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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삶의 리듬 (눅 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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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삶의 리듬 (눅 6:12-1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 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 리듬을 타고 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어떤 주기적인 패턴을 가지고 되풀이되고, 생명은 여기에 반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를테면 모든 생명은 낮과 밤이 번갈아 오는 24시간 주기 리듬을 통해 지구의 자전 운동에 적응하고, 봄여름가을겨울로 반복되는 1년 주기 리듬을 통해 우주공간에서의 지구의 위치에 적응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우리의 몸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응하는 리듬이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감수성이 달라지고,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 리듬을 잘 타고 사는 사람과 그 리듬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의 삶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조금 피곤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먼 길을 다녀와 시간의 리듬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적응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인생을 쉽게 사는 비결은 리듬을 거스르지 않는 것일 겁니다. 가래가 뭔지 아시지요? 삽같은 쇠날에 자루를 박고, 날의 양편 구멍에 줄을 매어 한 사람이 자루를 잡고 두 사람이 줄을 당기어 흙을 퍼 던지는 기구입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엇박자로 일을 한다면 엉망이 되고 말 겁니다. 하지만 세 사람이 마치 한 몸인 듯이 일하는 모습은 경이롭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농군들이 일하는 리듬에 매료되곤 했습니다. 가래질뿐만 아니라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두 사람이 두레박줄을 잡고 샘물을 푸는 그 리듬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저는 삶에도 분명히 리듬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일과 사귐을 위해 낮을 주셨고, 명상과 자기 성찰을 위해 밤을 주셨습니다. 어둔 방에서 불을 끄고 밖을 내다보면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보입니다. 밤은 그처럼 자기를 돌아보라고 주신 시간인데,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게 사람을 천박하게 만들고, 거칠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적 삶의 리듬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밤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아침은 제자들을 불러 공동체를 형성하는 시간입니다. 낮은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역의 시간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이웃에게 다가가 공동체를 이루고, 그 속에서 얻어진 힘과 사랑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리듬인 동시에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삶의 리듬인 것입니다.

• 홀로 있음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것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늘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할 일이라도 있어야 하고, 그것조차 없으면 소일거리라도 있어야 합니다. ‘killing time’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재미도 없는 영화를 보거나 컴퓨터 오락에 빠져듭니다. 나는 이것처럼 큰 낭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홀로 있음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켈트인들의 속담은 이러한 진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 무시했던 곳에서 바닷가재를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굳이 피하려 드는 홀로 있음 속에서 사람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물론 아무도 함께 해주는 이가 없어서 혼자인 사람의 외로움은 그를 병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일부러 마련한 홀로 있음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대견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참 부러운 이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내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의 내 모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불화는 남에게 들키기도 싫고, 가급적이면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우리는 자신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홀로 있음이 병적인 정서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을 때뿐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바다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되 스스로는 더러워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 은총의 바다에 깊이 잠길 때 우리는 스스로의 허물과 부족함까지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달려 나가 맞아주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안식을 얻는 것은 다만 그분 품에 안길 때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분주한 시간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예수님의 위대한 힘은 엎드림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보다 크고,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은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몰아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지쳐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배터리가 다 닳으면 충전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입을 때만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푸석푸석하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무거운 까닭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잠들기 전도 좋고, 새벽녘도 좋습니다. 정 바쁘면 점심시간 중의 한 부분만이라도 할애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지금 몰두하던 일에서 잠시 눈길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렇게도 우리를 힘들게 하던 일도 사실은 별 게 아니고, 그렇게도 화려하게 보이던 것들도 실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기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지원 공동체

그런데 우리는 고독 속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고독 속에서 자신이 연약하고 일그러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홀로 있음은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의 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늘 공동체적 차원을 갖습니다. 밤 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던 예수님은 아침이 밝아오자 제자들 곁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열 두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그 출신들이 참 다양합니다. 어부도 있고, 세리 출신도 있고, 열심당원도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온 내력도 다르고, 지향도 달랐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만드신 공동체의 특색입니다. 이런 것을 和而不同이라 하지요? 조화를 이루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없어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성격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있어야 공동체는 유지됩니다. 하지만 성질이 좀 급한 사람이 있어야 그 공동체는 역동적이 됩니다. 물론 그런 이들만 있으면 공동체는 소란스럽기만 할 뿐 아무 일도 할 수 없겠지요. 머리 쓰는 일에 익숙한 사람도 있고, 몸 쓰는 일에 익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공동체를 생각할 때마다 갖가지 돌로 쌓아올린 담장을 떠올립니다. 그런 담장이 우리 시선을 끄는 까닭은 인위적이지 않은 그 자연스러움 때문일 겁니다. 둥근 돌과 모난 돌, 큰 돌과 작은 돌들이 서로를 받쳐주며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참 멋집니다. 하나님은 마치 담을 쌓는 장인과 같아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이때 공동체란 구체적인 어떤 조직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공동체 지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때, 혹은 함께 일할 때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 좋아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고,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생기는 순간 어려움도 함께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서로 어려움을 감내해야 합니다. 동료들이 드러내는 육신의 허약함이나 잘못된 행동을 참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불화가 생기면 기꺼이 용서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적 삶을 익히는 배움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받은 까닭이 무엇인지를 자꾸만 돌아보아야 합니다.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품어줄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원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이고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공동체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벧전4:7-10)

사랑, 서로를 따뜻하게 대접하려는 마음, 자신이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려는 마음. 이것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

이제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이 열 두 제자를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일에 동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섰을 때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유대와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온 이들이 주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찾아온 까닭은 말씀도 듣고, 자기들의 병도 고침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통을 받던 사람들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누가는 예수에게서 이 능력이 나와서 모두를 낫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이 ‘능력’이라는 말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세상에서 소외되고 주변화된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어느 사람이 추운 겨울날 길을 걷는 데 길가에 엎드려 구걸하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신심이 깊었던 그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잠시 화살기도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 소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십니까?”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 대책으로 너를 만들었느니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누군가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다고요? 옳습니다. 자연인인 우리는 무능합니다. 하지만 성령에 사로잡히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14:12)

우리는 더 이상 무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있겠지요? 하지만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문제의 크기에 압도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얼음을 깨뜨리는 것은 망치가 아니라 바늘입니다. 작은 바늘이 얼음 속에 파고들어 틈을 만들 때 얼음은 깨지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이의 절실한 필요에 응답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셔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십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리듬을 타고 살며 불의와 억압의 세상에 사랑의 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가슴 벅찬 소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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