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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당한 바울의 모습처럼 (갈 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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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바울의 모습처럼 (갈 1:11-24)
    

지난주 목요일(10일) 오후 5시 1분, 온 국민의 기대와 설레임 속에서 나로호가 발사 되었습니다. 그런데 137초만에 통신이 두절되고 2차 발사도 실패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 안타깝고 실망한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그동안 고생하며 준비한 실무자들의 실의에 찬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또 한 사건, 지난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와 한국전을 여러분 보셨습니까. 정말 기분 좋고 흥분되는 밤이었습니다. 전반 7분만에 이정수 선수의 선취골, 그리고 후반 7분 7번 박지성 선수의 쐐기골 아~~ 정말 통쾌하였습니다. 우려하였던 수비수들의 적극적인 활약은 장신수 그리스를 꽁꽁 묶었습니다. 우리도 대한민국 한번 할까요? 저도 어제밤에 못했는데, 오늘 한번 할까요? 두 번만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박수) 찬송할 때 이렇게 박수 했으면~~ ^^  마치고 나오는 선수들의 모습은 정말 당당하였습니다. 못생긴 박지성 선수가 장동건보다, 욘사마 보다 멋있어 보였습니다. 정말 당당한 그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도 사도로 활동하는 바울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바울처럼 당당한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 중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책이요, 책 중의 책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는 종교 개혁자들이 즐겨 사용한 은혜의 복음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은총을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서 주석보다 갈라디아서 주석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주석을 하여서 그 양이 로마서 주석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고 요한복음까지 4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이 4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또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의 말씀들과 행하신 일들과 교훈과 업적에 대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첫 교회사의 기록이기도합니다. 그리고 교리서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첫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교리서에는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교리를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으므로 기독교의 사상과 가치관이 무엇인지,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내가 믿는 바의 교리, 교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강력하고 확고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로서의 자기 고백과 종으로서의 자기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고백이 이론적인 것이라면 간증은 실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 데 아무리 이론적인 자기 지식과 그 지식을 통한 사변적인 신앙을 가진다 할지라도 자기 체험이 없으면 생명력이 빈약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지식 위에 나의 경험, 나의 신앙 간증, 나의 믿음 체험이 있어야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반석 위에 세울 수 있고, 또한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바울같은 모습의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신앙위에 나의 경험이 더하여서 확고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몸  말 

먼저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요 사도임을 오늘 성경뿐만 아니라 여러곳에서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왜 이렇게 사도성에 대하여, 내가 예수의 사도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요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과거를 통하여 항상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보다 자기 부족을 느끼고 콤플렉스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예수 만나서 변화된 자기 모습과 사도로서의 정통성을 나타내고 고백하고 간증하기를 수도 없이 거듭하고 있습니다.‘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증거할 자요, 부활의 증인이요, 예수의 목격자요, 이 직분을 위해 선택받은 자입니다.’이렇게 그는 스스로를 확신하며 강조하고 또 고백하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선택된 자라고 그렇게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고 무서운 자기 확신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분명한 자기 확신이 있으신지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이제 내가 경험하고 받은 구원을 다른사람들 그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증인임을 여러분 스스로 분명하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모두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사도로 세움 받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바울처럼 자기 고백과 확증 속에서 믿음생활 하시고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서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투철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야 어떠했든지 지금 나는 주님과의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으로, 복음에 대한 자기 체험입니다 

이론적인 머리로만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실제 삶 속에서 체험한 부인 할 수 없는 분명한 체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요, 행복의 소식이요, 구원의 소식이요, 영광과 영화로움의 소식입니다. 복음은 이렇게도 기쁘고 즐거운 소식입니다. 왜 복음이 나에게 이렇게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음을 우리에게 깨우쳐  알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었고 실패와 슬픔과 좌절속에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들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지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 속에서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해주시고 부르시는 그 복음이 우리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은 교의적으로 이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기적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지치고 곤한 인생들에게 새 힘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자유와 해방을 줍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용서함을 주며 눌린 자들에게 벗어나게 함과 갇힌 자들에게 풀림을 줍니다. 병든 자들에게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도 합니다. 복음은 못할 일이 없는 능력이요, 기적의 역사가 수도 없이 일어나고 나타나는 기쁨의 복된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복음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래서 자기가 체험한 바를 강하고 담대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 같은 복음에 대한 자기 고백과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결코 구경꾼이 아닙니다. 여러분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삶에 분명히 복된 복음의 체험이 내 삶속에서 일어나고 여러분도 강하고 분명하게 그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간증할 수 있는 간증을 소유하는 소유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자유케 하심과 치유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여러분 모두 다 경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끝으로, 택함 받고 부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 하면 회심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또 회심 하면 어거스틴이 생각납니다.  이분들은 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삶의 족적을 우리에게 남긴 분들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데 크게 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처음에 이교도들이었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분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컸으며, 교회들도 이들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특히 바울의 회심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주시기 위한 과정 속에 일어났던 일인데, 바울은 그 경험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체험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 후에 그 체험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꾸준히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울의 첫 번째 사명의 길은 아라비아입니다 

