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억되어야 할 신앙 (살전 1:1-5)

  • 잡초 잡초
  • 440
  • 0

첨부 1


기억되어야 할 신앙 (살전 1:1-5)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데살로니가전서 1:3)

우리들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기억해야 할 일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기도 합니다. 이 기념비는 기억해야 할 것을 오래 동안 기억하게 하며 역사적인 것으로 간직하게 합니다. 야곱은 기념비를 세우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기도를 가로챈 뒤에 형이 자기를 해할 것이 두려워 도망하여 ‘하란’을 향하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돌기둥을 쌓아 기념함으로 그 사건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심으로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요단강 속에 있는 12개의 돌을 취해 그 강 가운데 기념비를 세우고 다시 12개의 돌을 취하여 요단 동쪽 ‘길갈’이라는 곳에 기념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후일에 그 기념비에 대하여 묻거든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수4:24) 라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해 갔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삶은 건강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신앙은 본이 되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억하며 감사했던 이 데살로니가교회의 훌륭한 신앙은 우리가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신앙입니다. 그럼 그 기억되어야 할 신앙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행위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핍박 중에도 믿음을 지킬 뿐 아니라 그 믿음대로 살고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신앙의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과 믿음대로 살려는 모습은 아름다운 것임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합니다. 믿음은 행위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믿는 자의 행동은 그 사람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고백뿐 아니라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행위’가 기억되어야 할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믿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저자는 히브리서 11장 33-36절에서 믿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며, ......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대로의 행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기억될 만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의 지붕이며 정상이라고 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는 등반대원들이 등반을 떠나기 전 심리학자들로부터 정신검증과정 중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산 정상의 맨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원들의 대답은 “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나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였습니다. 그러나 대원들 중에서 ‘짐 휘타카’(Jim Whittack)라는 청년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Yes, I Will!"(네, 나는 꼭대기까지 올라가겠습니다) 이 분명하고 확신 있는 대답을 가진 청년은 드디어 그 일을 해냈습니다. 1963년 5월 1일, 폭풍이 불어대는 ‘에베레스트’의 8,888 미터의 높이에 우뚝 올라선 청년은, 바로 미국 인으로서 역사에 처음으로 이 등반에 성공한 ‘짐 휘타카’였습니다.   
  
진실 되고 분명한 믿음은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신앙의 삶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믿음대로 살아가고 그 믿음이 만들어 내는 ‘믿음의 행위’를 가진 기억되는 신앙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 안에서 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 켐베스’는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고 했습니다. 곧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서 본문의 ‘사랑의 수고’라는 말에서 ‘수고’라는 말 ‘코포스’는 ‘자르다’, ‘채찍으로 때리다’, ‘애쓰다’를 의미하는 동사 ‘코프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라는 말 ‘코프스’는 단순한 일을 위한 수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되는 힘을 써야 하는 수고’와 함께 ‘고통을 동반하는 수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수고와 고통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굶주림, 잠 못 이룸, 매를 맞고 핍박받는 고통과 고생은 주님을 사랑하고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기에 복음을 전해주려는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영화의 중심지 헐리우드에서는 가끔 배우들과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침식사를 나누는 데, 이 때에 최고의 스타인 영화배우나 유명인사를 초청하여 연설을 듣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의 여성이 그들의 연사로 나왔는데 이 여자는 세계적인 사진잡지 ‘라이프’의 표지에 얼굴이 실린바 있고, ‘루크(LOOK)'라는 유명잡지에서 “미국의 최고 미인 열 명중의 한 사람”으로 뽑은 일이 있고 당시 일주일 주급으로 이천달라씩 받으며 일하는 영화배우였습니다. 이 여인은 ’콜린 타우전드 에반스‘(Collen Townsend Evanns)였습니다. 
  
이 여인이 마이크 앞에 나오자 박수와 휘파람소리로 장내는 흥겨운 환성의 물결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그녀는 입을 열어 중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한 마디에 장내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도대체 그 운수 좋은 행운의 사나이가 누구입니까?” 

‘콜린 에반스’는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너무나도 예상외의 대답에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해졌습니다. 핀이 한 개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콜린 에반스’는 그 사랑하는 분을 위하여 자신의 영예스러운 영화의 일을 포기하고 앞으로는 그 사랑하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 후에 선교활동을 위해 목사와 결혼하고 선교사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빌리 그래햄’ 목사가 그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물어 보았습니다. “콜린 자매님은 헐리우드의 스타의 자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헐리우드의 스타나, 영국의 여왕의 자리나, 미국의 대통령 자리와도 지금의 나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에게 이처럼 귀하신 분입니다.” 그 후 ‘콜린 에반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위해 수고하며 살았습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신앙인들 가운데는 주님과 그 분의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가운데는 ‘징벌이 무서워서 일하는 사람’과 ‘이득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과 그리고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수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수고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과 함께 고통까지도 감수하게 하는 수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수고하는 그곳에는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행복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사랑의 수고를 기억되는 신앙의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와 영생의 소망을 가르치며 전파하는 종교입니다. 이 신앙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 받았던 것은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굳게 지키면서 인내하였기 때문입니다. ‘인내’라는 말 ‘휘포모네’는 ‘아래에’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휘포’와 ‘남다, 머물다’라는 뜻을 가진 ‘메노’라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아래에 머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인내’란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 소망 아래에서 지금의 고통이나 어려움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에 절망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시련 중에서도 주님을 소망하며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하고 위대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시편146:5)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소망하면서 인내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히려 그 탄압과 박해의 고난을 인내로 견디면서 믿음과 영적인 삶을 더욱 성장시켜 갔습니다. 이들이 고난을 인내로 극복해 나가는 신앙의 모습은 초대교회에 많은 성도들에게 복음전파의 원동력이 되는 기억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숲 속에서 두 사람의 벌목꾼이 백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거목을 벌채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힘들여 나무를 잘랐을 때에 나무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독특한 나무테였습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이 나무의 긴 수명을 반영하듯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섯 개는 다른 나무테와는 달리 촘촘히 위치해 있었고 그 다섯 개의 나이테 바깥쪽으로는 넓은 간격을 둔 나이테들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한 벌목꾼이 아주 조밀하게 나있는 다섯 개의 나이테를 보고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5년간의 가뭄기간 동안 전혀 자라지 못했군.” 그러자 다른 벌목꾼은 그와는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그 가뭄기간에는 크게 자라지 못했어. 하지만 가뭄으로 인해 부족한 수분과 양분을 얻기 위해 이 나무는 깊이 뿌리를 내렸고, 뿌리가 강화되면서 이 나무는 전보다 성장을 더욱 촉진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되었지. 고난을 이겨냈기에 이런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거야. 이 다섯 개의 나이테 이후에 생긴 나이테가 넓게 간격을 두고 생긴 것이 그 증거일세.” 이를 듣고 있던 벌목꾼도, “5년의 가뭄기간이 이 나무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군, 그래.” 라면서 동료의 의견에 끄덕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고난과 시련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굳게 지키면서 끝까지 견디며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뭄의 고통과 시련을 거치면서 거목이 될 수 있었던 나무처럼 기억될 만한 위대한 신앙의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 있는 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 5절에서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능력과 성령과 확신 가운데서, 여러분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기억될 만한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될 만한 신앙의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