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로의 기술 [욥 2:1-11]

  • 잡초 잡초
  • 727
  • 0

첨부 1


욥 2;11-13                        위로의 기술



패기에 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치와 유머가 넘치던 그는 어여쁜 여인과 가정이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치고 유머가 넘치던 그는 어느 날 다리가 마르는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됩니다.  너무나 큰 고난에 봉착한 그는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그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이런 모습임에도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시오?"

그 때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단지 당신의 건강한 육신이 아니랍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멋진 인격과 그 사람의 삶 자체이지요." 

결국 사랑하는 여인의 위로에 힘입은 그는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1944년에 미국 역사상 최초로 4선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1929년 세계경제 공황을 극복하는 New Deal 정책을 입안하여 미국을 살렸고, 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루즈벨트의 이야기입니다.

루즈벨트의 부인 엘레나 루즈벨트는 10살 때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였던지 그녀는 돈을 가리켜 “땀과 눈물로 조각이 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스무 살에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는데 한 아이가 자기 목전에서 사망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때 엘레나는 자기를 위로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직도 다섯이나 있다”며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했습니다.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는 죽는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흑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백인”이라는 칭호를 흑인들로부터 받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흑인들처럼 많은 슬픔과 고난 가운데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루즈벨트는 그 자체로도 매우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끝없이 그에게 위로와 소망을 불어 넣었던 그의 아내 엘레나가 없었다면 과연 그가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희망을 주는 격려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사람과 역사와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 땅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난 아무에게도 위로 받을 필요가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람,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점점 더 강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곧 존재의 부정과 마찬가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강함만이 인정받는 시대에서 과연 위로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시대의 사람만큼 위로받기 원했던 적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상처를 움켜잡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들을 향하여 빙긋 웃어 보이는 여유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웃음 뒤의 처절함, 그 미소 뒤의 통곡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누구 나를 위로해 줄 사람 없습니까?  나, 너무 힘이 듭니다.  누구 내게 소망의 한마디를 던져줄 사람 없나요?”

문제는 우리가 위로하는 것에, 그리고 위로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위로 받는 것도 쑥스럽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위로의 말을 던지면 내 시선을 어찌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의 치부가 온통 드러난 듯한 수치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위로 받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위로하는데도 서툽니다.  자칫 잘못된 위로는 동정으로 비추이게 되고, 때론 우리의 위로가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일찍이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통해서 사랑에도 지켜야 할 기술적인 면이 있음을 설파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위로의 기술”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은 지침서가 되기를 원합니다.

1. 찾아가는 위로입니다.

욥에게는 참으로 귀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이 당한 황당한 사건들에 대한 비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고난당한 욥에게는 자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조문과 위로입니다.  성경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 즉 잔치 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빌닷과 소발, 그리고 엘리바스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혜자였고, 위로의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부친상을 겪었을 때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과 위로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빈소가 채 마련되기 전에 찾아오신 분들에게는 일종의 존경심마저 느껴졌습니다.  그 때 저는 나름대로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초상집에는 일등으로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사랑하는 여러분, 찾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관심한 세상을 살고 있고, 이기적인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바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찾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이 시대의 의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때 의인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러면 우리 주님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시겠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어떻습니까?  우리는 찾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노름을 하다가 돈이 떨어져 2층에서 밀려 떨어진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 상담을 하고 얼굴이 밝아져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상담했는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상담 내용의 일부분을 공개했습니다.  “다음부터는 노름을 할 때 꼭 1층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2. 함께 하는 위로입니다.

