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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와서 보라 (출 3:1~4, 요 1: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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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출 3:1~4, 요 1:43~46)

미국의 신학자 브슈넬은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선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교과과정과 교육방법이 탁월하여 다른 어떤 스승인 랍비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수준과 과정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은 다르게 마련입니다.

  유치원생에게 대학원 박사생처럼 가르치면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잘 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은 학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칩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가르칩니다. 이것이 좋은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자말자 어려운 논리나 진리나 영생이나 십자가나, 부활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장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단순한 그 말씀이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란 말씀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이므로 제자들에게 그냥 오라고,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선포이며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39에는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 와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만 하십니다.

1:46에는 이튿날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의심합니다. 이 때 빌립은 긴 말을 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만 합니다. 4:29에는 수가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몇 해 전 루게릭이라고 불리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을 앓고 있는 스티븐 호킹박사가 의문의 폭행을 당했습니다. 손목이 부러지고, 몸이 칼에 베이고, 입술이 터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 신문에는 ‘먼초전 신드롬 바이 프록시’(Munchausen Syndrome by Proxy)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부모나 간병인이 주변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 돌보고 있는 어린이나 환자 등에게 상처를 입히는 희귀한 정신질환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별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걸 하지 않아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십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기적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헤롯도 그 동안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앞에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내려와 보라”고 하였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기적도 다 희귀하지만 헤프지 않았습니다.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한마디의 매력이 있습니다. “와서 보라”. 이 한마디에 많은 사람이 따라갔습니다.

  “보라”는 성경에 약 400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실증적 증언을 기록한 책입니다. 확실한 역사적 증거들로 가득 찬 책입니다. 확실한 증거들이기에 와서 보라고 합니다. 언제 누가 와서 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39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고 합니다. “오라 그리고 보라”는 말씀은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에 가능합니다. 가장 좋은 일이기에 설득하는 말입니다. “와서 보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고 이 말이 우리 모두의 선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요한복음 1:45에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말씀은 확실한 자기 증명입니다. 제자들의 “와서 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니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와서 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와서 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와서 보라”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절대적 확신과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말입니다. 오면 그리고 보면 다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상대방이 의심합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설명해도 안 믿을 때는 정말 답답하지요?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열어보여 주고 싶을 때가 있지요? 아무리 와서 보라고 해도 보여줄 수 가 없으면 더 답답할 것입니다. 와서 보게 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설명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지만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본의 전설적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떡장수의 집에 낭인과 낭인의 어린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떡 한 접시가 없어졌습니다. 떡장수는 낭인의 아들을 의심하였습니다. 낭인은 사무라이의 아들인 자기 아들이 절대 훔칠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떡장수는 계속해서 떡값을 내라고 다그칩니다. 사무라이인 낭인은 칼로 자기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이고 떡장수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마저 할복 자결해 버립니다.

  아들이 죄가 없다는 확신도 없이 아들의 배를 가르겠습니까? 만일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배에서 떡이 나오면 모두 헛것입니다. 괜히 아들만 죽인 것이 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감이 아들을 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께 대한 신뢰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신입니다.

