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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의 기쁨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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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의 기쁨 (요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지난 월요일(21일) 새벽 2시, 저는 익산을 출발하여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 심양에 갔습니다. 전 날 밤, 아내가 꾸려 놓은 가방을 열고 바지 몇 개를 넣었다 빼었다 하였습니다. 필요할지 모른다고 점퍼를 새로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월요일 밤 12시, 다시 가방을 꾸려서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왔습니다. 되돌아오는 가방을 싸면서 순간적으로 ‘이렇게 빨리 되돌아 갈 줄 알았다면 좀 더 간단하게 가방을 꾸렸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짐짓,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용도 없는 것들을 많이도 꾸려서 지고 다니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못난 아들의 마음에는 ‘이제 나를 위하여 기도하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작년 3월에 장인께서 돌아가시자 아내가 ‘이제, 나는 고아가 되었다!’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아, 이제, 나도 고아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은, 집안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후, 모질고 지독한 박해 속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길러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핍박하던 남편까지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장로가 되는 것을 기뻐하셨고, 아들이 목사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썩을 몸이라도 드려야 한다며 찜통 같은 여름에도,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예배당 한 구석에서 철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썩을 몸을 벗고 가셨습니다. 그토록 사모하던 하늘나라로 옮겨가셨습니다.
      
그런데 못난 아들은 어머님을 생각한다는 것이 고작 기도해 주시던 보호막이 사라진 것처럼 아쉬워하였습니다. 못난 아들은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도 순전히 제 생각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미와 새끼의 차이인가 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슬프지는 않지만 가슴이 아립니다.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실 터인데 제 곁을 떠나가신 것을 아쉬워합니다. 
 
하늘의 뜻을 알면서도 땅의 것을 생각하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도 땅의 것을 헤아리는 어리석은 제 모습입니다. 얼마나 지나야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와 다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 생활이 있습니다.

I. 종교

22절 말씀입니다.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을 밤에 니고데모가 찾아왔습니다. 도덕이나 권력, 지식이나 재물로는 채울 수 없는 영혼의 빈공간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든 뱀을 쳐다 본 사람은 나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말씀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유대는 예루살렘과는 구분이 되는 유대의 시골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으로 가신 이유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베푸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세례를 베푸는 일은 제자들의 몫이었습니다(요 4:2). 

이즈음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요 1:36)이라고 소개하였던 세례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3절 말씀입니다.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사역은 변함없이 왕성하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 증표로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베푸셨고, 요한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종교의 중요한 예식입니다.

1. 종교에는 예식이 있습니다.

예식은 물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믿음의 내용이 물이라면 그것을 길어서 담는 것은 예식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데는 세례와 같은 예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a)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예식은 성찬식과 세례 두 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두 가지 거룩한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예식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식은 믿음의 형식이지 믿음의 내용은 아닙니다. 예식은 중요하지만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식을 귀중하게 여겨 그 그릇에 담고 있는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종교일반에는 예식과 함께 무엇이 있습니까?

25절 말씀입니다.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한편에서 그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과 정결 예식을 두고 논쟁하였습니다. 이 논쟁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으냐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변론은 감정이 섞인 격렬한 논쟁을 가리킵니다. 자신들이 믿는 내용을 이야기하다 보면 이렇게 감정을 실은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2. 종교에는 논쟁이 있습니다.

종교에는 각각의 논리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논리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종파 간에 대립이 있습니다. 논리가 논쟁의 단계를 벗어나 싸움이 되면 전쟁이 벌어집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심각한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것입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최근 과격 이슬람이 벌이는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기에 더욱 참혹합니다. 
      
그러나 논리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논리를 세우되 논리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과의 종교적 논쟁이 반드시 유익한 것도 아닙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상대방이 굴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을 성경에 근거하여 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감정이 섞인 논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일반에는 예식과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26절 말씀입니다.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어떤 유대인과 변론을 마치고 그들의 선생에게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그들의 선생이 소개하던 사람에 불과 합니다. 그들의 선생이 선발 주자였다면 예수님은 후발 주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니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경쟁심이 일었습니다. 

