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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말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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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말 1:6-14) 
 
 
일제시대 서양화가로 유명한 이중섭(1916~1956) 화백의 일화입니다. 한번은 그의 절친한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문병을 가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내심 섭섭해 있었는데, 며칠 후에서야 이 화백이 나타났습니다. 친구는 반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무척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오는가?” “미안해. 벌써 찾아오려고 했지만 빈손으로 올 수 있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빈손으로 오면 어때서. 자네가 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당시 이 화백은 아주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들고 온 꾸러미를 친구에게 멋쩍은 듯 내밀었습니다. “이게 뭔가?” “내 정성일세. 실은 이걸 갖고 오느라고 늦었네.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게나.”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맙네.” 친구는 꾸러미를 풀어보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림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림인가?” “천도(天桃)를 그린거야.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마음으로라도 이걸 먹고 얼른 일어나게.” 과일을 사다 줄 돈이 없어서 복숭아를 그려 갖고 온 것입니다. 그 마음은 천도복숭아 몇 트럭보다도 더 아름답고 귀중한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친구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 최상의 선물이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주고받음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만일 마음의 주고받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남남과도 같을 겁니다. 예를 들어 한 지붕 밑에 살아도 가장 가깝다고 하는 부부 관계나 부모 자식 관계라 할지라도 마음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멀고 먼 사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표현하면 하나님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나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게 곧 예배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형식이나 모양도 중요합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식을 가급적이면 아름답고 단정하게 꾸밀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 마음이 담뿍 담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순서마다 요소요소에 나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배에 관한 메시지로 ‘마음을 드리는 예배’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우리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더 나아가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서는 주전 5세기 중엽에 기록된 책으로 구약성경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의 잘못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잘못된 예배 생활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생활, 더 나아가 인생의 중심이 곧 예배이므로 말라기는 예배에 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잘못되면 심령 상태가 잘못되고, 도덕성이 흔들리고, 결국은 모든 삶이 부패하고 뒤틀리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예배에서 실패하고, 그로 인해 도덕적인 부패와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거절당한 예배를 말씀하고 있는데 마음이 빠져버린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이 주어진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메시지가 얼마나 강렬한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본문 6절~14절을 보면 9개절인데,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는 표현이 조금씩 형태가 달라진 것까지 포함하면 무려 8번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6절에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 9절, 10절, 11절, 1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13절(하)에서는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그리고 14절(하)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엄하신 모습으로 책망하며 말씀하고 계신지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①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 관행을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지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백성들을 선도할 제사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예배 관행에 젖어 있는지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습니다. 7절 보면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린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떡이란 더러운 짐승 제물을 가리킵니다. 

레22:19~22의 제시된 기준에 의하면 제물은 흠 없는 숫 컷이어야 하고, 눈먼 것이나 상한 것 등 조그만 흠이 있어도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흠투성이인 제물을 제단에 바쳤던 것입니다. 8절 보면 그 구체적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등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차피 죽을 것들이며 어차피 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쳤다기보다 처리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골라서 좋은 것을 드린 게 아니라, 골라서 나쁜 것을 처리한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엉터리 제사를 드리면서도 투덜거렸다는 사실입니다. 13절 보면, 그들은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하며 불평했습니다. 번폐스럽다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다는 뜻입니다. 이런 왜곡된 제사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14절 보면 하나님은 아예 그들이 사기를 쳤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오죽 하면 그런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또 이스라엘의 가증스러움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제사를 멀쩡히 드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한 마디로 가증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빠져버린 헛된 예배요 실패한 예배였습니다. 6절 보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빗대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인간관계들 속에서라도 당연히 공경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 ”

이런 문제는 구약 이스라엘 가운데 고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 나중에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마15:7~8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음이 빠져버린 신앙과 예배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아마 하나님으로서는 구역질이 날 정도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8절.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이렇게 해놓고도 하나님 앞에 은혜와 축복은 받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9절 보면 그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탄식하며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이 바로 이겁니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 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 외식적인 예배, 타성에 젖은 예배, 억지로 하는 예배, 성의없는 예배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가증스러운 예배였고, 그들은 철저히 예배의 실패자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거절하시고, 그들 자신조차 거부하십니다. 9절(하) 보면 하나님이 반문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통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4절.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게 거부당한 인생이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습니까?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비극적인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이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백성을 일으키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새 이스라엘입니다. 

말라기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예언합니다. 그 중에 한 말씀이 바로 1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기서 ‘깨끗한 제물’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된 성도들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정해진 성전에서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영이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성령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 찬양, 감사 등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모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참조) 따라서 마음을 담지 않은 그 어떤 예배 순서도 무의미합니다. 잠23:26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 ” 마음을 달라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유일한 소원인 것입니다. 

