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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25) : 갈릴리 바다 (요 21: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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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25) : 갈릴리 바다 (요 21:1,15-19)

 
최근에 우리 한국인들은 감정의 극과 극을 오가는 "팬들럼(pendulum)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그리스 전에서 2:0의 통쾌한 승리를 경험한 후 국민의 기는 이미 월드컵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전에서 4:1로 참패한 후 역시 실력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제 월드컵의 꿈은 접어야 한다고 모든 기대를 땅에 던진 국민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꿈을 접기에 이르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수요일 새벽 밤샘을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생각보다 국민들의 큰 관심을 유도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 우주를 향한 꿈을 안고 하늘로 올라간 나로 호가 발사 137초 후 고도 70Km 상공에서 폭발한 후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다시 땅으로 안타깝게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직후 이를 평가하는 두개의 대조적인 신문 사설을 읽었습니다. 

한 언론인은 두 번씩이나 실패했다는 것을 역설하며 이제는 꿈을 접고 다른 분야에 그 돈을 투자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의 과학자는 이제 겨우 두 번 실패한 것이라고 우주를 향한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두 번이나> 실패했다고 말하고, 또 한사람은 겨우 <두 번만>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실패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그릇된 반응으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생의 대부분의 성공은 실패를 디디고 일어섬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일어서 걷기까지 보통 2,000번의 넘어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영적 넘어짐을 경험한 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일어섬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갈릴리 바다’(1절-디베랴)로 오십니다. 갈릴리 바닷가는 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던 소명의 바다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이 소명의 바닷가에서 다시 실패한 제자의 소명을 회복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을 방문해 보면 이 갈릴리 바닷가에 베드로가 다시 주님을 만나 새로운 소명을 받아 교회의 목양자로 다시 일어선 곳에 소위<베드로 수위권 교회>(Church of the Primacy of Peter, Tabgha)가 세워져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종종 넘어지는 우리의 영적인 재기를 위해 주님께서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방식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실패한 당신의 제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방식, 무엇일까요?>

1.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주변으로 부터의 냉소적 시선과 무관심입니다. 그리고 내적인 죄책감입니다. 아마도 지난번 아르헨티나 전에서 자살골을 기록한 박주영의 심정이 아마 그런 상태일 것입니다. 이 천년 전 베드로도 그런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다니있을 수 없는 자살골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주님은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결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의 책망도 없이 해변 가에서 생선요리를 만들어 제자에게 권하십니다. 

요21:12에 의하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검은 현무암 벽돌로 지어진 베드로 수위권 교회 내에 들어가 보면 교회당 전면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of Christi 혹은 Mensa Domini)으로 불리 우는 바위가 보존되어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바로 이 바위가 예수님이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과 식사를 나눈 식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D 4세기에 처음 이 바위를 중심으로 기념교회를 세웠다가 1930년대에 다시 교회를 건립한 것입니다. 

이 바위식탁에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세 번 당신을 부인한 제자에게 동일하게 세 번씩 사랑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회복의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삼세번 삼세판이란 말이 있습니다. 만세도 삼창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도 어릴 적 우리의 게임 동료들에게 세 번의 기회를 마지막 기회로 제공하기 위해 하나, 둘, 둘 반, 둘의 반의 반하며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이런 기회의 제공 그 자체가 제자 베드로를 향한 아직도 변하지 않은 주님의 사랑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그는 한 번의 실패로 우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어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포기해도 그분은 우리를 포기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9:15을 기억하십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저의 아이가 어릴 적 잘못을 심각하게 야단친 일이 있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넌 그렇게 생각하지? 하고 반문했더니 “그럼 왜 아빤 날 슬프게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제 아이가 그것을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네가 슬프면 아빤 더 슬픈거야”했더니 “근대 왜 야단쳐”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네가 잘할 땐 아빤 널 기뻐하며 사랑하고, 오늘처럼 잘못할 땐 아빤 너를 슬퍼하며 사랑하는 거야.”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 변함없는 부모를 넘어서는 주님의 불변의 사랑이 바로 우리의 다시 일어섬의 동기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2. 그 불변의 사랑으로 다시 새로운 사명을 맡기십니다.

매우 일상적인 상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내 기대를 저버린 내 제자, 나를 버리고 떠난 제자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거는 스승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셨습니다. 그는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 그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변함없는 기대를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물음에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이 제자에게 주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그때 주신 사명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전도자의 과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의 양들을 사랑으로 기르고 양육하는”목자의 과업을 맡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자와 목자의 사명은 어느 것이 더 어려운 과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이 어려우면 아기를 낳는 일이 어려운지 아기를 키우는 일이 더 어려운지 어머니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어머니들이 자식들이 속상하게 할 때 종종 “뱃속에 넣고 다닐 때가 더 편했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절한 실패의 경험을 지닌 제자 베드로에게 주님은 지금 더 어렵고 더 고상한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에게서 일감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높은 과업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일찍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그의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 기업을 경영하던 초기에는 성공의 가능성, 성공의 경험만으로 사람을 쓰고자 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난 되도록 실패의 경험을 가진 사람을 고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실패도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무조건 실패한 사람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난 그들에게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를 먼저 묻고자 한다.” 

난 허정무 감독이 나이지리아 전에서 박주영을 다시 기용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멋지게 재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분, God of the second chance 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을 말한 아브라함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형님을 속이고 장자권을 부당하게 찬탈한 야곱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인을 살해한 모세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장사 삼손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하를 사지에 몰아넣고 부하의 아내와 간음한 다윗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의 명을 거절하고 도피하는 배에 오른 요나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바울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 여행 중에 문제를 일으키고 대열에서 이탈한 마가 요한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불변의 사랑으로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십시오.


3. 사명의 성취를 위해 다시 주를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빛나는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 미래를 향해 그 사명의 실현을 위해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베드로 실패의 한 명백한 원인은 자만심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부인하기 직전에 주님께 고백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26:33)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누가22:33)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베드로야 내게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게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누가22:34)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 앞에 엎드려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마땅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만했고 오만했고 교만했습니다. 그것이 그를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태도가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도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배운 베드로에게 주께서는 본문 18절에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네 마음대로 네 자신을 믿고 살아 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타의에 의해서라도 네가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할 것)”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19절에서 그의 마지막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승리의 삶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언약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네 자신이 아닌 나를 의지하는 새 각오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는 사명을 완수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데서 그치는 자가 아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세우는 목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으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바꾸어 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 여름에 우리 모두 우리의 갈릴리 해변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이런 사랑을 연습하는 뜨거운 계절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디 가서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구요?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이란 글로 결론적인 대답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는 세 가지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질문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본문의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대답과 다르지 않습니다.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고 있는 그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특히 이 여름 단기 선교의 장이나 단기 봉사의 장에서 사랑의 실천으로 후회 없는 여름을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나의 제자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우리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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