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향유의 제물 (막 14:1-9)

  • 잡초 잡초
  • 392
  • 0

첨부 1


향유의 제물 (막 14:1-9)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긴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이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생활은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결혼한 지 13년 되던 해 부인이 죽었습니다. 또다시 결혼하게 된 그는 모두 스무 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는데, 그중 열 명은 어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스무 살쯤 되어 죽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자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 작곡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인생의 고난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 D. G. 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오르간을 위한 합창 전주곡들은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 (The most High God!) 바치는 곡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르간 반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 N. J. 즉 '예수 이름으로' (In Nomine Jesus ; In the name of Jesus) 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바하는 물론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훌륭한 작곡가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하의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목마를 때의 한 모금 생수와 같습니다. 특히 가장 밑바닥의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본 사람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이란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 귀한 감격을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잔치하는 기쁨입니다.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데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주인 되는 시몬은 아주 큰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그만큼 잔치할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잔치할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는 불과 며칠 전에 이웃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다시 살아남으로 인한 기쁨으로 바뀌게 된 것을 이웃으로서 함께 축하해 주고 싶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나병환자로 남아있다고 할 때 어떻게 사람들을 청해놓고 잔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시몬 자신이 나병으로부터 놓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잔치를 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서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들 중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하는 뜻은 그 집의 주인인 시몬이 나병을 앓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는 더 이상 집에서 머물 수도 없습니다. 마을을 떠나야만 합니다. 비록 환자는 집을 떠난다고 해도 그 집 식구들 역시 이웃들과 편히 함께 지낼 만한 처지가 못 됩니다. 그것이 나병이 주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그런 집에서 무슨 잔치를 합니까? 그건 더 이상 나병이 그 집의 고통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었던 시몬이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합니다.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던 그입니다. 아니 스스로 사람들을 피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하며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나병은 하늘이 주는 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저주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기쁨으로 잔치를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큰 기쁨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시몬의 집과 같은 곳입니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문제투성이의 사람들, 허점투성이의 사람들,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 온갖 모욕과 비난을 다 들으면서도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사람, 제 잘난 맛에 다른 사람은 뭐라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이 뭐를 할 수 있겠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 나아”라면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 하여간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항상 항아리 깨지는 소리만 가득해야 하는데 오히려 함께 잔치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잔치 한마당이 날마다 벌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면면을 살펴보면 다른 점들도 많습니다.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마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난 다음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서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누구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누구는 주님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고 있으며 누구는 또 그에 맞춰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그 안에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자기 흥에 겨워 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비하 자기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닌 흥겨운 잔치 한 마당의 삶으로 바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들이 된 거냐 하면 아직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2%가 모자라서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아니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고나 할까요? 마치 비빔밥 마냥 온갖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서 묘한 화음을 내는 곳 그래서 더 맛깔 나는 곳입니다. 

이 분위기에 푹 빠져보십시오. 잔치는 즐기는 자리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준비하는 사람 뒷수발을 드는 사람들도 있음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마르다처럼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고요 마리아처럼 어찌 보면 약삭빠르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접시를 닦으랬더니 접시를 깨먹는 사람도 있고요 그저 조용히 한쪽 구석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잔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 즐거움의 자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만 가지고 보자면 한 사람 한 사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끼리끼리 놀기도 하지만 그런 엇박자가 어울려서 묘한 화음을 냅니다. 하나 될 것 같지 않은데 하나가 됩니다. 하나같은데 여럿이고 여럿 같은데 하나입니다. 이 묘한 잔치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쪽 구석에 버려진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아픔 때문에 남의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안에 어떤 비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잔치 본래의 목적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잔치가 바로 천국입니다. 거기 초대받은 사람들이 별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부름을 받고 그 부름대로 따른 사람들입니다. 잔치자리로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준비된 예복이 있었습니다. 그 예복을 입고 잔치자리에 참여한 자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바로 그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감격이 있습니다. 마치 집주인 나병환자 시몬처럼 구원의 감격 죄 사함의 감격 나 같은 사람도 택함 받았다는 감격이 있습니다. 단지 몸만 고침 받은 것이 아닌 몸과 마음이 아니 그 삶 전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잔치가 더욱 즐거운 것입니다. 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삶이 날마다 우리 가운데 이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헌신의 한 마당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여자는 바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입니다. 전에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대접할 때 언니 마르다는 대접할 것을 준비하느라 분주할 때 자기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 말씀만 듣고 있던 어찌 보면 철부지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약아 빠진 지혜로운 사람같이도 보이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자기 형제 나사로가 죽게 되는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간절히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주시기를 사람까지 보내 청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이미 동생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까지 지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으로 함께 가자고 하시더니 무덤 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데요” 했더니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십니다. 

그래 돌을 옮겨 놓았더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때의 감격과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마리아는 자기가 평생에 모았던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들고 이 잔치 자리로 나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고 자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며 가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려 감사와 헌신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향유의 값도 값이지만 여인의 생명과도 같은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아름다운 헌신이었습니다. 이건 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마음 그래서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매우 값진 향유 학 옥합을 들고 나왔던 것이요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부어드려도 그녀에게는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 향유 한 옥합을 주님을 위해서 깼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이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구원의 감격이 그녀에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실 때 거기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아무리 존귀한 사람들로만 가득하다고 해도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건 마치 김빠진 사이다요 팥고물 빠진 찐빵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죄의 감격 나 같은 죄인도 불러서 자녀 삼아 주셨다고 하는 구원의 감격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감격이 있을 때 참된 헌신이 가능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의 노예였습니다. 무덤 속에 장사 지낸 바 된 시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어놓아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늘나라 백성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함께 하는 잔치 자리, 그렇다면 거기에 어찌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없겠습니까? 그 자리가 어찌 흥겹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잔치 자리에 주인공 되시는 주님이 함께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이 항상 잔치 자리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내 안에 항상 함께 계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감격과 감사를 담은 아름다운 헌신이 우리들의 삶 속에 있어야 됩니다. 

