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이 부르시는 봄노래 (아 2:10~14)

  • 잡초 잡초
  • 534
  • 0

첨부 1


주님이 부르시는 봄노래 (아 2:10~14)

1. 봄이 왔네, 봄이 와!

봄이 되었습니다. 이미 각 산의 양지바른 곳들에는 연한 녹색의 작은 잎들이 새순을 내어서 엷은 수채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이 다른 때보다 춥게 느껴졌던 저로서는 이렇게 봄이 온 것이 정말 좋습니다.

이성부(李盛夫)라는 시인도 이렇게 추운 겨울을 지나 우리 곁으로 다가 온 봄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정말 봄을 맞은 감격이 제대로 표현된 시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특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는 표현, 길고 긴 겨울을 지나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는 봄을 정말 잘 표현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제 강점기 말엽에 활동했던 김상옥(金相沃, 1920~) 시인은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지나 우리 곁으로 다가 온 봄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술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사향(思鄕)”

이성부 시인이 “눈이 부셔서 맞이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던 그 봄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들이나 산으로 가서 조금만 자세를 낮추어 풀숲을 들여다보시면 여러분 곁에 와 있는 봄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2. 아가서, 하나님의 봄노래

여러분들에게 봄에 관한 시 한 편과 시조 한 수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봄노래’, ‘봄의 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봄노래들이 많이 있는데요.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봄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솔로몬과 술람미의 노래

아가서는 다윗의 아들이자 지혜의 왕으로 알려진 솔로몬 왕이 사랑했던 “술람미”의 한 여인과 서로 주고받은 노래의 내용입니다.

“술람미”란 다른 이름으로 “수넴”이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 아래 쪽 지역에 있는 길보아 산 근처, 이스르엘이라는 동네의 북쪽으로 4.8km 지점에 있는 동네로서, 현재의 이름은 술람(Sulam)입니다. 고원지대이자 넓은 평원인 이곳에는 옛날부터 과수원이 많았는데, 과수원이 많은 동네에는 미인이 많은 법인지, 이 술람미에도 미인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 술람미, 즉 수넴이 알려진 것은 사울 왕이 죽은 길보아 전쟁 때였으며, 그 후 다윗 왕 말년에 그를 섬긴 ‘아비삭’이란 여인의 고향이라는 것 때문에 알려졌습니다. 또 엘리사를 영접하여 후대한 후 엘리사가 갈 때마다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하기 위하여 따로 방을 짓고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던 한 경건한 부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에 왕실 전용 포도원이 있었고, “술람미 여인”이라 불린 이 여인은 오빠들과 함께 왕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솔로몬 왕이 그곳을 들렀고, 그때 왕은 그녀를 보고서 무척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그녀를 후궁 중의 하나로 선택하여 예루살렘 궁전으로 데리고 가게 됩니다. 비록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일하느라고 얼굴은 검게 그을렸지만 도리어 그것이 그녀를 왕의 다른 여인들과 비교해서 더욱 신선하고 건강하게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을 아가서 여러 부분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 1장부터 3장은 신랑인 솔로몬의 구혼에 대한 회상으로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주고받는 대화체로 기록되었습니다. 결혼 전에 사랑을 간구하는 신부의 노래가 있습니다(1:2~8).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노래도 있습니다(1:9~2:7). 그리고 어느 봄날 왕이 시골의 신부 집을 방문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습니다(2:8~17). 그 사랑의 초기에 좋지 않은 꿈을 꾸고는 사랑이 떠나갈까 염려하는 술람미 여인의 염려도 기록되어 있고(3:1~5), 그러다가 결국은 결혼을 하여 신부의 집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혼인 행렬을 노래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3:6~11).

이어서 4장 1절부터 5장 1절은 직유법과 은유법을 동원하여 솔로몬이 자신의 신부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노래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결혼 초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의 시련이 닥쳐왔지만 솔로몬이 신부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해 줌으로서 그 위기를 극복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술람미 여인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고향을 추억하게 되고, 왕에게 그곳으로 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행을 하게 되었고, 서로의 사랑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8:5~7).

여러분, 어떻습니까? 봄에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아닙니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은혜(?)가 될 수 있는 성경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의미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2)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사랑의 노래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선정적인 요소까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아가서가 논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시대부터 이 책의 이름을 “노래 중의 노래”라고 불렀던 점이나, 정통 유대교에서 아가서를 ‘공식적인 유월절 노래’로 지정하여 전국적으로 낭독한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가서는 겉으로 드러난 남녀 간의 사랑 노래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가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녀의 애절하고 실제적인 사랑 이야기인 것 같으나, 그 내면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 왕은 우리를 너무나 깊이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으며, 검게 그을린 시골 처녀 술람미 여인은 하나님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성도들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가서를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꾸어 보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의 왕의 대사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술람미 여인의 대사는 성도의 사랑 고백으로 보면, 아가서처럼 깊은 신앙적인 내용과 고백을 담은 성경도 드물다는 것이죠. 탁월한 지혜자이자 세계 최고 부자인 솔로몬 왕이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를 사랑하듯, 정말 별 볼 일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창조주이자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사랑! 그렇기 때문에 아가서는 묵상하면 할수록 너무나 은혜롭고 감격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4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아주 재미있는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드피스’라는 아가씨와 ‘미케노리스’라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4천 년 전, 이집트에는 로드피스라는 아가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로드피스가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그녀의 신발을 물고 가는 겁니다. 그때 로드피스가 목욕하던 곳으로부터 수백 키로 떨어진 멤피스에서는 당시 이집트 왕인 미케노리스가 신하들과 환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드피스의 신발을 물고 간 독수리는 그것을 왕이 회의를 하고 있던 그 자리에 떨어뜨렸습니다. 미케노리스 왕은 하늘에서 떨어진 예쁜 샌들을 보고 놀라서, 그 주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멀리 떨어진 로드피스를 만나게 되었고, 서로 사랑이 싹터서, 로드피스는 이집트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1697년,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는 이 이집트의 로스피스 이야기를 조금 변용시켜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신데렐라>입니다. 계모와 두 언니에게 온갖 구박을 다 받던 신데렐라가 무도회장을 갔다 오는 길에 유리 구두를 잃었고, 그 구두 주인을 찾던 왕자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이집트의 <로드피스 이야기>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아가서나, 하나님께서 시골 처녀를 데려다가 꾸미고 가꾸어 당신의 신부로 삼으셨다는 구약 선지서의 말씀 등으로 볼 때 신데렐라나 로드피스 이야기는 모두 성경에서,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사랑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며, 그 사랑의 주인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지요.


