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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헤렘’에 실패한 사울 (삼상 15: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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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렘’에 실패한 사울 (삼상 15:1-3, 20-24)


얼마 전, 나로호(NARO) 2차 발사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발사 137초 만에 공중 폭발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첫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지난 13일 늦은 밤, 일본의 소행성(통통한 고구마 모양의 소행성 Itokawa)탐사선 ‘하야부사(Hayabusa)'가 7년 만에 귀환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하야부사‘에 온 일본이 열광했습니다(사람으로 치면 만신창이 몸으로—엔진파손, 통신두절 등). 하야부사는, 달 以外의 천체에 착륙했다 돌아온 최초의 우주선입니다. 日本의 宇宙科學技術이 놀랍습니다.

역사를 보면, 실패와 좌절이라는 과정을 겪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속담) 실패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判官記, 裁判官) 막을 내리면서, 주변국가들처럼(☀영상지도. 블레셋,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王이 통치하는 王政時代에 돌입합니다. 자연스러운 역사변천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떼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 첫 출발이 어땠을까요? 보기 좋게 실패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왕정시대 모델을 이웃나라에서). 

특히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무얼 해야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 감춰진 역사(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굉장히 언짢으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한 것이, 하나님의 눈에 큰 惡을 범하는 죄악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王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또 다른 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이야기지요(삼상 9, 12-13). 王이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이야깁니다(시편 145편 다윗의 시.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惡한 요구지만, 허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살아계신 아버지께 둘째 아들이 상속을 강요합니다. 아버지는 상속해줍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나 왕 삼아주세요 한 것 아닙니다. 그들이 요구한 王이 있습니다. 어떤 왕입니까? 물으나마나지요(주변국에서 그 기준을 찾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王 狀은, 사람의 外貌에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사울이 이스라엘이 요구하던 전형적인 王 狀(모델)이었습니다(삼상 9, 1ff.). 사울이 어떤 인물입니까? 

우선, 인물이 출중했습니다. 이스라엘 子孫 中에서 그보다 잘생긴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로 더 컸다.” 이스라엘이 생각한 王 狀은, 대단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사울 같은 인물을 찾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을 간파하신 하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이제 너희가 요청하고 선택한 왕이 여기 있으니(그 사람을), 너희 위에 왕으로 주노라”합니다(그러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거십니다. 왕과 이스라엘이, 온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왕으로 부름 받기 전, 사울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수줍음, 부모님께 효,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소심한 인물). 그런데 왕이 되고 난 사울은, 예전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된 사울이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사무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 왕이시라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겁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하나님 무시했습니다(나름대로 핑계는 다 있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영적지도자 ‘사무엘’도 눈에 뵈지 않았습니다. 王位에 있다 보니, 뵈는 게 없었던 거지요. 결정적인 죄악 두 가지를 범하는데, 그 두 가지가 모두,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한 罪(불순종한 죄)입니다.

본문은 사울 王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된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후에, 사울에게 주신 말씀, 기억하시지요? 

“順從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敬聽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 22-23). 

아말렉 전쟁이후,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울 때문에 애곡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만 사울을 외면한 것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은 것을 후회하셨다”합니다(삼상 15, 35). 사울도 그 이후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으로 살다가 안타까운 일생을 마치고 맙니다(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사람으로 삽니다).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의 뜻은, 그의 다음으로 왕이 된 다윗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우리가 종종 굉장히 곤혹스러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을 명하시는가? 어떤 경우, 敵을 殄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慈悲하신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殘忍하실 수가 있는가, 의문이 생깁니다. 또 성경은, “야훼는 전쟁의 용사시다”합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시는 전쟁광이시란 말인가? 고민됩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대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홍해 바다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야훼는 전쟁의 용사/ 그의 이름 야훼이시다/ 바로의 兵車와 군대를, 바다에 쳐 넣으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 바다에 빠지더라/ 깊은 바다가 그들을 덮치니, 그들은 깊은 물 속에 돌처럼 잠기더라”(출 15, 3-5). 

구약성경에 나오는,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마르시온적 태도입니다(구약성경을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야훼의 전쟁’을 진지하게 검토도 해보지도 않은 채, 무분별한 ‘거룩한 전쟁 사상’(聖戰 Holy War)을 마구 사용하는 시오니즘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이슬람의 聖戰思想; 찌하드 Jihad, 중세 로마천주교회의 십자군 전쟁, 또는 革命이나 테러를 정당화 하는 사람들의 운동 등). 

그러나 구약성경을 유념해서 읽어보면, ‘거룩한 전쟁(Holy War)’으로 불리는 야훼의 전쟁은 대단히 중요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훼의 전쟁은, 선제공격, 침략전쟁이 아닙니다. 徹底한 防禦戰爭입니다(주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 하나님의 전쟁은, 철두철미하게 눌림 받는 자의 부르짖음에 대한 변호적인 전쟁입니다. 억압자로부터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훼의 전쟁을 “야훼의 구원사건”이라고 증언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의 ‘바다의 노래’(야훼는 전쟁의 용사시다)는 지배권력의 대표적인 상징(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을 430년간 노예로 부린 자)인 이집트 왕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하나님께서 “원수”로 지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전쟁은, 지배하기 위해 전쟁합니다(지배이데올로기,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식민통치는 전형적인 지배이데올로기).

