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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맛보아 알지어다! (시 3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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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아 알지어다! (시 34:7-10) 
 

1. 미맹(味盲), 맛을 잃은 사람들 

성도 여러분, 혹시 “미맹(味盲, taste blindness)”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글자를 모르는 것을 文盲이라 하고,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것을 컴맹,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色盲이라 하는 것처럼, 미맹이란 ‘정상인이 느낄 수 있는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맛으로 느끼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 장금이가 미각을 잃었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기억나시죠? 숙수, 즉 요리사인 강덕구가 오리 탕의 일종인 ‘충조전합탕’을 만들어 대비에게 올렸는데, 그것을 먹은 대비의 몸이 마비되었습니다. 

이 일로 강덕구는 옥에 갇혔고, 그 원인을 찾던 장금은 ‘충조전합탕’에 들어간 재료 중에 ‘육두구(肉荳蔲, nutmeg)’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육두구기름이 인삼과 섞이면서 순간적으로 인삼의 효능을 높여 마비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장금은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직접 체험하려고 먹었다가 미각을 잃었던 것이죠. 장금의 경우, 후에 벌침을 맞고 미각을 회복했습니다만, 오늘날에도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이 味盲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 미맹 때문에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은 지역마다, 계절마다 맛있는 음식들이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8절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표현하는 대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것들 중에서 맛을 보아 아는 것들이 있는데, 성도들이 그 맛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성도 여러분들이 맛보아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2. 여호와의 성찬(聖餐)들

시편 34편은 본문 앞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즉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피하던 시절에 지은 詩라는 것이죠. 다윗은 B.C. 1020년부터 1010년까지 약 10년가량 도망자로 지냈습니다. 다윗의 도피 생활에 대해서는 사무엘상 21장부터 31장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도피 생활은 대략 세 기간으로 구분되는데요. 첫째는 기브아 자기 집에서 헤렛 수풀까지(B.C. 1020~1018, 삼상19:9~22:23)로서, 이때 다윗은 사울과 그 군대를 피하는데 급급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까지로서(B.C. 1017~1015, 삼상23:1~26:25), 이 기간에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업적도 몇 가지 세웠습니다. 세 번째 도피 기간은 다윗이 어쩔 수 없이 블레셋 땅으로 망명했던 시기였습니다(B.C. 1015~1010, 삼상27:1~삼하2:1).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세 번째 기간에 지은 시입니다.

5년 가까이 국내의 이곳저곳을 숨어 다니던 다윗은 블레셋으로의 망명을 결심했습니다. 서로 적대적인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로 볼 때, 이스라엘의 최고위층이 망명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환영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역시 다윗이 안전하게 피할 곳은 못 되었습니다. 다윗의 정체는 금방 탄로 났고, 다윗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겨우 벗어난 다윗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피했고, 그때 오늘 본문을 지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자기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다윗이 이해가 되시죠?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4절 이하에서는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찬송합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 단락인 오늘 본문에 와서 다윗은 “맛본다” 혹은 “먹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본문에서 ‘맛볼 것’, 혹은 ‘먹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세 가지인데요. 7절,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9절,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다. 즉, 다윗이 “맛본다”, 혹은 “먹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보호하심”, “선하심”, “부족함이 없음”입니다. 이런 것들을 그가 맛보아 알았다고 말하고 있어 그것 때문에 이 본문을 살피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맛본다”, 혹은 “먹는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맛본다”는 말의 성경 원어는 “타암”인데, 이 말은 ‘먹을 목적으로 먼저 맛이 적당한 지를 혀로 시험하거나 평가하다’는 뜻입니다. 음식의 간이나 맛을 볼 때 숟가락이나 국자로 조금 떠서 먹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경우에 쓰는 말이 “맛본다”라는 것이죠. 이 ‘맛본다’, ‘먹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맛을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은 조금이라도 맛보면 금방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맛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다윗이 맛을 본 후에 그 맛이 대단했다고 말하는 것들을 여러분도 알아서 여러분 역시 그것을 맛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이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맛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보호하심