17절에 보면 회심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왜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을까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것은 준비 기간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준비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의 자기의 길을 이제 생각해 봅니다.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확인합니다. 그 기간을 아라비아에서 3년간 보낸 것입니다. 이 기간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합니다. 

목사 되기 전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 가기 전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전에 오랜 기간 동안 혹독한 훈련과 훈련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업하기 전 준비 기간이 있어야 그 사업에 성공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복음의 삶을 살기 전에 30년을 준비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신음하는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굽 궁중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의 사도로 쓰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같이 기거하며 3년을 준비하였습니다. 바울의 아라비아에서의 기간은 준비 기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준비 기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먼저 우리는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상고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가 반드시 당당한 발걸음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두 번째 사명의 길은 다메섹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은 실패와 성공이 교차한 곳입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바울은 그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기에 잊을 수 없는 축복과 성공의 장소이지만 반면에 다메섹은 실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  바울은 처음 다메섹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 실패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메섹 사람들의 바울에 대한 선입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주동자라는 것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으로, 두렵고 떨리는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반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바울을 보는 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위대한 원리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자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다메섹에 와서 하는 행동은 예수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한 일입니다. 배반자입니다. 배신한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배반한 바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이 이중의 어려움이 다메섹에서 바울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사명의 길이, 믿음의 길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방해로 오해로 시행착오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으로 아픔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내가 전하려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사명의 길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중요한 곳입니다. 성스럽고 고귀한 선택된 땅입니다. 거룩한 도성입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바울 사도가 갑니다. 그곳에는 많은 그의 옛 동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지 않고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야고보만을 만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회심 후 3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에 갑니다. 이 기간에 그는 기도하고 자기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서, 바울 자신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비교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신앙과 신학적 사상을 정리한 후에야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단독적인 신앙적인 만남을 더 분명히 확고하게 하는 과정을 먼저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은 하나님과 자신의 일 대 일 관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 자신이 하나님과 일 대 일 관계를 성공적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먼저요 그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져야 다른 인간관계가 원만히 풀려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과정을 잘 거친 것입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찾아 만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동체를 중시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 자신이 하나님과 일 대 일 관계가 온전히 되었으면 공동체 속에서 여러 사람과 그 은혜로운 믿음을 공유하면서 공동체를 건강하고 든든히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고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 초대교회의 지도자요 중심인 게바와 야고보를 만났다는 것은 그가 교회를 존중하였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고 공동체를 세우려는 바울의 태도가 초대교회를 일으키는데 중요한 모범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경험을 간증하고 나눔으로 서로 서로 성도의  곁불이 되어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네 번째 사명의 길은 수리아와 길르기아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길르기아 다소는 자기의 고향입니다. 고향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려고 간 것입니다. 복음은 기쁘고 복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먼저 부모형제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그 마음과 태도에서 우리는 은혜를 발견하고 그의 마음가짐과 의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도 은혜로운 축복의 말씀인 복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복음 받은 자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요. 먼 곳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혹시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요하고 어려운 교리를 전개하려는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그는 먼저 교리보다, 이론보다 분명한 자신의 발걸음을 통하여 믿음의 실행과 당당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나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이 내가 만난 주님, 나를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확신으로 내가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부르신 주님 앞에서 여러분들의 발걸음은 거룩한 발걸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아라비아로 가는 준비의 발걸음이 되십시오. 다시 다메섹으로 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발걸음이 되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 자신의 체험을 나누는 바울처럼 교회를 존중하고 거기에서 믿음을 나누고 손잡는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고향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내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먼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감추고 숨기지 않고, 주눅 들지 아니하고 복음을 들고 당당하게 나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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