찾아가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찾아가느냐는 것은 더 소중합니다.  가기 싫은 초상집에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 어쩌면 우리가 사람들을 위로하는 모습은 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에 위로하는, 그런 위로자의 모습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위로자는 상처받은 자와 함께 합니다.  단지 몸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함께 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아픔을 함께 느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인사 치례로 초상집에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욥이 느끼는 똑같은 심정으로 그를 찾아갔고, 그와 함께 했습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그들은 너무나 처참한 욥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제히 울며 자신들의 겉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리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적어도 이들의 위로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고통을 보고 눈물 흘릴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할 때 우리는 정말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낍니까?  그들의 아픔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픈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흘리는 눈물 때문에 함께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함께 한다는 것은 단지 찾아가는 것, 몸으로 동행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은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애통함을 나의 애통함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에 사심 없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딤후 1:16-17을 보면 오네시보로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울 사도가 굉장히 칭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사형을 목전에 두고 수감되어 있었을 때 부지런히 찾아와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그리고 보면 바울은 주위에 많은 위로자를 두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끝내 달려갈 길을 다 마친 것은 바로 이런 함께 하는 위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 2:22절에서 디모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리고 골 4:10절에서는 아리스다고가 자신과 함께 옥에 갇혔음을 알립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몬 1:23절에서는 또 다른 위로자 에바브라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그리고 죽을을 앞에 둔 시기에 기록한 딤후 4:1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위대한 전도자요, 사도인 바울에게는 이처럼 많은 위로자가 있었습니다.  함께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복음의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위로자들이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옷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시대의 위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

3. 침묵하는 위로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을 침묵했습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하루도, 이틀도 아닙니다.  무려 칠일 동안을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차마 사람의 입술로는 위로할 수 없는 그런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려 일주일 동안 욥과 함께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후에 그들이 욥과 논쟁을 벌리면서 그들은 욥을 비난합니다.  욥의 아픈 상처를 마구 헤집어 놓습니다.  욥의 자식들이 남모르게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둥, 욥에게 흉악한 죄가 있었다는 둥  별의 별 말들을 다 늘어놓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가졌던 아름다운 위로자의 자세는 이처럼 논쟁이 시작되면서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왜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욥이 고민할 문제였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함부로 결론지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침묵을 깨면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의 역할은 잘못된 길로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도 아라비아 지방에 사는 베두윈 사람들이 고대와 같은 생활습관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행에 처하거나 병든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친지나 친구들이 함께 찾아가서 말없이 그 침실 주변에 둘러 앉아 오랜 시간을 같이 있어준다고 합니다.  그리곤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선생은 많습니다.  스승도 많습니다.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인류보다 몇 배, 혹은 몇 십배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교육학자요, 심리학자입니다.  경제학자요, 가정사역전문가입니다.  보고 들을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 지식들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너무 쉽게 가르치려 듭니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고 같이 아파하는 침묵보다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고자 하는 가르침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결국 상처받은 사람에게 더 큰 상처만을 남기고 맙니다.

만일 빌닷과 소발, 그리고 엘리바스가 욥의 곁에서 일주일간 침묵한 후 돌아갔다면, 아니 한 며칠 더 침묵으로 일관했다면 그들은 욥의 마음에 못질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르치고자 했고, 결국 그 가르침은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고난을 당했을 때 여러분은 그 고난의 이유가 알고 싶으십니까?  누군가가 다가와서 여러분의 잘못을 지적하며, 이러저러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단,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의 위로를 원합니다.  단지 꼭 잡은 손에서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편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듣기를 원합니다.  설령 때론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도 바른 길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신뢰해 주는 그런 침묵의 위로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잠 10;19절에서 말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리고 잠 13: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결론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자기와 함께 일할 수녀를 선발하는데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기준은 첫째, 잘 먹는가, 둘째, 잘 자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웃는가 였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지론에 의하면 모름지기 잘 웃는 사람이 어려운 시련도 잘 이겨낼 수 있고 잘 웃는 사람이 남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는 위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 당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그 아픔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에 침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웃을 수 있는 여유입니다.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품고 웃을 수 있는, 소망의 메시지로 위로할 수 있는, 그리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소망할 수 있는 그런 자세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이 시대의 위로자가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고난당한 사람들을 그렇게 위로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위로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한교회  김 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