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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는 자, 보지 못하는 자 (요 9: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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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자, 보지 못하는 자 (요 9:35-41)

때로 우리 교우님들에게 전화를 받습니다.  무엇을 잘 모르니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에 얼마나 기쁘고 보람 있는지 모릅니다.  모르면 물어보십시오.  아는 대로 힘껏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모르거나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먼저 믿는 분이나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중요한 것을 모르고 사는 것보다 알고 사는 것이 보다 양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국의 속담에 “하나도 묻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자는 학습을 부끄러워하는 자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음은 배움의 시초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질문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날 때부터 시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우리 교회 안에도 중도에 시력을 잃은 집사들이 계신데,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십니까?  시력을 잃은 답답함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저도 안타깝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본인의 답답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도에 실명하시고 부인의 손을 잡고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시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부인 집사님의 정성과 사랑으로 힘을 얻고 사시고 있습니다.  부인 집사님이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시는 것을 보니, 모든 교우들이 그의 정성과 사랑과 인내를 다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명한 남편을 모시고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온 교우들이 다 지켜보면서 귀하게 보시고, 그 가정을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정역에서는 맹인이라고 되어 있으니 맹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새번역에서는 눈먼 사람이라고 하여 아주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을 지칭할 할 때는 가장 부드러운 말로 표현해야만 말하는 사람도 마음 편하고, 듣는 사람도 좋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이 장애인들은 멸시하고 하대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주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 질문은 도덕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의 도덕적인 질문을 받으시고, 종교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맹인된 한 사람을 놓고, 그 사람 자신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렇게 맹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영적 수준이 형편없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가정하면 수준이 있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께는 어떤 섭리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 좋습니다. 우리 주님은 친구 나사로가 죽을 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11:4)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을병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몹쓸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생각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어떤 일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평가할 때에 질병이요, 사고요, 실패라고 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그것은 더 크게, 더 먼 훗날까지, 더 높이, 더 빠르게 도약할 수 있는 도움 판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겨 그 맹인의 눈에 바르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맹인은 즉시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예루살렘 안에는 단지 실로암 못만 있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로암이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로암이란 예수님의 신분이나 사역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실로암이며, 참되신 실로암이시기에 그 맹인을 실로암에 보내어 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이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진흙을 이기고 사람에게 바르는 것은 일하지 말라는 규례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침을 바르는 것이 당시에 어떤 의학적인 효험이 있었다고 하여도 이것은 비위생적인 것이며,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는 것도 그렇게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성한 눈에 침을 바르고 진흙을 이겨 바른다고 하면 비위생적입니다.  비인격적입니다.  심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파상풍 균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에 흙으로 빚었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인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 창조주의 능력 있는 손으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감동적이요, 감격스러운 일이지, 비판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사실 그대로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이 되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요8:12에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장에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참 빛이시며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학문이나 철학이나 사상을 가지고 어둠을 몰아낼 수 없지만, 참 빛이신 우리 주님을 모셔 들이기만 하면 어떤 어둠도 몰아내고, 빛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이 맹인이 실로암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는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리를 뜨셨는지, 이 사람이 길을 잘못 들었는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눈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분인 것은 아는데,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때에 이 맹인을 잘 아는 이웃 사람들과 그가 걸인으로 살던 것을 본 사람들이 고침 받은 맹인을 만났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그 맹인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 비슷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여 묻습니다.  “아니, 당신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그는 감격스럽게 말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소”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사람들과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다시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실로암에서 가서 씻고 이렇게 보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달리 말합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 간에도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로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가지고 세분하여 여러 가지 조항을 신설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겼다는 것은 노동하지 말라는 규례를 어긴 것이며, 안식일에는 아주 위급한 환자를 제외하고 치료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을 다음날 고쳐주어도 될 것을 안식일에 고친 것도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조항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규례입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론적인 것을 가지고 확대하여 진흙을 조금 개어서 사람의 눈에 바라준 것을 가지고 일을 했느니 치료해주었느니 하는 것은 시비를 걸려고 하는 한심한 장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을 일삼고, 적은 실수를 기지고 침소봉대하고, 물고 늘어지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로가 좋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 하느냐?” “예, 선지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주저하고 무엇을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체험적인 사람이요, 부정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 유대인들이 이 맹인이 정상인이 된 것을 보면서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물어봅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 맞소?” 참으로 기막힌 말입니다.  부모가 말합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사실과 날 때부터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맹인의 부모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다시 두 번째로 맹인이었던 사람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 예수는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맹인이었던 사람이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맹인은 참으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미 말을 하였고, 자기가 다른 사람과 같이 정상인이라고 하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하였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맹인에게 욕을 퍼붓고 말합니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기막힌 노릇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었는데 랍비라고 하는 사람들, 서기관이란 사람들이 고쳐주시는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죄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들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적인 말로 공격합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젠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입니까?  맹인이었던 사람이 서기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물리적인 힘으로 억압하고 교권을 가지고 정죄하고 출교합니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 는 맹인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그들의 모임에서 쫓아내었다는 말을 들고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여기서 “인자”란 말은 종말론적인 구원자요, 심판자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주님을 보내신다는 것을 믿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맹인은 말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우리 주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인자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면서 “내가 믿나이다”라고 절하였습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이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맹인이었고, 그러나 이 사람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본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안이 멀어서 한평생 캄캄한 어두움에 보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영안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 가운데는 여러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의 눈은 참으로 예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항상 정결하게 하시고, 흐려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은 눈꺼풀이 있어 하루에도 25000이상 깜박거린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 안에서 눈물샘이 있는데 많이 나오면 눈물이 되는데, 많이 나오지도 않고 적게 나오지도 않게 하셔서 눈에 들어가는 먼저를 닦아내주고 건조해지지 않게 하여 잘 보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장성하도록 맹인으로 지내야 했던 사람이 두 눈을 뜨게 되었으면 마을에서 축제가 벌어져야 하는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느니,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발라주었느니,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입니까? 