      
3. 종교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종교에는 각각의 논리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논리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종파 간에 대립이 있습니다. 논리가 논쟁의 단계를 벗어나 싸움이 되면 전쟁이 벌어집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심각한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것입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최근 과격 이슬람이 벌이는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기에 더욱 참혹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선의의 경쟁이 있습니다. 전도는 반드시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대상입니다. 우리가 경쟁을 하여야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경쟁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확대하십시오. 이 때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종교일반의 의식이나 논쟁 그리고 경쟁이 어느 정도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종교 생활을 벗고 지향하여야 할 신앙이 있습니다.


II. 신앙

우리는 세례 요한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신앙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자신에게 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세례 요한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그는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몫과 예수님의 몫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정해 주는 분이 하늘, 곧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주어진 것만 사람이 받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맡겨준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1. 신앙에는 하늘의 뜻을 아는 소명이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사역을 주십니다. 그러니 자신을 부르셔서 하시려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동되어서 자신의 소명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종교 집단의 주장에 휩싸여서 자신의 소명을 잘못 알아서는 안 됩니다.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목적에 이용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면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로 고민하여야 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신이 할 일을 알고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아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분명히 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알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2. 신앙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자, 자신이 무엇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알아야 하지만 자신의 소명을 과대 포장하면 그것으로 끝장이 납니다.

이솝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나귀 등에 불상을 싣고 거리에 나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불상을 보자마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가 잘나서 사람들이 절하는 줄 알고 우쭐한 나머지 앞으로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나귀를 끌던 사람이 나귀를 때리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네가 잘나서 사람들이 절하고 있는 줄 아느냐?”

우리가 자신을 부르신 부름을 알고 사명을 다 감당하였더라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눅 17:10)하여야 합니다. 종교는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점점 교만하게 되는 사람은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은근히 자신이 한 일을 드려내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신앙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것입니다.

겸손 합시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신 것처럼 겸손 합시다.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도 생각하지 말고 겸손 합시다!

29절 말씀입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자신의 소명을 알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있습니까? 세례 요한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신부를 맞이한 신랑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는 친구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오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자 요한의 제자들은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3. 신앙에는 기뻐하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은 누가 주인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그 목사님은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상담하고 심방하고 성실히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교세가 그 목사님 오시기 전보다 대 여섯 배나 부흥되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그 목사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생사가 걸린 큰 병에 걸렸습니다. 그 목사님은 병석에 누워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삶과 목회를 돌아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기도를 드리는 중 하루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봐! 이 목사 네가 새벽부터 밤까지 내 교회를 돌보느라고 수고 많았는데 그 수고가 과연 나를 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네가 큰 교회 만들어서 남들 앞에 보란 듯이 뻐기고 싶어서 그렇게 했나?”
      
그 목사님이 가만히 돌아보니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목회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기뻐하고, 주님이 슬퍼하시면 슬퍼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슬퍼하시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허둥대고서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원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의 신앙적 자기 관리의 결정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예수님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흥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쇠하게 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드려 예수님을 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흥하도록 자신은 쇠하여지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4. 신앙에는 주님을 흥하게 하는 섬김이 있습니다.

신앙은 점점 더 예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나고 있는지 심각하게 반성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조차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고 ‘내’가 드러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감수하여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세 되었을 때, 밀라노의 한 백작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 장면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님의 양쪽 옆에 열 두 제자들이 있는 그림입니다. 
      
그가 맨 처음 그린 그림에서는 예수께서 오른손으로 잔을 높이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한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야, 이 컵 꼭 진짜 같다.” 
      
그러자 다빈치는, 즉각 컵을 지워 버렸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팔을 가만히 탁자에 얹어 놓은 모습으로 그림을 수정했습니다. 
친구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간단하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없어야 하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더욱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의 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를 넘어서 신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종교로써 예식도 있고 신앙적 논리도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더 큰 내면적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며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여야 합니다. 신앙은 자신을 죽여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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