나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야 합니다. 나의 감사와 감격을 이웃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잔치 자리에 이웃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초청만 하면 됩니다. 잔치 자리에 함께 참석하도록 초청하고 그들을 만나 함께 잔치 자리로 나아오면 됩니다. 안드레와 빌립은 베드로와 나다나엘에게 이런 초청을 했습니다. 너무도 쉽습니다. 그들은 단지 “와 보라”고 했을 뿐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와 보라”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 기뻐하는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항상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드렸던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은 이런 감사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 값이 얼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랩돈 우리 값으로 겨우 800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도 “저 여인의 드린 것은 그 누구보다도 많다 저 여인은 없는 가운데서도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드렸다”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건 그렇게 칭찬받을 일은 못됩니다. 오히려 보잘 것 없어도 거기에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이라면 그 어떤 값진 것으로 인해서보다 더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보십시오. 어린아이의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여자와 아이 외에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물며 이 여인은 자기의 한 평생 모은 자기의 전 재산을 그것도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 주님을 위해 그 옥합을 깨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어디에서 이보다 더 큰 헌신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감사와 찬양이 가득한 헌신이 우리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한데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이 그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라고 콕 찍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하는 것으로 보아서 가룟 유다만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그러니까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건 그 의도대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내가 몰던 덤프트럭이 뒤집혔다오. 몸은 괜찮은데 트럭이 좀 망가졌지요. 나의 과실이라서 변상해줘야 되니 두 달 동안은 송금할 수 없을 것 같소. 본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많고 해외에 나와서도 시원한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 신세가 원망스럽구려.”
중동 붐이 한창인 시절에 한 부인이 해외에서 취업중인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입니다. 마음 착한 아내가 답장을 썼습니다. 

“여보, 자동차가 전복되었는데도 몸을 상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해외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건강하게 취업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당신은 막일이라도 하겠다고 가셨는데 운전 경력을 인정받아 중장비를 끌게 되어 좋아하셨지요. 신세를 한탄하며 불평할 일이 아니라 모두 감사할 일들뿐이네요.”

같은 사건이 불평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감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불평과 감사는 바로 한 그릇 속에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감사’의 편에 서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 덕분에 함께 잔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사하는 여인을 보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들의 말도 일부는 맞는 말입니다. 삼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일당을 삼백 일치를 모아야 삼백 데나리온이니까 요즘 가치로 계산해보면 하루일당 5만원이라면 1500만원이고 10만원으로 잡으면 3000만원이 되니 이 향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더 보람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향유 한 옥합을 드리는 여인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담겨 있는 감격과 감사 눈물로 그 발을 씻는 그 마음을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비난은 바로 이 마음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저 내 생각대로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베다니는 매우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한 동네에서 사는 시몬이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합니다. 부자 가운데는 이런 고침을 받은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건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그녀도 베다니에 집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 가난한 동네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삼백 데나리온 값이 나가는 향유 한 옥합이라는 것은 그 값으로만 따질 수 없는 소중함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다 쏟아부어드린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우리는 받아주어야 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그 여인을 받아주었어야 하는 겁니다. 누구는 그저 말만 만든다고 하지 말고 함께 하고자 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게 나타났을 뿐 그분 역시 함께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오히려 아름답게 받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가운데 주님이 계심으로 이런 사랑이 이런 헌신이 이런 기쁨이 완성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잔치 자리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그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그 주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비난이 아닌 감사와 칭찬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제물을 주님께 드리는 귀한 삶이 날마다 이어질 수 있기를 축합니다.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에 다니던 두 학생이 등록금을 낼 수 없는 형편에 처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파데레브스키(Paderewski)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등록금을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출연료 2,000달러를 책임지고 지불하겠다는 약속 아래 열심히 연주회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연주회 결과는 예상과는 빗나가 오히려 적자를 보고 말았습니다. 

총수익금이 고작 1,600달러였으니, 등록금은커녕 매니저와의 계약금도 치룰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수익금의 전부와, 모자라는 400달러는 앞으로 갚겠다는 서류를 만들어 파데레브스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취지를 뒤늦게야 알게 된 음악가는 가난한 학생들로부터 받은 1,600달러를 다시 돌려주면서 학비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파데레브스키는 폴란드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당시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폴란드 국민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파데레브스키는, 심각한 기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미국에 식량 원조를 요청할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원조를 요청하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미 많은 식량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미국 대통령 후버(Herbert Hoover, 미국의 31대 대통령)를 찾아가 정중히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후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 세계 대전으로 폴란드가 기아 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것 같아 보내드렸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렵게 대학을 다니던 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당신이 연주회를 하고 돌려 준 돈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시간이 우리의 예물이 이런 아름다운 상급으로 되돌려질 줄로 믿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로 인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헌신이 이렇게 모두의 마음에 모두의 삶에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게 하는 아름다운 제물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