 젊게 사는 비결을 물었다.  “나는 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접받지 못했다고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데!’가 우리들에게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들 하지만 별수 없는 죄인들이요, 조금만 뒤에서 살펴보면 약점과 결함투성이다. 낙마한 장관 내정자들 뿐이겠는가?
교회의 중직과 성도들은 더 엄한 인사청문회를 통해 선출되어야 하는 존귀한 직분들이다.
섬김의 리더십 -섬김의 삶은 이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1등도 하고, CEO도 되고, 금메달도 따야 하지만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성공으로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 


3. 나가는 말

섬김의 삶은 보여주기 위한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다.
선거철이 되면 나타나는 의도적이고 의례적인 것이어서도 안된다.
글자 그대로 섬기면서 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타적이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으로 살아간다.
경건의 모양 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넘치는 삶이다.
내게 주어진 재물과 지위와 능력을 나의 풍요와 편리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하고 돌보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는 새문안교회의 자랑스러운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섬김의 삶은 분명 좁은길인데 좁은 길의 구체적인 실례를 찾아보자.

대안학교의 대명사가 된 거창고등학교의 복도에 걸려 있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이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마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권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가는 제자의 삶은 바로 섬김으로 작아지고, 내려오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김종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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