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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덕을 세운다 (고전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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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덕을 세운다 (고전 8:1-6)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 이른바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든 땅에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 배려, 공동체의 기둥

지난 한 주간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답게 사셨습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기를 꿈꿉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됨은 일상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얻기 위해 오늘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주목하려 합니다. 고대 도시 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군에 의해 폐허로 변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후 고린도는 줄리어스 씨저Caesar Gaius Julius에 의해 재건되어 발전되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는 헬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에게 해와 고린도 만 사이의 좁다란 지협 양쪽에 항구를 끼고 있었습니다. 서쪽 항구는 레기온이고, 동쪽 항구는 바울 사도가 서원을 마쳤다는 의미에서 머리를 깎았던 겐그레아입니다. 이 도시는 새로 건설된 도시답게 화려했고, 항구도시답게 많은 상인들이 오가는 번잡한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고린도는 아프로디테 숭배로 유명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성과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졌고, 또 매춘부들의 수호신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라는 도시의 특수성 때문인지 항해자들의 수호자로도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이 도시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은 주후 50년경에 이 도시에 도착해 거의 1년 반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열정으로 이 교회는 생기 넘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열정적이었던 신자들은 영적 은사도 많이 받았고, 구제 사업에도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떠난 후 교회는 파벌싸움으로 사분오열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의 마음이 식자 옛 삶의 습성이 슬며시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교우들은 가시 돋친 말과 행동으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라는 중심이 무너지니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인들 간의 갈등은 법정 다툼으로 비화되었고, 성 도덕도 급격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관용과 이해와 사랑의 기쁨 대신 차별과 우월감과 원망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바울에 대한 비방도 거세졌습니다. 변덕스런 사람이라느니,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사실은 제 잇속이나 차리는 사람이라든지, 언변이 시원찮다든지,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뻗대더니 빌립보 교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자기들 체면을 구기게 했다든지…. 제멋대로 판단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사람의 버릇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상당히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밖으로는 싸움을 치르고 안으로는 근심에 짓눌린 상태에서 모든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직접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바울은 편지를 통해 갈등과 불화 속에 있는 공동체가 주님의 몸으로 거듭나고 또 성장하기 위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다양하지만 바울이 제시한 문제 해결의 원칙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오늘은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집중해보겠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고기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은 두 군데, 곧 시장과 신전입니다. 하지만 가격 차이가 있었습니다. 시장에 나오는 고기는 비쌌고, 제사 후 신전에서 판매하는 고기는 비교적 저렴했습니다. 넉넉한 이들이야 어디서 사든 문제가 안 되었지만, 가난한 이들은 신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종자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속에는 우상의 영이 깃들어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먹자니 꺼림칙하고, 안 먹자니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교적 오랫동안 믿어온 이들이 신전에서 고기를 구입하기도 하고, 이교도들의 잔치에도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교 세계에서 막 벗어나온 이들은 동료 신자들의 그런 자유로운 처신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신앙적인 태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신자들은 초신자들의 그런 우려를 무시했습니다. 우상은 본래 없는 것인 데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의혹의 눈초리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서로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갈등은 둑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과도 같습니다. 이 갈등을 푸는 것에 공동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내놓은 신앙적 행위의 준칙이 바로 ‘배려’입니다.

•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배려配慮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리 저리 마음을 씀’입니다. 기독교인의 행위의 준칙이 ‘배려’라는 말은,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유익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독교인은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남 좋을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안다’ 하는 자부심, ‘옳다’ 하는 자부심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Knowledge puffs up, but love builds up”(1b)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영적 지식에 풍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고전1:5) 자랑스러운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공동체를 세우는 지식이 아니라면 그것은 죽은 지식입니다. 살림의 지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란 우매한 이들의 어두운 마음에 깃든 미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신전에 세워진 신상들이 곧 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이 제단에 바쳐진 음식을 오염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지식은 그런 의미에서 빛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반쪽에 불과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지식은 자기와 남을 해치는 흉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 일본의 우주선 ‘하야부사’(매)가 7년 만에 귀환했다고 하여 일본 열도가 들뜬 광경을 보았습니다. 바로 며칠 전 ‘나로호’ 발사 실패를 경험했던 차라, 하야부사의 귀환이 더욱 도드라지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과학 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풍뎅이 한 마리, 잠자리 한 마리 만들 수 없습니다. 복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세상에는 지식이나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생은 참 불합리해 보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초등학생 하나가 “부모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물음에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지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테네의 현인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평가를 듣습니다. 그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즉 無知의 知입니다. 노자도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을 하는 사람은 모른다 知者不言, 言者不知”(노자56장)고 했습니다. 저마다 한 마디씩 하지만 진실은 가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교리를 잘 알고,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여 그를 영성가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영문 모를 고난에 휩싸였던 욥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벌하고 선한 자를 선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답 대신 욥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세상 창조의 비밀을 다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속된 질문 앞에서 욥은 말문이 막힙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한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욥42:3) 

• 사랑, 공동체의 접착제

바울은 지식이 얼마나 사람의 자의식을 부풀리는지를 잘 알기에, 지식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의 경험’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합니다. 저도 연애 시절 한 겨울에 점퍼를 벗어 연인의 어깨에 둘러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춥지 않냐’고 물으면 덜덜 떨면서라도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힘이 셉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이들일수록 남에게 가혹하고 파괴적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존재의 목표를 명료하게 지시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6:36)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가 선 자리에서 남을 바라보며 쉽게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삶의 자리에까지 내려가 그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아버지를 뜻하는 단어가 ‘엄嚴’이라면 어머니를 뜻하는 단어는 ‘자慈’입니다. 어머니는 못난 자식일수록 더욱 큰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눈길은 매섭고, 말은 모질지 않습니까? 큰일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한데, 해가 서산에 걸려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 따뜻한 사람이야말로 평화의 일꾼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증오와 폭력이 자랍니다. 초등학생 성폭행범인 김수철은 자기 속에 욕망의 괴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속에도 그런 괴물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이니 별 수 없습니다. 그 괴물의 이름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b)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의 마음에나 죄는 도사리고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죄에게 기회를 주느냐, 주지 않느냐 입니다. 사랑은 죄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면역 체계입니다. 그에 비해 애정 없는 비판이나 꾸짖음은 죄나 우리 속의 괴물을 키우는 숙주(host)가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사랑도 맹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정의로워야 합니다. 불의한 일조차 사랑의 이름으로 감싸주지는 말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 혹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 식구라고, 잘 아는 사람이라고 불의를 용납한다면 그를 오히려 망가뜨리게 됩니다. ‘정의는 사랑의 단면’(Justice is the cutting-edge of love)입니다. 사랑이라는 빵을 자를 때 그 단면은 정의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빌1:9-10a)

• 자비로운 사람의 길로

사랑과 지식은 이처럼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은 지식과 분별력을 통해 풍성해지고, 지식은 사랑의 세례를 받을 때 살아있는 지식이 됩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자식을 키운다면서, 실상은 아이들의 내면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육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절제를 모르는 욕망 과잉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나 출세를 떠올리십니까?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b). 예수님의 사명 선언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최고의 비결은 배려와 사랑입니다.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의 생은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8:13)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전10:31)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입니다. 신앙공동체는 남을 배려하는 삶을 연습하는 곳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닦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4:9) 지금 우리도 가인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다시 한 번 우리의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사랑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이들을 통해 우리 교회도 더욱 푸르게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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