어느 아프리카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추장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됐습니다. 추장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신발을 선교사에게 가져와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추장의 신발을 원치 않으십니다.” 추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장 좋은 말 한 필을 끌고 와서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선교사는 하나님이 말을 원치 않으신다고 대답했습니다. 당황한 추장은 이번에는 추장의 지위의 상징인 깃털이 달린 모자를 들고 왔습니다. 선교사는 여전히 머리를 저었습니다. 추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외쳤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가장 아끼던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제 생명 뿐입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원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추장은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예수님을 위해 바치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돈 몇 푼, 몇 시간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인 참 예배요 참 신앙입니다. 시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가 많이 나옵니다. 고라 자손의 시의 중요한 특징은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점입니다. 시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고라 자손은 무명 인사지만 시편에 여러 편의 시를 남기게 된 이유는 그의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게 참 신앙 고백이요 참 예배인 것입니다. 

 [3] 오늘 우리의 예배 점검 : 참 예배를 위한 체크 리스트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예배 생활을 한번 찬찬히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예배 순서마다 마음을 담아 드리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마음을 드리는 예배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의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예배를 본다’는 말을 씁니다. 그 말은 예배의 기본 정신에서 한참 벗어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즉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닙니다. 구경하거나 관람, 감상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 어떻게 하나 보자, 대표 기도자가 어떻게 하나 보자 이게 아닙니다. 모든 순서 순서에 나의 마음을 가득 실어야 합니다. 감상자가 있다면 오직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해서는 말도 바르게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가 바로 드려질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드리는 예배를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유의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배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우리의 마음이 실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준비의 소홀입니다. 정성스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준비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주일예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토요일부터 미리 예배 준비가 이뤄져야 합니다. 설교자나 찬양대원, 대표 기도자, 안내위원 등 예배위원만 준비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든 성도들이 예배자요 예배위원이므로 성도 각자가 준비해야 됩니다. 한 주간 동안 바로 살아야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세상의 죄악에 물든 게 있었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정결한 마음이 준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이 위대하심과 놀라운 은혜를 묵상함으로써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예배 순서담당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이런 준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예배는 정말 엄청난 차이가 날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자기 할머니를 추억하면서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어린 시절에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지금은 천국에 가 계신 할머니의 아름다운 옛 모습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고 고백했습니다. 청년은 특히 할머님의 예배 준비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할머니는 토요일이 되면 갖고 계신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잘 세탁하고 다려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헌금할 지폐를 물을 축여가면서 인두로 잘 다려놓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하고 번거로워 보여서 그 이유를 여쭤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오히려 질문을 하는 손자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답니다. “얘,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가정해 봐라. 얼마나 준비한다고 야단이겠니?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 예배드리러 가는데 아무 준비 없이 가서야 되겠니?”

물론 우리가 이 할머니와 꼭 같이 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성스런 자세만큼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정성을 들여 준비할 때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마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 마음이 예배의 실제 속에 반영되어서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은혜와 복을 충만히 내려 주십니다. 

이렇게 예배를 잘 준비하면 벌써 예배의 실제 상황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기뻐받으시고 은혜를 내리십니다. 그리고 준비한 사람은 당연히 시간도 잘 지킵니다. 간혹 사정으로 시간이 늦어져도 미리 준비한 사람은 훨씬 낫습니다. 그렇지 않고 준비 없이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은 결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위치나 자세도 중요합니다.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야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편적으로는 앞자리에 앉는 게 좋습니다. 집중력이 달라집니다. 

매 순서마다 긴장감을 갖고 임해야 합니다. 딴 생각을 한다든지 다른 일을 하면 그 예배는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봉사자들은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됩니다. 예배 시간에도 봉사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이런 저런 것으로 방해 받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는 가급적 1부 예배를 드리면 좋습니다.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한 예배를 드린 후에 봉사하면 최선의 봉사가 될 겁니다. 

모든 순서에 최선을 다하고, 특히 헌금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분량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많든 적든 반드시 그 속에 마음이 담겨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막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부자들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헌금에 담겨진 마음의 간절함과 진실함의 크기입니다. 

이렇게 예배 준비 과정이나 실제에 있어 마음을 드릴 때 우리는 예배의 승리자가 됩니다. 또한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은혜를 풍성히 부어주십니다. 삼상2:30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배에 실패한 엘리 제사장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 말씀의 경고대로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귀중히 여기던 엘리는 제사에도 실패하고 가정과 인생에서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그를 하나님이 경멸하신 겁니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즉 예배 태도가 곧 하나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마음을 드리는 참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복된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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