3. 주님이 부르시는 봄의 연가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 즉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랑 노래의 구체적인 가사를 보실까요? 오늘 본문은 솔로몬 왕이 시골 마을 술람미에 있는 신부의 집을 방문하여 그녀를 불러내는 일종의 ‘세레나데’입니다. 일종의 프러포즈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런데 이 부분은 지금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불러내는 것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인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시도다.”

그 동안은 계절적으로 겨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겨울은 우기라고 해서, 거의 6개월 가까이 비만 오는 계절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않고 마냥 집안에 들어앉아만 있게 됩니다. 그렇게 5, 6개월을 집안에 칩거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겨울이 가고 우기도 지나고 봄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미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계절이 되었지만, 집 안에 칩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무화과나무에는 3, 4월이면 열리는 푸른 열매들이 달려 있었고, 포도나무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새들은 지저귀며 노래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꽃들은 향기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봄이 되었는데, 새들은 봄노래로 지저귀고 있는데, 각종 꽃들은 향기를 토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직 이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으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봄의 모습을 설명하시고, 마치 그 향기가 코로 스며들 듯이, 아니면 우리가 들판이나 숲 속에 있는 것처럼 봄을 노래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시고 그 봄을 느끼게 만드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집안에 갇혀 봄이 왔는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리에 있지 말고, 봄을 느낄 수 있는 데로 나아가자고 초청하시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봄이 와도 그 봄을 느끼지 못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무엇과 같아보였을까요? 마치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비둘기”처럼 꼭꼭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칩거하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봄이 되어도 봄을 누리지 못하는 것, 사랑하는 신랑이 밖에서 불러도 선뜻 나서서 맞이하지 못하는 신부처럼, 오늘 성도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봄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계절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영혼에 이미 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계절이 변했는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삶과 영혼의 내외부적인 장애 요인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봄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왜 이런 말씀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한 겨울 같은 현실 때문입니다. 겨울의 춥고 암울함, 시련과 고통, 생명 없고 도리어 생명의 기운을 꺾는 것 등, 혹독한 겨울의 기세처럼 봄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도 아직 겨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갈등하고,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과 대립하고, 학교가 가기 싫어지고, 사람이 싫어지고, 일이 싫어지고 … 우리 자신과 주변 상황과 나라 형편은 아직도 너무나 꽁꽁 얼어붙어 겨울이고, 현실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런 현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봄을 누리지도 못하게 하고, 오늘 말씀의 권고, 즉 하나님이 주시는 삶과 영혼의 봄을 누리라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 본문은 설사 우리로 하여금 봄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많을지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봄과 봄이 주는 놀라움과 신비와 즐거움을 누리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선포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으면 아멘이고, 아니면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포하면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아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삶과 가정, 그리고 영혼에 봄날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혹독한 겨울에 있다고 여기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시면서, 여러분의 내면과 삶의 전 영역에 봄날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봄의 잔치 속으로!

오늘 설교 제목을 “주님이 부르시는 봄노래”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봄노래는 누구의 노래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삶의 겨울, 영혼의 겨울이 지나고 삶의 봄이자 영혼의 봄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함께 그 봄을 누리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잘 살피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성도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그대로 반복하는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 ”이라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술람미는 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의 말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청을 들은 성도들은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 반복해야합니다. 그렇게 반응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들도 오늘 본문의 술람미 여인처럼, 옛 성도들처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한 번 반복하여 스스로에게 선포해 봅시다.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내 영혼에, 내 가정에, 나의 일터에 봄이 왔다!”
“그동안 나 자신과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던 것들은 떠날지어다!”
“마산과 경남, 이 나라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던 것들은 물러가라!”
“나의 영혼아, 이 찬란한 새봄을 마음껏 누려라!”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꽃이 피는 것을 막을 수도 없구요. 여러분 자신이나, 사회적인 분위기나 권세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도 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도 막거나 방해할 수 없는 봄이 되었습니다. 계절적인 봄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봄까지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의 개인을 향하여, 여러분의 가정을 향하여, 하시는 모든 일을 향하여 변화의 계절, 새로움의 계절, 즐거움과 신비의 계절이 되었다는 선포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고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봄을 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봄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계절의 봄도 마음껏 누리고, 여러분의 영혼도 봄처럼 따뜻하고 즐겁고 생명력이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봄의 전령사, 봄의 전도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생활과 물질과 건강과 여러 문제로 겨울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봄을 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마음껏 이 봄을 누리고, 사람들에게 이 주님의 봄을 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