오늘도 감격이 사라진 세대가 되었습니다. 잘못된 신학이 눈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병 걸리고 장애를 입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통념이 눈을 흐리게 합니다.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데, 정죄하는데 바쁘고, 몰인정합니다.  사람이 병들고 사고를 당하고 실패하면 육신적으로 당하는 고통보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느냐고 정죄합니다.

또 잘못된 율법주의가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평생 유지하고 싶은 교권도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이란 권위, 서기관이라는 권위를 유지하고 싶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여러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맹인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놓고 죄 때문이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라는 분이 하시는 말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이 빛이시라고 하시면서 진흙을 발라주시더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일평생 불행을 끌어안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난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거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실로암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눈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그리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그는 현실에 만족하고 눈 뜨는 일에는 자포자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보지 못하고 지금 이대로 지내도 됩니다.  사실 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맹인은 나의 운명이려니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만물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맹인은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선지자의 한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라는 말에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창세 이후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두 눈을 회복한 일이 없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며, 인자로 오신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선지자로,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사도로 쓰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그릇으로는 작게만 쓸 수 있습니다.  연약한 신앙을 가지고는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서울의 한강에는 성수대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가 1994. 10. 21 아침 7시40분께 붕괴되었습니다.  5-6번 교각 사이의 상판 48m가 내려앉아 32명의 등교하던 학생들과 출근하던 시민들이 죽고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에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부실은 반드시 부실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사고원인을 발표하기로는 무슨 이음새가 약하니, 용접이 부실하니 상판 두께가 두껍지 않다느니 했습니다.  그러나 성수대교는 8톤짜리 트럭까지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 되어진 것인데, 아무런 걱정도 없이 50톤 짜리 트럭들이 무사통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안일 무사주의가 큰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을 지을 때에 그 사건이 일어났는데, 우리 장로님들이 예배당을 튼튼하게 지으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의 영성을 더욱 예민하게 훈련해야 합니다.  이제 무슨 이적보아야 믿음이 들어가고 그럴 때는 지났다고 봅니다.  이제는 믿음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다고 하는 자들, 율법주의자, 바리새인들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밝히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내어서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내 몸에 새겨보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대화하는 그런 깊은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님의 신비하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살아가며, 주님을 생각하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어주옵소서.  우리의 질병이나 우리의 실패나 우리의 가난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을 보내시면서 우리는 보지 못하던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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