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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롬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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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 (롬 11:1-8)


저는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가운데 미국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해외로 여행을 하다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고마움입니다.  내 나라가 있어, 내 나라의 신분으로, 내 나라의 여권으로 다닌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내 나라가 아니기에 미국에 들어갈 때는 까다롭고, 힘들고, 왠지 불안하고, 이상하게도 기가 죽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올 때는 얼마나 가볍고, 편하고, 좋고, 신속한지 모릅니다.  이번에 정말 나라가 너무도 중요하고, 감사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여러분, 6월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달입니다.  특히 이번 주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전쟁이 오래되어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전쟁의 위험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하고 나라를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렇게 보내는데 우리 믿는 자는 더욱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믿음의 삶은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개인의 풍요가 있고, 가정도, 교회도 평안한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우면 어느 것도 누리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나라와 민족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일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습니다.  현대한국역사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나라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를 진정 사랑해야 합니다.  시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사명을 새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나라를 사랑해야 할까요?  성경은 나라사랑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칠까요?  나라를 사랑한다면 언제나 가슴 깊이 새기고,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그것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한 어떤 성경보다도 심오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성경중의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서신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습니다.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는 교리를 말하고, 후반부는 실천을 강조합니다.  로마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로마서의 전반부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감격과 성숙과 거룩한 삶을 개인과 공동체의 현장에서 나타낼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전반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다가 이제 유대인을 향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그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많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제 바울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을 바라봅니다.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민족, 동족입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열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전합니다.  그 중에 우선적으로 주목할 말씀은 1절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살면서 유대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유대인이 자기를 핍박하고 모함하고 복음의 방해자들이었지만, 자기도 이스라엘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지파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지금 바울은 소속감을 말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민족에 속하였는지 분명한 소속을 밝혀줍니다.  이것이 바울의 나라사랑이요, 우리들의 나라사랑이어야 합니다.  나라사랑은 먼저 분명한 소속감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인간 삶의 모든 것에는 개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무엇보다도 소속감이 중요합니다.  혼자 평생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닐진대 내가 어디에, 무엇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그의 삶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소속감을 가질 때 비로소 행복하고, 평안하고, 의지하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상대적으로 소속감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은 불안하고 병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소속감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믿는 자로서 먼저 가져야 할 소속감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우리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나라에 시민권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늘 이것을 확인시키고, 우리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이 말씀은 힘들고 어려운 때에, 소속과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때에 더욱 믿는 자의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소속감과 함께 필요한 것이 교회의 소속감입니다.  많은 교회가운데 우리는 대광교회에 속한 성도들입니다.  개봉동에 살게 하신 하나님이 나와 가족과 후대의 신앙을 위해 교회에 몸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교회를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신앙의 중심입니다.  내가 교회에 속한 교인이고, 직분자요, 성도임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교회의 소속과 교회생활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소속감이 필요합니다.

또한 내가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나라사랑은 소속감에서 시작됩니다.  미국은 여러 종족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영어도 ‘United State of America, 미합중국’입니다.  여러 개의 나라, 주가 연합했다는 뜻이지만 지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종적인 연합의 의미가 아주 큽니다.  모두 자기 민족을 사랑하겠지만, 한국 사람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열기가 대단했겠지만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도착할 즈음에 한인들이 모인 곳은 이미 붉은 색으로 도배를 하였습니다.  캘리포니아지역에서 경기가 새벽4시30분에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입니다.  그들이 모이는 곳은 대부분 교회입니다.  모두 모여 대한민국을 외쳤고, 골이 들어갈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흥분과 감격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교회가 주도하는 것에 의미가 있었고, 한국인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은 무엇보다도 소속감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앙과 삶에 소속감의 중요성을 언제나 잊지 마십시오.  먼저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라는 소속감을 분명히 하십시오.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확신하십시오.  또한 내가 대광교회에 속한 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내가 몸담고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늘 자부심과 긍지로,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책임감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또한 이 일에 부름 받은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여 자기가 쓰임을 받고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동족 유대인을 향한 사명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도 믿지 않는 자가 있고, 유대인 가운데서도 많은 믿는 자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 하나의 예를 엘리야선지자의 시대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이 모든 선지자들을 죽이고, 오직 자기만 남겨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답변은 자기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유대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을 남겨두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구원의 복음이 넘어가고 있지만, 남아있는 유대인에 대한 연민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동족사랑이요,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다.  구원은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도 받습니다.  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너도, 우리도 받습니다.  결코 믿는 자는 나만 구원받아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말합니다.  남아 있는 모든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들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사랑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민족을 향한 거룩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특히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거룩한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방향이 이웃과 주변을 향하고, 민족과 나라와 향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을 향한 책임감으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라가 구원받고 못 받는 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도 믿는 자, 바로 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신앙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균형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균형, 안과 밖의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에 속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도 권리와 책임의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책임을 다한다는 것만큼 소중한 삶이 없고, 귀한 신앙이 없습니다.  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는 얌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책임만 다하고 권리는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권리와 책임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특히 나라와 민족을 향한 균형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리는 권리가 있어야 하고, 책임도 감당하고,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한한 책임도 느껴야 합니다.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먼저 나를 돌아보고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통감하는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와 사회에, 교육과 다음세대에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봇물 터지듯 비난의 화살을 쏟는 것은 나라사랑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자라면 잘한 것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잘못한 것을 돌아보는 자여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과 공동체에 넘쳐야 합니다.  그런 사회, 그런 공동체가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민족을 향한 거룩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자는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받는 자가 날마다 더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곳곳에 만연한 타락과 부패와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달라고 회개하며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구원받는 자가 생기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모두가 구원받고, 모두가 잘되고, 모두가 잘사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민족을 향한 거룩한 책임감을 갖고 더욱 기도하고, 더욱 전하고, 어디에서든지 본을 보이며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기대감입니다. 

로마서 11장은 전체가 구원역사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어 구원의 날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성격을 띤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확보되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이제 곧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완악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7-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지금 부분적으로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들이 믿고, 돌아오고, 그들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고백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족 유대인들도 앞으로 예수를 믿는 기대감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고통과 아픔이 있어도 때가 되면 회복될 것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지금 완악하고 패역해도, 힘들고 어려워도 그는 자기민족을 향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정한 나라사랑입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런 기대감을 갖고 미래를 전망해야 합니다.  기대감을 갖는 것보다 희망적인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메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미래를 향합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장래를 소망하고 바라보면서 오늘을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소망이 없다면 개인이나 공동체나 벌써 무너졌을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세계역사에 우뚝 서게 된 것도 모두 소망 때문입니다.  성경은 소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런 소망을 전했습니다.  과거에 매여 한걸음도 가지 못하고, 오늘 먹고 사는 일 때문에 내일을 장담하거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민족위에 희망과 소망을 심어주면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소망과 기대감으로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어렵다고 끝이 아닙니다.  지금 힘들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희망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하고, 기대감으로 대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나라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바라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은 결국 기대감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기대감을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기대감으로 살고,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라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에 있는 한국축구도 그런 기대감으로 응원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우리 선수들이 선전해서 목표를 이루도록 기대감을 갖고 열심히 응원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한강의 기적이 다시 이 땅에 임하도록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아시아에서 가장 못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 한강의 기적이 하나님의 은혜로 임한 것입니다.  그런 기적이 다시 이 땅에 임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민족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70년 80년대에 불었던 성령이 바람이 다시 올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은 소속감, 책임감, 그리고 기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뜻 깊은 달에 믿는 자로서 더욱 나라를 사랑하고 기도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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