다윗이 맛보았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그것을 ‘맛보아 알라’고 권하는 첫 번째의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국내에는 더 이상 머물 데가 없어 블레셋으로 도피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항상 블레셋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을지라도, 자신이 이스라엘을 떠나면 블레셋이 유리하게 될 것이며, 또 이제부터는 블레셋의 승리를 도울 것이기 때문에 환영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도망을 다니느라 지난 몇 년 간은 전쟁터에서 블레셋과 직접 부딪힌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신을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계속 전쟁 중인 상황에서 자신 역시 사울과 싸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즉 블레셋이나 자신이나 적이 같기 때문에 자신을 환영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신하들과 아기스 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선두에 선 거인 골리앗으로 인하여 거의 다 이길 뻔 한 전쟁을 한 순간에 역전시켜버린 꼬마 용사, 그 작은 전쟁 영웅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를 만만이로다(삼상18:6~7, 21:11)”라는 이스라엘의 유행어처럼, 그 동안 블레셋 군대를 가장 많이 죽인 장군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블레셋의 관리들과 아기스 왕은 다윗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다윗을 알아 본 아기스의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삼상21:11)?” 즉 그들은 다윗을 이미 왕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확실하게 다윗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다윗은 안전하게 피하려고 블레셋으로, 아기스 왕에게로 갔으나 거기서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아기스와 그의 신하들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여길 정도로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 빠지자 다윗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사무엘상 21장 13절, “다윗이 …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순간적으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했습니다. 

순간적인 위기 대처법, 임기응변이 놀랍기는 합니다만, 여러분, 다윗이 그렇게 미친 사람 연기를 할 때 속으로는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겉으로는 거품을 흘리며 미친 척하고, 속으로 절박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상 21장 14, 15절,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아기스 왕은 다윗으로 인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정작 마주하고 보니 정상인이 아닌 것을 보고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미친놈 때문에 긴장하다니! 당장 내쫓아버려!’ 그렇게 해서 다윗은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만약 그때 다윗의 시도가 실패했다면, 다윗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 간절하게 부르짖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서, 순간적인 재치로 미친 사람 연기를 하게 하셨고, 또 아기스 왕으로 하여금 다윗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기를 벗어난 것, 이것이 다윗이 맛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제리스 브라간’이라는 사람이 뜻하지 않은 일로 미국 테네시 주의 한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도소는 집단 따돌림과 몸집이 작고 약한 죄수들이 덩치가 큰 죄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브라간은 체구가 작은 젊은 죄수 두 명이 교도소 마당을 悠悠自適하게 거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두 젊은 죄수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의외라서 브라간은 동료 죄수에게 물었습니다. “저 두 젊은이를 괴롭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동료가 말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때문이지요. 젊은이들의 아버지는 테네시 주 동부의 유명한 갑부이자 권력가인데다가 몸집이 거대한 터프가이입니다. 그는 아들들이 교도소에 갇히자 아들들이 다른 죄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도 일부러 작은 죄를 짓고서는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들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지요. 

그런 아버지 때문에 교도소 안에 있는 죄수들은 아무도 두 아들을 괴롭히지 않았어요. 1년 후에 아버지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아들들만 감옥에 남았지만 아무도 저들을 괴롭히지 못해요. 왜냐하면 죄수들은 저들의 아버지가 언제든 다시 들어와 보복할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들이 응석받이로 자라기보다 언제나 당당하고 사내답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아들들을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각오하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이런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믿어지고 그 하나님의 보호를 맛보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자들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을 보호합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마하나임에서 두 무리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도 여리고 성을 치기 전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맛보아 아는 여러분, 경험하여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선하심

다윗이 맛보았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그것을 ‘맛보아 알라’고 권하는 두 번째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선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토브”로서 제가 자주 소개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종종 ‘경제적인 이익’을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요셉 시대에 바로의 꿈에 나타난 무성하고 충실한 곡식 이삭(창 41:5, 창 41:36), 전도서 3장 13절에 나오는 노동에서의 “선”은 노동이나 일을 통하여 얻는 ‘실제적인 수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질이 우수하고 가치가 뛰어난 상품’을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창2:12, 아1:3). 또한 이 말은 아름다움이나 혹 잘생긴 것(창 6:2, 24:16, 삼하 11:2, 삼상 16:12)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주 ‘행복(happy)’을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또한 이 말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킵니다(시 34:14, 왕상 8:36, 대하 14:1, 대하 31:20). 그리고 ‘질서 있다’, ‘맛있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삿8:2). 이렇게 “선하다”는 말은 정말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맛본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다윗은 사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악하게 대하고, 피한다고 피한 아기스 왕조차 자신을 박대했지만 하나님만은 자신을 선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善待하심을 경험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습니다.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인 일은 정말 용서받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돌팔매질을 해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다윗을 선대하사 받아주셨습니다. 