  요한복음 4:29에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이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한 다음에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훤히 아시는 분, 이 분을 그리스도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아시는 분, 이 분은 미래도 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도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분을 따라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분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그리스도 대한 신앙고백을 보세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기 전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지키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다시 만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고백이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영국성공회와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사용하는 신앙 고백서입니다. 동방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12사도들이 사도신경을 작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기 세례예비자용 문답례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지금의 사도신경의 최종 형식은 6세기말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 확립된 것입니다. 12세기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사도신경을 공식적 신앙 진술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성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고 간단하게 한 마디로 성령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은 길고 내용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심을 고백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을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고백합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을 고백합니다.” 성부와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은 짧은 대신 성자에 대한 고백은 깁니다. 신앙고백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매일 새벽기도마다 우리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 시작합니다. 주일 예배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 신앙의 확신이 있습니까? 이 확신이 있으면 이제 “와서 보라”라는 말로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반대자에 대한 설득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장 반대하고 격하하던 제자가 나다나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취하실 때에 가장 극찬한 제자가 나다나엘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가장 낮춘 사람을 가장 높여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성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반대자에 대한 관용이 예수님의 인간관계의 탁월성입니다. 예수님의 인사관리의 핵심기술입니다. 이런 반대자에 대한 관용이 반대자로부터 위대한 신앙고백을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리더십에는 이런 이론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25%는 지도자에 대한 찬성자인데 이 추종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찬성하는 자들입니다. 25%는 찬성하지만 어떤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반대자로 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25%는 반대자인데 잘 설득만 하면 언제든지 찬성자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25%는 반대자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반대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75%는 찬성자가 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75%만 찬성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반대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위대한 리더십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배우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는 못 돌려놓으셨습니다. 최후의 성만찬 때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이루었지만 그에게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출생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 중에는 누구도 이 역할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성경의 진리, 구원의 확신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성수주일이나 십일조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하던 술이나 담배문제도 모두 해결하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그냥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고 믿음이 자라게 되면 나쁜 습관을 끊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젖을 빠는 아기가 왜 빨아야 하는지 이해하고 빠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빠는지 배워서 빠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저런 것을 따지지 않고 그냥 빱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젖을 빨고 먹어야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을 먹으면 어떤 소화기능을 통하여 살이 되고 피가 되는지 모두 알고 먹는 것이 아닙니다. 소화과정에서 간이나 췌장이나 소장이나 대장의 기능을 따지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먹어 보면 건강해지고, 먹다 보면 유익하게 됩니다.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알고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냥 와보고 따라 해보고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선친이 목회하실 때에 어느 스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사찰의 총무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깊은 진리를 깨우치고 싶어서 사찰에 딸린 작은 암자에서 백일동안 생식을 하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일 후에 자신이 얻은 것은 배고픈 것과 허기가 져서 눈에 이상한 환상이 보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문에 대구의 아무개 목사님이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알고 계시다고 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님과 한참이나 서로 얘기를 주고받더니 어머님께 아버지 양복 한 벌과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가지고 오게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승복을 벗도 양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 구두를 신고 가셨습니다. 그 때 저의 사택이 교회 안 뒤뜰에 있을 때입니다. 스님이 교회에 들어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나가시고 나서 아버지께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불교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설명해 드리고 나서 결단하고 한번 와서 예배를 드려보라고 권하였더니 그 분이 당장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후에 그 분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셨는데 주로 하시던 일이 승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교리적 설명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와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고 반대하고, 거부하던 사람들에게 보게 하십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보고,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모여 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17에는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합니다. 이런 의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예수님은 “나는 예수다”라고 자신을 보이십니다. 다메섹에 들어간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9:22에는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반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와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이 병이 들자 예수님께 와서 간청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집에 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까지 안 가셔도 고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병도 멀리서 원격조종(remote control)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지 않고도 다 아시고 하시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그리고 보아야 합니다. “오라 그리고 보라”는 말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와서 보는 것은 반대자를 설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확신이 없는 자나 반대자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그냥 한 번 와서 보라”.

  ‘X광선’을 발견한 렌트겐은 의학상 큰 공적을 남겨 노벨 의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그 광선을 발견했을 때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실험만 했습니다.” 실험만 하다보니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각 없이 예수님께 와서 보기만 해도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안티 기독교가 극성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자가 너무 많습니다. 적극적 반대자도 있고, 소극적 반대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반대자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합니다. 악의에 찬 반대를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안티 기독교를 보세요. 그리스도를 반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안티 기독교가 그리스도인을 반대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답지 못한가를 지적합니다. 구체적이고, 악의적이고, 적극적이고, 영적인 반대자가 많습니다. 이런 안티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와서 보라고 할 만큼 우리가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범적이고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와서 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나 언제나 공개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게 살아야 합니다.

  약한 ‘아니오’(No)라면 아직 설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득 방법이 잘못되면 단단하게 입을 다문 조개처럼 강한 ‘아니오’로 바뀌어버립니다. 설득이 역효과를 내어 상대가 강한 ‘아니오’의 태도로 돌변하는 것을 ‘부메랑 효과’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세일즈맨이 차를 팔러 갔습니다. 어느 주부가 파란 차를 원합니다. 그런데 “흰 차로 사세요. 흰색은 가장 싫증나지 않는 색입니다”라고 강요하게 되면 주부의 감정을 상합니다. 그리고 “차 필요 없어요”라고 반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반대자를 잘 설득하는 것도 기술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기술은 내가 가진 확신을 와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성배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은 충성스런 기사 영 퍼시발은 왕이 거룩한 홀에서 베푼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가 끝나자 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지난밤에 성배가 세 번씩이나 자네 앞을 지나갔지만 자네는 그 것을 알아보지 못했어.” 코앞의 보물을 알아채지 못한 무관심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만나지 못한데 대한 죄는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없었다고 누구도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기 전에 전하지 않은 우리의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로마서 10:14에는 말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반대자에 대한 설득은 자신의 확신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내가 확신해야 하고, 내가 전해야 합니다. “와서 보라”.

  믿지 않는 이웃에게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 바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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