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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 (살전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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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살전 4:1~12)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알 수가 있겠습니까? 흔히 당신 마음 나도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내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아무리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었다고 해서 또한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러한 입장이 되기까지의 환경이 또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결국은 내 입장에서의 이해일 뿐 온전히 상대방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알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한 평생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연 나는 내 아내 내 남편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마음이 들 적은 없었던가요?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토록 외로움이 몸부림치게 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 보려고 했던가? 그저 내 방식대로만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고 내 방식대로만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대는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내가 보고 있는 그대일 뿐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찌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 주셨던 그 사랑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왜 내가 이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십니까?” 하고 따지고 들 때도 있지를 않았던가요? 그래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아하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아 감사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군요.” 하고 깨달아 감사하게 될 때의 그 기쁨을 여러분도 아시지를 않습니까? 오늘은 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이 숨 쉬고 똑같이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받는 사랑입니다. 내가 받은 만큼 주는 사랑입니다. 먼저 받아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희생이라고 하지만 어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과연 희생을 말하고 있던가요? 결국은 희생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 가운데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벌기는 백정처럼 벌고 쓰기는 장승처럼 쓰라는 말도 합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 아니던가요? 소위 말하는 투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여기 집을 사고 땅을 사면 값이 많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돈만 있다면 나부터라도 그 땅을 그 집을 살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실상 오늘날까지 돈을 번 사람들치고 그렇게 땅 투기 부동산 투기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돈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다 도둑놈이라는 말들을 하지 않던가요? 내가 여건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여건만 된다면 자녀들 공부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이사하고픈 마음들 역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 병신이라는 말들도 하지를 않습니까? 오죽하면 내가 하면 정당한 것이고 남이 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그런 이중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진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내가 희생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잘 될 수 있다면 그걸 진정으로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내 일처럼 그렇게 기쁘던가요?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아파하는 것 이상으로 함께 아파해줄 수 있고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수 있는 것, 오히려 기회가 주어져도 상대방을 위해서 양보하고 상대방이 잘 되도록 밀어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그러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서 헤매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상대방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아내에게 조차도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지를 않습니까? 나는 자존심도 없는 사람인줄 아느냐고 그렇게 소리를 버럭 지른 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최대한 자존심 다 버리고 산다고 했지만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러한 나 자신을 힘들어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지만 이번 딸을 출가시키면서 보니까 결코 아니더란 말입니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는 놓아주어야 하는데 막상 놓아주려고 하니 그게 그렇게도 힘이 듭디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며칠을 몸살을 앓았겠습니까?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인데 내 행복부터 생각하고 있는 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내 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 마음이 힘들다고 해서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상대방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성질을 다 부려대는 일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 내 욕심이 아닙니까? 내 마음이 불편하니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상대방을 힘들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한 것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기가 왜 그리 어렵던 지요? 뻔히 상대방이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 주장을 굽히지 않는 그런 어리석음이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나도 좀 살고 보자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욕정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나 힘든 것만 생각했지 상대방이 힘들 것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내 안에도 가득합니다. 아니 어떤 때는 반대로 상대방을 위해서 따사로운 손길을 내밀어도 귀찮다고 매몰차게 손사래 치는 것을 볼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그런 손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또 원망하곤 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그런 어느 세상 사람들 중의 하나와 같은 모습으로 더 이상 남아 있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해야 되고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식을 권합니다. “몸에 좋단다. 먹어봐.” 그러면 “아니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러냐”고 합니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먹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먹기 싫어도 주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 모두에 다 서툽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다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없을 텐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말을 하고 너무도 쉽게 행동을 합니다. 때로는 참아줄 수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기다려줄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너무 성급할 때도 많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기다리고만 있다가 또 삐끗할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때를 맞추어야 할지 정말로 힘이 듭니다.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느냐?”고 하지만 그제야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기 까지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면 “이제라도 말해 주어서 고마워요.”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다리셨습니다. 동구 밖까지 나와서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아버지가 자식을 찾아 나설 수는 없었던가요? 아니죠? 찾아 나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어쩌면 그 자식은 아버지를 피해서 영영 멀리 떠나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동구 밖에 나가서 매일 기다리고 있는 그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니죠.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가슴 아파하며 기다리는 사랑,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해 마지막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사랑이 왜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죄에서 건져 구원할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랑이 어디 있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한없이 욕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사랑 이윽고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 이 사랑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쫓아가서 다리 몸뚱이라도 분질러서 끌고 와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기다리는 그 마음에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부모 된 마음은 다 압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난하긴 쉽습니다. 