유대인의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이 끝나가는 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웠습니다(요8장).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녀를 둘러싼 무리들의 손에는 짱돌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잡힌 일과 자신의 죄가 천하에 공개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여인은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모두 다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善待하심입니다. 악한 자, 죄지은 자, 부정한 자, 자격이 없는 자를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역시 이와 같이 善待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의 선대하심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죄인으로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주신 것만큼 큰 善待가 무엇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허물 많고 부족한 우리를 한결같이 선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歡待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한결같이 여러분을 선하게 대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또 그것을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맛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부족함이 없음

다윗이 맛보았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그것을 ‘맛보아 알라’고 권하는 세 번째의 것은 “부족함이 없음”입니다. 8절을 보면,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데, 이때의 “복”은 ‘행복(happiness), 지복(bliss)’를 의미합니다. ‘지복’이란 ‘최고, 최상의 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9절의 “부족함이 없도다”라는 말은 ‘필요한 것이 다 있다’, ‘모자란 것, 아쉬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10절의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나서 물이 온 땅을 뒤덮은 상태, 즉 물이 줄어들기 전 漲溢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창세기 8장). 그러니까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흘러넘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아기스 왕 앞에서 食怯을 했습니다. 겁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아니 아예 죽음을 맛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안전하게 하시고 평안으로 먹이셨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젊은 사자는 百獸의 왕으로서 아무 때든지 원하는 짐승들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젊은 사자가 주릴 때는 언제입니까? 거의 그럴 경우가 없지만, 젊은 사자가 굶주릴 정도라면 초원에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이 표현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궁핍하고 어려운 때라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장 7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가서 애굽에서부터 가나안으로의 출애굽 경로를 아주 조금 보았는데요. 저 같으면 그런 곳에서는 하루도 지내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제가 갔을 당시,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렸는데요. 그곳에는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을 피할 그늘이 없었습니다. 

마실 물은요? 먹을 양식은요? 그런 것들이 충분했겠습니까? 그런 광야를 40년 동안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농사를 짓지 않은 이스라엘 2백만 명이 40년 동안 굶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막에 물 샘이 터져서 그 많은 사람들과 짐승들이 마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부족함이 없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이었습니다.

‘롤랜드 베이커’와 ‘하이디 베이커’라는 아프리카 모잠비크 선교사님 부부가 지은 『항상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두 분은 아무 것도 없이 모잠비크로 갔습니다. 심지어 후원금을 모으려고 하거나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간 두 선교사님은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Maputo)에서 거리를 헤매는 상처 입은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죽어 가는 아이들을 데려다 돌보는 사역을 시작했고, 아이들은 금방 불어나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후원자나 후원금 하나 없이 매일 엄청나게 드는 양식을 어떻게 구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생각지 않은 방법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그리고 부정부패가 심한 관료들의 행패가 있었지만 두 선교사는 그 문제까지도 잘 해결했습니다. 그러던 중 부인 선교사가 병을 얻어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얼마나 심했든지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미국 캘리포니아에 잠시 멈추어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 되자 의사들도 그 선교사를 포기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퇴원하여 캐나다 토론토에 잠시 머물던 중, 마침 집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습니다. 첫 시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기에 찬양을 부를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선교사는 자신의 몸이 깨끗하게 치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상적으로 숨을 쉬면서 찬양하며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이러한 모습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고, 곁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즉석에서 간증을 요청했습니다. 그가 간증을 했고, 간증을 들은 사람들이 선교사님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자, 선교사님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은 그렇게 바닥에 쓰러진 채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찢기고 상한 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주님은 매일 매끼 수 백 명의 아이들을 먹이게 해 주셨습니다. 선교사들이 부자인 줄 알고 요구하는 관료들을 따뜻하게 맞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부족함이 없게 만드십니다. 다윗이 경험한 이 부족함이 없는 복을 여러분도 맛보며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의 성찬을 맛 볼 사람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맛본 후에 여러분에게도 그것을 맛보아 알라고 권하는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부족함이 없음.”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복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여러분이 맛보도록 珍羞盛饌을 차려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 풍성한 식탁, 하나님의 진수성찬을 맛볼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은 8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 “피하는 자”입니다(8). 세상이나 사람이나 땅의 것,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찬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9). 하나님을 겁내는 사람이지요. 아니 하나님만을 겁내는 사람입니다. 세상도, 사람도, 권세도, 돈도, 병도, 그 무엇도 겁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겁내어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찬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여호와를 “찾는 사람”입니다(10). 찾는다는 말은 ‘자주 드나든다’, ‘요구하다, 문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의 처소를 자주 드나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珍羞盛饌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선대하심,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심과 그 외의 것들을 마음대로 맛보고 누리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또 다른 사람을 향하여 여러분이 맛보아 안 것들을 권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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