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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능력과 예수의 이름 (행 1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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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능력과 예수의 이름 (행 19:8-20)


오늘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하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건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는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게와의 아들들이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귀신에게 당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나타난 놀라운 능력 
(행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복음을 전하는 중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몸에 닿았던 물건 즉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으면 병이 낳고 악귀들린 사람에게서는 귀신이 떨며 나가는 것이였습니다. 
누가는 본문을 기록하면서 이런 기적을 놀라운 것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주체가 바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능력의 주체가 바울이였다면 인간을 신격화 하는 우상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곳에서 맘만 먹었으면 하나님처럼 행세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중심은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4:8-15절에보면 루스드라에서도 바울이 기적을 행한일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현현한 신으로 알고 그들에게 제물을 바쳐 제사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격화 하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신이 아니고 여러분과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주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같은 능력을 주셔서 기적이 나타난다고 강변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기적을 행한다고 하여 그가 신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능력있다 싶으면 교만해집니다. 약간의 물질을 소유한다 싶으면 교만해지고 미천한 자리에서 조금만 지위가 높아지면 거만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의 교만한 모습은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나타납니다.

사람 앞에 교만하여 자신의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립니다. 
얼마 전에 어느 중소기업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시위하는 것을 테레비전을 퉁해 보았습니다. 불법 취업자라고하여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온갖 학대를 다합니다. 오죽하면 그들이 외치는 구호 속에 “한국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우리들 처럼 가난한 때가 잊었던 것을 기억하라”였습니다. 우리도 예전에 외국나가면 돈 만이 번다하여 외국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그 때에 지금 그들이 받은 설움을 똑같이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보터 외국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종처럼 부리게 되었습니까. 예전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자숙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이제는 사람 앞에 교만하다 못해 하나님 앞에 교만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언젠가 부너지고 맙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 오히려 인간들을 얽어매는 올가미가 되어 인간들을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창세기에 바벨탑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후에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치밀한 설계와 준비에 따라 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였습니다. 인간 교만의 극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에게 언어를 혼란케하므로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신다고 약4:6 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잠3:34절에서 말씀하였습니다. 뿐 만아니라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니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벧전5:5절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시다. 

2. 이 같은 놀라운 기적의 주체는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아닙니다. 

만일 손수건이나 앞치마라면 그것은 우매한 미신입니다.
94년 그러니까 13전에 대전 지방 철도청장이 안전사고를 줄인다는 명분으로 특정 사찰과 교회이름이 새겨진 [안전수호지갑] 6천개를 만들어 직원을 포함한 산하 전직원에게 배포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있습니다. 지갑에는 “이 지갑은 계룡산 동학사와 대전 동부 장로교회에서 안전이 수호되도록 기원된 제품입니다. 항상 몸에 지녀 직장의 안전과 자신의 무 재해를 보장받으십시오.”
94년 1월 대전지방철도청장 이 **.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직원들에 따르면 이 지갑은 근무 시간 중 부적처럼 항상 웃옷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도록 돼 있으며, 일부부서에서는 근무를 나갈 때 중간 관리자가 일 일이 사인을 받고 나눠준 뒤 만약 소지하지 않으면 불이익을당한다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은 대전의 모 교회 이름이 그 곳에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미신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드리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어떤이는 어떤 기도원에서 떠오는 생수를 무슨 기적의 물 인양 선전하고 믿는 것도 일종의 미신입니다. 그 물이 수질이 좋아서 애용한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그 물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은 우매한 미신입니다.
그곳에서 물에다가 기도하였더니 물이 신비한 힘이 생겨서 먹으면 모든 병이 났는 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미신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행할 뿐 아니라 더 큰일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통하여도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3. 기적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지만 아무 때나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손수건의 기적은 성경에서 이곳 이외에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바울에게 이런 기적이 매일 일어났다면 그 사건이 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것도 항상 그러신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하실 때만 나타납니다. 내가 볼때 필요할 때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술사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부를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이나 또는 귀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행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에 능력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적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믿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바울이 행하는 놀라운 기적을 보고 인간적으로 부러워하며 탐낸 이들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손만 얹어도, 심지어 입던 옷이나 수건을 갖다 대도 병이 떠나고 귀신이 물러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제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마술사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기적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술이란 사람들을 눈속임하는 것입니다. 아니고 실제로 행한다면 그것은 귀신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마술인 것입니다. 

4. 예수의 이름은 주술적인 주문이 아닙니다.

마술사들은 바울이 기적을 행할 마다 예수의 이름이 외쳐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말이 무슨 기적을 이뤄내는 신비의 주문인술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마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병을 고치려고 시도 하였습니다. 
(행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그런데 그들 중에 유대의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어찌하다가 마술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악귀들린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귀신들린 사람이 갑자기 귀신의 힘으로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중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리고 짓눌러버렸습니다. 
꼼짝 못하는 그 두 사람게 귀신이 말하였습니다. 
행19: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그렇습니다.
귀신도 예수가 누군지 압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바울도 압니다. 여기서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라는 말은 예수와 바울의 이름은 두렵다는 것입니다. 두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을 인격적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예수의 이름을 주문으로 알았으나 오히려 귀신은 예수 이름을 인격적으로 알았습니다. 

5. 예수의 이름은 시험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개발하면 임상실험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약효는 어떠한지, 부작용은 있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임상실험에서 약효가 입증되고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실험이 이루어진 뒤 시중에 판하는 것입니다. 옛날 무서웠던 천연두의 예방약을 개발한 제너가 자신의 아들에게 시험하여 약효를 입증하였습니다. 아마 현대 의학의 임상실험의 첫 번째 케이스였을 것입니다. 임상 실험을 통과하지 않은 약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은 임상실험이 필요 없는 신약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임상실험을 끝내셨습니다.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빙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믿는 자에게 이름은 권세와 능력의 이름입니다.
바울이 전할 때는 귀신이 떨며 나갔고 스게와의 아들들이 말할 때는 그들의 거짓이 들어났습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서 귀신이 거짓을 드러낸 것입니다. 빙자하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믿는 것은 자신의 인격으로 그 이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빙자하는 것은 주문을 외우듯이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빙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전 인걱적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단지 마술사가 주문을 외우듯이 그렇게 외워대서는 안됩니다.

6. 삶이 없는 믿음은 빙자하는 믿음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의 이름을 빙자했을 뿐입니다. 예수 이름은 빙자하는 이름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실천하는 이름입니다. 
우리 지역에 예수 병원이 있습니다. 
예수 병원은 미국 북부 캐롤라이나 주의 히커리(Hickory)에서 온 여의사 마티 잉골드(Dr.Mattie B.Ingold)에 의해 1898년 11월 3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병원이 처음부터 예수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남장로교 진료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예수 병원의 이름을 누가 지은지 아십니까? 
최초로 병원을 설립한 선교사가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미개했던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에 의해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아주 친절하게 진료를 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 안 믿는 전주 시민들이 병원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 병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예수 병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지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헌신을 외치지만 헌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외치고 헌신을 외치면서 사랑하지도 헌신하지도 않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빙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이름을 빙자할 때는 아무 능력도 없을 뿐 아니라 사탄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을 신뢰하면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여러분은 예수 이름을 빙자하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이름을 인격적으로 믿읍시다. 
예수를 믿되 나의 삶을 바쳐 믿는 것이 귀신을 떨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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