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치료자 예수님 (요 21:9-19)

  • 잡초 잡초
  • 421
  • 0

첨부 1


치료자 예수님 (요 21:9-19)


오늘은 요한복음 21장 9-19절 말씀으로 ‘치료자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면 제자들만 남습니다. 그 제자들의 대표가 베드로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중심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고, 새로 시작되는 교회 모든 일의 가장 중요한 책임을 맡습니다.  물론 모든 사도들이 합심해서 한 일입니다만 언제나 베드로의 이름이 대표로 나타납니다. 그가 첫 설교를 하고, 그가 앉은뱅이를 고치고, 그리고 그가 최초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 아닌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는 하나님의 만지심의 결과입니다. 교회를 맡기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가르치셨고 준비시켰습니다.   오늘 본문 요21장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만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21장의 베드로가 있어야 행1장의 베드로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만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만지시고 나를 사명자로 만들어 가시는 예수님을 만나시는 예배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4가지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만지심의 결과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베드로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주께서 내 진심을 아십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만지심의 결과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영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타고난 영웅인가요? 만들어진 영웅인가요?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영웅에 대해서는 ‘타고 났다’는 고정 관념이 많습니다. ‘태몽이 특별하고,  어릴적부터 뭔가 달라도 달랐다’ 이것이 한국적인 영웅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외국의 위인들, 성경의 위인들은 평범한 인간입니다. 주위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처럼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간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위인화’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태어날 때부터 위인이나 영웅이 되기로 예정 된 위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위인이나 영웅이 되기로 예정 된 위인’이라면 평범한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특별하니까 저렇게 하는 것이고 우리와는 다르니까 저렇게 하는 것이지... 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믿음의 영웅들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이고, 오히려 우리보다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통해 우리들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성도여러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는 3번 이상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맹세하고 부인을 한 그런 사람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베드로에게 ‘트라우마’가 있다고 봅니다. ‘트라우마trauma’는 다른 말로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입니다.  

예를 들면 전쟁, 화재, 건물붕괴,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고를 만났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심리적인 충격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불안과, 감당 할 수 없는 공포를 다시 느낍니다. 이것을 ‘트라우마’ 즉 정신적인 외상이라고 하며, 정신장애 질병의 상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요?  ‘숯불, 닭 울음소리, 3이라는 숫자’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불을 쬐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또 3번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까지 부인했고,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자기를 깨닫고 심하게 통곡을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 일은 굉장한 상처요, 정말 잊고 싶은 사건입니다.  숯불과  닭울음소리 그리고 3이라는 숫자는 그 비참한 상처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도구, 즉 베드로의 ‘트라우마’입니다.  성도여러분,  길게 말할 것 없이 베드로는 타고난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이며,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배신한 일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닭 우는소리만 들으면 깜짝 놀라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어떤 ‘트라우마’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21장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를 깨끗이 치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만지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도 만지십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의 만지심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다 만지셔서 깨끗하게 치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베드로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예수님은 육신만 치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음을 치료하시는 완전한 의사입니다. 그분은 베드로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를 ‘먼저’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상처가 있지요? 우리도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마음이 답답해서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교회 출석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절대로 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먼저 찾아오시며 우리를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그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와 대화를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의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을 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기억할 몇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로 ‘숯불’이 있습니다. 숯불이 왜 중요한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전부 그냥 불이라고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만은 악착같이 그것이 ‘숯불’이었다고 밝혀 놓고 있습니다.   

시각도 중요합니다. 이때가 하필이면 또 여기저기서 닭들이 울어대는 새벽입니다.  또 예수님은 3번의 질문을 하십니다.  3번의 부인과 3번의 질문이 서로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내가 베드로가 되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생생하게,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그 과정에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만 결과만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그냥 베드로는 대사도(大使徒)가 되는구나... 하루에 오천 명이나 회개시키고 온갖 이적을 행하는구나...참 대단하구나. 이러고는 끝입니다.  이렇게 T.V. 연속극 보듯이 그냥 생각없이 성경을 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생각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에게서 일어난 일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 저주하며 부인하였지만 나는 30번도 더 그랬지 않았는가, 베드로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됩니다. 그래야 깨달음이 옵니다.
 
사도행전1장의 성령충만한 베드로 앞에는 요21장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요21장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도행전에 가서 그 흉내를 내려고 하니 성령의 역사가 없고 힘 만 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먼저 요21장에서 제자들에게, 베드로에게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 때문에 시작이 됩니다. 실패한 베드로,  도망쳤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셔서 상처를 만지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은 후에 시작이 됩니다.  

