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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생각을 버린 사람 (왕하 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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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버린 사람 (왕하 5:8-14)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매우 영리하고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짐승보다도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2004년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덩치 크고 미련해 보이는 코끼리도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두꺼비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보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다가 무수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3절~14절 말씀에“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셨습니다. 

또한 짐승들은 아무리 맛있는 먹이가 있어도 자기 위장 70%까지만 채운다고 합니다. 심지어 먹는 것 밖에 모르는 돼지도 자기 위장 7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20%~200%까지 먹다가 채하고 탈이 납니다. 짐승들이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만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병이 납니다. 이렇게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착각을 잘합니다. 착각이란 현실과 다른 생각을 말합니다. 두 의대생이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떤 한 남자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의대생이 그 모습을 보고“저런 자세는 류마티스 관절염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의대생이“아니야 디스크 걸리면 저런 자세가 나오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서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냐 디스크냐를 두고 다투는데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아주 심각하게 묻기를“선생님 제가 너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화장실 갈 일이 급해서 억지로 참으며 몸을 꼬며 다가오는 사람을 두고“류마티스 관절염이니, 디스크니”하고 다투었습니다. 

아는 척하며 전문 병명까지 말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의대생들처럼 이렇게 착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는데 스스로 착각을 하면서 오해를 하고 분노하고 또는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의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3장 41절에는“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방법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기준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9절에“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방법, 내 경험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므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습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 나아만에 대해 설명하기를“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의 직위는 군대장관이며 권력자요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질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병은 전염이 되기 때문에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병은 속에서부터 썩어져서 일 년 이 년은 모르다가 삼 년쯤 되면 피부 겉으로 나타나면서부터 문드러지고 손마디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 병에 걸렸으니 장군이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화려한 모습 속에 날마다 썩어서 죽어가고 있는 이런 나아만을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체는 나아만과 같지 않을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아만과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내면에 말 못할 고민들로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면서 갈등하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속은 다 썩어져 가는 모습들, 겉은 거룩한 척 꾸몄지만 외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만족이 없고, 소유한 것은 많은데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현대사회에는 나아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과 더 나아가 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아만과 같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분이 하나님이 셨듯, 병든 영혼, 병든 가정, 병든 사회를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二.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불치의 문둥병으로 괴로워하던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에“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나타난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나병을 치유할 수 있는 희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하 5장 2절~3절에 기록하기를“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한 여자아이가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부 아이가, 화려함 가운데 나병으로 괴로워하는 주인 에게 희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도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 예수님을 의지하고 섬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식입니다.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주는 소리,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소리, 지옥 갈 사람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는 소리가 복음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사를 만나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확신 있는 소식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교회, 내가 예배드리면서 깨달은 유익한 것을 이웃에게 말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엘리사가 바로 우리 주님의 모형이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전해야 됩니까?“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문제가 해결 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 기쁨과 평안을 잃은 자들,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예수님이 평안이요, 안식이요, 길이요, 인생의 해답”임을 확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무속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8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목사의 10배가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왜 땅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영혼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말씀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가 개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전도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말씀하시기를“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구원받는 역사가 있습니다. 만일 나아만 장군의 집 개집종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나아만 장군은 일평생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면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면 죄악과 힘겨운 삶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부하시기를“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하셨습니다. 

둘째,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 하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고자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열왕기하 5:11)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12절에“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 가려했습니다. 

그때 동행한 신하들이 권면하기를“장군이여 당신이 나병을 고치러 왔으면 이것보다 더 한 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고 그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을 받아들인 나아만 장군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고 나왔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문둥병은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어떻게 치유를 받았습니까? 나아만이 11절에 말한“내 생각”이란 말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내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데에 장애물이었습니다.“내 생각, 내 상식, 내 경험”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마침내 장애물인 자신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토록 나병환자로 고통 속에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명적인 장애물이“내 생각”이란 것입니다.“내 기준,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면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고 또는 절망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도“내 생각, 내 방법,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무엘상 23장 2절~4절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과 싸울 때에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하나님, 블레셋을 치리이까 말리이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르고“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내 아집”을 벼리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말씀에“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 결과 어린아이 살처럼 치유가 되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결국은 순종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과 응답의 배후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고 응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온 천하가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부잣집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극히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떡을 구하자 과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 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때 엘리야가 다시 불쌍한 과부에게 말합니다.“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이 말에 사르밧 과부는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기록하기를“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끝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기사가 있습니다. 고기잡이가 직업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 경우 상식에 비춰볼 때 순종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것이 직업인 전문가이고, 예수님은 내륙지방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신 분이므로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더욱이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히는 것이 상식인데, 간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물고기를 낮에 잡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상식에 벗어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누가복음 5:6~7)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55장 8절~9절에 말씀하시기를“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왜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까요? 순종은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죽은 믿음의 사람 즉 순종이 없는 사람,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이 무엇입니까?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약 100년 전 이집트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그만 어떤 사람이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습니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에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수분과 온도만 적당하면 3천년이 지났어도 싹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 밭에 심겨진 씨앗의 싹을 틔우는 습도와 온도는 순종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믿음 즉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이고, 순종의 열매가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 경험,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더라”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지금처럼 풍요롭고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고뇌와 고통과 불안과 평안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포장된 행복, 만족이 없는 소유, 끝없는 불만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아만처럼“내 생각”을 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내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내 방법의 올무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이 장애물이 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치유됨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 방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아만 장군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제가 해결되었던 나아만 장군의 결단과 경험이 우리의 결단, 우리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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