욕하긴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마음이 오히려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마음이 진짜 사랑입니다. 탈선해서 이단에 빠져 헤매는 아들을 위해 1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하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나카 그 어머니는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통곡을 하며 울부짖는 아들 왜 어머니는 나를 더 기다려주지 못하셨냐고 몸부림을 치지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를 그리며 아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가 초대 교회사에 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성자 어거스틴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가 눈물로 기록한 참회록을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런 위대한 한 인물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오늘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평안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노래 가운데 그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그래요 짜증을 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쉽게 짜증을 냅니다. 그러고는 혼자서 씩씩거립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더 큰 상처만 남깁니다. 차라리 그럴 줄 알았으면 짜증이나 내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하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차라리 기분 좋게 하면 될 것을 짜증부터 내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면서 할 때도 있습니다. 참 인생이 어리석은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 짧은 세상에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쉽게 화도 내고 그토록 씩씩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이미 우리가 서로를 사랑으로 잘 감싸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방법에 있어서 서로 서툴 따름입니다. 한데 그 사랑이 쉽지 않은 것이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랑으로 잘 감싸준다고 하는 것이 내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닌 주는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도 받는 사람이 흡족하도록 그리고 결코 상처가 되지 않도록 주어야 하기에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조건을 붙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 너도 그에 상당하게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기를 원합니다. 한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다고 서운해 합니다. 자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끊임없이 주지만 자식은 때로는 그런 사랑조차도 힘들다고 합니다. 오히려 조금만 서운한 것이 있으면 엄마가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따지고 대듭니다. 그럴 때 부모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집니다. 한데 그런다고 해서 내가 다시 너를 사랑하면 내가 개다 그러고 맙니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베풀지를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진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통곡을 하면서도 여전히 손을 내밀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해보면 사랑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속이 다 썩어나가면서까지 소갈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식들을 돌보는 그 부모의 사랑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겠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겠죠. 그러면서도 속은 다 썩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매를 든다고 해결이 됩디까? 화를 낸다고 해결이 됩디까? 오히려 더 힘들어만 지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이제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 참 평안을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상한대로 다 해 본들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잠시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방 후회하게 되고 맙니다. 조금만 더 참을 것을 하는 마음으로 아파하던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지금 평안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자식에게 부모로서의 할 일을 다 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참 평안입니까? 마땅히 해야 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직장인은 또한 직장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도리는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기도하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염려하고 근심하고 속을 끓이고만 있었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마음을 쏟아 기도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은혜와 복만 바라고 있었지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도리를 다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땅히 구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못하고 마땅히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로 서야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에만 바빴습니다. 그러면서도 탄식만 하고 원망만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주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구하지도 않고 그저 염려만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주는 자기 되어라 그리하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안겨주시리라고 했는데도 주는 자가 되기보다는 무언가 주려고 해도 내게 무엇이 있어야 줄 것이 아니냐고 대들지를 않았습니까?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일을 돌아보고 자신의 일에도 정성을 다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존경하게 되고, 여러분 자신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는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무어 자신의 일이냐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주는 자가 될 때 그것을 통해 내가 축복의 통로로서 우뚝 서게 됨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주는 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구를 돕는다고 할 때 결국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것은 또한 내 몸이 그만큼 건강하게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그것이 내가 잘 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도 되는 이것이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시일반이라고 비록 나는 한 숟갈을 떠 주지만 그래서 그만큼 주리는 것 같아도 그로 인해 한 사람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나도 그만큼 더 기뻐지고 더 건강해지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일이 결국은 내 행복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평안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평안한 삶은 나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상대방으로 평안하게 할 수 있을까를 그러므로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내게는 있으나 상대방에게 없는 것을 내가 채워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평안이 내게로 뻥튀기가 돼서 돌아옵니다. 내게 필요한 것으로 내게 채워지게 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기를 힘쓰심으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채워가시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이 아닙니다.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 한 가족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평안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베푸는 사랑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도록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도 베풀어 주셨고 사랑도 주셨고 상대방과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하지 말고 그 말은 무언가 빈자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빈자리를 내가 먼저 채워나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다보면 자연히 관심이 가게 마련입니다.

빈자리는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빈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나가는 내가 될 때 자연히 내 빈자리도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빈자리를 넘치는 사랑과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이 채워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이 내게 넘치게 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사람 은혜의 사람 평안의 사람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가며 먼저 주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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