성도여러분,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또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 먼저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를 만지셔야 사도행전이 시작이 됩니다. 상처받은 마음, 아픔 많은 마음, 심지어 종종 예수님을 배반한 마음으로는 사도행전이 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때문에 담대해졌을까요? 성령강림 이후에 담대해졌다고 모두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담대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만나서 세 번의 질문을 나누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것으로 이미 베드로는 이미 모든 상처를 치유받고, 모든 죄책감의 찌꺼기를 다 털어버립니다. 여기서 이미 담대해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일대일로 꼭 만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주께서 내 진심을 아십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3가지 질문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당연히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때의 베드로는 큰소리 탕탕쳤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 고 자신의 사랑을 자신(自信)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버렸고,  3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제 살겠다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제 베드로에게 오셔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베드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 올시다!”라고 말을 해야 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구?”  숯불 앞에서,  닭이 우는 새벽에,  다른 제자들이 다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베드로를 人民裁判을 하시나요? 우리 예수님은 인민재판을 통해 배신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심판하시나요? 절대 아니지요? 그러면 지금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지금 제자들에게,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트라우마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뭡니까?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무식에도 급수가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대답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붙어 나오는 말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은 정말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베드로는 바로 얼마 전에 “여기 있는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를 좇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그럴 각오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안 되었습니다. 그는 장담을 했지만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이것을 나도 알고 예수님도 아십니다. 그랬던 베드로의 대답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께서 아시나이다”하는 그의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지금도 진심입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비록 3번이나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였고... 그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은 베드로의 진심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진심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 마음을 알고 계신다’ 라고 확신을 합니다.   

지금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베드로가 배운 진리를 깨닫고, 우리도 그 진리를 배웁니다. 그것은  ‘내가 말로 확신한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결심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결과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자신(自信)과 내가 가진 결심(決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내 것 인가요?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내 것’입니다.   

인생이란 자신감(自信感)도 아니요,  결심(決心)도 아니요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진리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 하면 된다’라는 말과 ‘내가 최선을 다 해도 안 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베드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최선을 다해도 실패합니다.  그러면 이제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최선을 다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대답은 ‘그래도 최선을 다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말은 ‘일의 결과’가  ‘내 손’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선을 다 해도 안 될 수 있다’는 것은 ‘일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일의 결과’가 내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 마음대로, 내 결심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떨 때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되든지 안 되든지 나의 최선을 다하는 그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헌신입니다.  만약에 ‘해서 되었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해도 안 되었다’면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과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신앙 고백이요, 사랑이요, 열심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번쯤 물어볼 만한 자기 신앙의 점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우리 신앙의 뿌리로 갖고 있는가 한번 자기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귀신을 쫓아내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어떤 분에게서 “당신이 지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성령을 힘입어서가 아니라 악귀의 힘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2년을 말라가면서 고민을 했답니다. “내가 성령을 힘입어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탄을 힘입어서 하고 있는가?” 정말 중요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본문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주여, 만일 악귀가 제 안에 들어와서 일을 한대도 저는 주를 사랑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아니 결과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것이라도 자기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나의 이 진정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대답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일의 결과를 쳐다보지 말고, 내 마음속을 들여다 보아야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일이 되느냐 안 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 해도 안  될꺼니까 나는 안 할거야, 나는 되는대로 살거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를 사랑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과를 사랑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결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최악의 결과가 나오면 가룟유다처럼 자살해 버립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베드로는 오늘 다른 고백을 합니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제 압니다.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주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큰소리 탕탕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솔직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어느 앞에서 합니까? 숯불 앞에서, 새벽 닭이 여기저기서 합창하는 이 새벽에 그 많은 동료들 앞에서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것이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베드로처럼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베드로처럼 실패조차 인정하고, 베드로처럼 진심만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그래서 베드로가 들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는 말을 듣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나를 나보다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하면 그 것이 좋을까요 안 좋을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도움이 될까요 혼동이 올까요? 혼동이 더 많이 옵니다. 아니 주님이 두려워서 교회를 못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내 속을 모르시고,  내가 열심을 내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신앙생활을 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 사람 중 누가 더 성실하게 살 것 같습니까? 행위로 구원 얻는 사람이 훨씬 더 성실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성실해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요?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겠다. 너는 이 세상을 떠나면 지옥 갈 사람인데 너무 열심히 나를 믿는다고 쫓아 다니니 내가 미안해서 이 세상에서라도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르쳐 주려고 왔다.   이제부터 너는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어차피 지옥 갈 것이니까 더 이상 쓸데없는 헛고생 하지 말고 잘 살아 보아라. 나는 너를 버렸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성경에 몇 명 있습니다.    

요나가 그렇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것은 요나의 고백입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 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요2;4) 이것이 요나의 대답입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삼상1;5-6)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라고 2번이나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러면 임신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에게 가야하지 않나요? 그러나 한나는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여호와께로 옵니다.   

바다에 던지셨을 지라도, 주의 목전에서 쫒겨 났을지라도, 임신을 하지 못하게 막으셨을지라도 여호와께로 다시옵니다.  왜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냥 내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과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당연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 하십니까? 예수님을 사랑 하십니까? 사랑하시는 줄 압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 했더라도 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겸손(謙遜)입니다.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내가 한 것은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와서 예수님께 무엇이 제일 큰 계명인가라고 물었을 때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명령은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행동이 변하고 생각이 바뀌고, 일이 놀랍게 이루어집니다. 누가 한 것입니까? 능력있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를 따지는 어리석은 짓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방법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를 거스리지 않는 이상에는 그냥 생각의 차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입니다.  이제는 누구말대로 하는지, 어떤 식으로 하는지 하는 방법 보다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물으십시요. 그러면 일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만지심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베드로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주께서 내 진심을 아십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라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오천 명을 회심시킨 베드로를 ‘능력(能力)의 사도’로 부러워합니다. ‘참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구나’ 합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행한 능력이 아니라, 그런 베드로로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베드로, 우리보다 더 연약한 베드로를 만지신 결과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주님의 만지심의 결과입니다.’ 라고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