야훼의 전쟁은,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이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이 친히, 적들과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훼의 전쟁에는, 군대의 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병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전쟁역할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서서 야훼의 구원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초자연적인 이적을 동원하십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당연히, 야훼 전쟁의 勝利와 榮光은, 하나님의 것입이지요. 야훼께만, 승리와 영광이 돌려져야 하는 전쟁이, 야훼 전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 하신 겁니다(삼상 17, 47-48; 대하 20, 15). 야훼의 전쟁은, 하나님이 절대적인 왕 되심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 신앙을 요구합니다(다윗의 인구조사, 죄가 된 이유: 대상 21장, 삼하 24, 1-2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왕권이 강화되자, 인구조사 명령함. 그 때 요압 장군이, “내 주 왕이여,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 하게 하시나이까?”). 

그러면 사울 왕이, 아말렉 전투에서 하나님 앞에 범한 결정적인 죄악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왕권이 강화될 쯤에, 아말렉과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때 모집한 사울의 군대가 보병이 200,000명이고, 유다사람이 10,000명 21만 명의 군인들이 출병했습니다(全面戰 水準). 

그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라 命令하셨습니다. 아말렉을 치되, 모든 것을 殄滅하라. 아깝게 여기지 말라. 남자, 여자, 어린아이, 젖먹이까지, 소와 양, 낙타와 나귀 모두 죽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명하신 이유가 있잖겠습니까? 

아말렉이 어떤 나라기에 진멸하라 하셨습니까? 아말렉은, 유다 남부지방(Negeb)부터 애굽 국경지대까지, 시내반도에 걸쳐 광활한 지역을 유랑하면서, 유목과 약탈을 일삼는 호전적인 베두인족입니다. 이 아말렉은, 500여 년 전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나올 때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 길에서 대적하던 자들입니다.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430년 동안 종살이 하다 해방된 이스라엘(오합지졸이나 다름없음), 특히 행군에서 뒤쳐진 노약자, 병든 자들을 기습 공격했던 나라, 족속입니다(모세가, 아말렉과 전투, 아말렉을 잊지 말고 진멸하라; 출 7, 8-13; 신 25, 17-19). 

그뿐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려할 때,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남부지방 Negeb을 통과하려 했습니다. 그 길목을, 집요하게 막았던 족속입니다. 사사시대에도, 끊임없이 「모압」, 「미디안」과 가세해서 잔인한 공격을 일삼던 족속입니다. 그 아말렉을 사울 왕에게 진멸하라 명하신 겁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연히 대승리를 거둡니다. ‘야훼의 전쟁’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기를 주목하십시오.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는 거두었지만, 승리와 동시에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맙니다. ‘헤렘’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헤렘’은? ‘하나님께 바쳐진 전리품(파멸을 위해 바쳐진 것)’을 말합니다.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야훼의 전쟁」이기 때문에, 전리품을 취하여도,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사울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말렉과 싸우는 전쟁에서는 ‘헤렘’(전리품)을 남기지 말고 다 殄滅하라 하셨습니다(마침표). 

그러나 사울은,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살려서 잡아왔습니다(계산적인 행동이지요; 적국의 왕을 사로잡아, 자기 위상을 높이려 한 거지요). 전리품 중, 좋은 것들은 챙기고, 쓸모없고, 가치 없는 것들만 전멸시켰습니다. 어쩌다가 한두 가지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맹금류가 먹이를 덮치듯이, 전리품을 취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군대를 다 이끌고 ‘갈멜산’으로 가서 자기를 위하여 ‘전승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이런 사울의 행동을 하나님은 선하게 보실 리가 없지요. 그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 드리기 위해 취하였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순종이고,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 아닙니까?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이유가 뭡니까? 사울을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말렉은 500년이 넘도록, 하나님을 대적하던 족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말렉을 심판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자기의 승리’로 여기고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진멸하라신 전리품(헤렘)을 돌진해서 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신 야훼의 자리에, 사울 자신이 앉아버렸습니다. 

내 안에는, 사울의 心狀이 없습니까? 사울처럼 안 그런 척 하면서, 의도적으로 내 욕심을 채우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섬긴다는 명목상 이유를 내걸고 ‘헤렘’(전리품)을 내 것인 양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내 인생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된 ‘主님의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 노래하지만, 내 인생이 어찌 내 것입니까? 내가 낳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基業이고, 賞給 아닙니까? 

이겼다고 다 이긴 것이 아닙니다/ 큰 승리를 얻었다 해도, 버림받음도 있습니다. 내 인생은, 정말 하나님의 것인지 물어보십시다. 내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신 스스로 물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헤렘(전리품)으로 나의 기념비를 세우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헤렘(전리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훼의 전쟁의 승리와 영광을 가지고, 어찌 나의 記念碑를 세우겠습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신 것은, 무자비한 진멸이 아닙니다. 참 평화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逆說입니다. 우리의 삶이, 내 인생이, 우리교회가 왕이신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실 것입니다. 참 평화와 구원을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울같이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하나님 주신 전리품으로 하나님 자리에 앉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貴人들 의지하지 말게 하옵소서. 야곱의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게 하옵소서.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 소망을 두는 자 복 있다 하셨사오니, 우리가 다 야곱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복 있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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