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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점을 바꾸자 (민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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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바꾸자 (민 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민수기 13:30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상황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음과 생각, 즉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며 무엇을 보는가를 결정하는 관점(觀點)은 대단히 중요하며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 어른들이 그 단어를 찾는 TV프로가 있습니다. 꼬마는 자신의 관점으로 단어를 설명합니다. “그 사람이 왔다 가면 마구 혼나요.” 어떤 사람이 왔다 가면 아이가 혼날까요? ‘손님’입니다. 아이들은 손님이 오면 흥분을 해서 일을 저지르곤 하지요. “엄마랑 목욕할 때 꼭 하는 거예요.” 정답은 ‘만세’입니다. “손가락 크기만 해요.” 손가락 크기만 한 것은 많지요. 그런데 정답은 ‘콧구멍’입니다. 이것이 그 아이의 관점입니다. 관점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경험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외 없이 내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봅니다. 

관점은 주관적일 뿐 아니라 상대적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비행기, KTX, 헬리콥터…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런데 정답은 무엇을 타든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가장 빨리 갑니다. 관점의 상대성입니다. 관점이란 이처럼 주관적이고 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조차 우리의 관점에 집어넣으려는 무지를 보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관점을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바꾸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오리-토끼’라는 그림을 놓고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보기에 따라 오리의 주둥이로 보이기도 하고 토끼의 귀로 보이기도 합니다. 죠셉 세스트라는 미국 심리학자가 시도한 실험으로서,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오리입이라고 하거나 토끼귀라고만 했지 “이렇게 보면 토끼귀고, 저렇게 보면 오리입이네요”라고 말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은 사물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점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경험을 했지만 사람에 따라 설명이 달라집니다. 같은 경험에 대해서 각자의 해석과 그 해석의 편집을 서로 나누고 있을 뿐입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의 기사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관점의 차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오늘 본문 민수기 13장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경험하고 맛나와 메추라기를 다 먹어 본 후에 드디어 가데스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지혜를 냅니다. “우리가 정탐꾼을 보내어 어느 길로 가며 어느 성읍으로 가야할 지를 알아 오게 합시다.” 모세는 좋은 생각이라며 12지파의 지휘관 12명을 뽑아 40일 동안 정탐을 하도록 보냅니다. 

그들은 돌아오면서 큰 포도송이와 무화과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와, 그곳은 대단한 곳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정탐꾼 12명은 동일한 것을 보고 왔지만 열 명과 나머지 두 명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열 명은 “그들의 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고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은 거인들이어서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완전히 메뚜기와 같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라고 말합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야 할까요? 어느 쪽을 본받을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생은 결국 선택입니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B’ Birth(탄생)와 ‘D’ Death(죽음) 사이의 ‘C’ Choice(선택)로 만들어진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외적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합리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상대의 성은 높고 견고했습니다. 거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싸움도 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던 사람들입니다. 오합지졸입니다. 당연히 메뚜기들입니다.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이지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것을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이들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천군천사들을 보낸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결국 영적인 관점이냐 아니냐가 이 두 그룹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입니다. 제가 쓴 ‘성공을 이루는 7가지 완전 소중한 비밀’이라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지금 세상의 트렌드를 보면 특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간을 동물의 연장선상에서 봤습니다. 침팬지의 DNA 배열은 인간과 98.6%가 같습니다. 침팬지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최근의 트렌드는 인간이 침팬지와 다른 1.4%의 독특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러분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맞닿게 해보시겠습니까? 안 닿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안 닿는다면 아직 인간이 덜 된 것입니다. 인간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물건을 들 때도 이 두 손가락을 이용합니다. 동물들은 손바닥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절대 집을 수가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은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만들어졌는지, 우리나라 10대 젊은이들이 세계에 나가 핸드폰문자 보내기 1등을 하게 만든 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교하게 만드신 작품입니다. 뼈가 자라서 된 다른 동물들과 구조가 다릅니다. 

인간만이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게 집니다. 만화영화를 제외하고는 동물은 절대 얼굴이 빨게 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슬플 때 눈물을 흘리지요. 동물도 눈물을 흘리지만 슬픈 감정 때문이 아니라 위생 때문입니다. 마치 자동차 앞 유리가 더러워지면 워셔액을 뿌리고 와이퍼를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만이 태어날 때부터 미적 감각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검증해 보고 싶은 분은 태어난 지 4-5개월 된 아기에게 “까꿍~”을 해보십시오. 만약 아기가 웃으면 부담스럽지 않은 얼굴이요, 운다면 좀 부담스럽게 생겼다는 말입니다. 웃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각진 것보다는 둥그스름한 것을 더 좋아합니다. 아기들은 주로 달덩이같이 생긴 얼굴을 보고 웃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달덩이 같은 얼굴이라도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까꿍”을 하면 아기들은 모두 웁니다. 왜 그럴까요? 대칭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둥그런 것, 대칭이 되는 것, 조화가 잘 되는 음을 좋아하고 빗소리, 바다소리, 물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좋아합니다. 최근의 트렌드는, 인간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고 정체성입니다. 영적인 영역이 중요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중요하며 그분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으로 매사를 봐야 합니다. 겉의 것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에 멈추지 말고 영적인 영역에서 해답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영적 관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열 명은 매사를 현재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과 싸운다면 질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해 왔는가 하는 과거의 역사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데려갈 것이라는 약속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야, 이스라엘 백성들 진짜 한심하다!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일을 잊을 수가 있나? 우리는 탄천이 아니라 탄천 지류라도 내 눈 앞에서 갈라지면 의심 없이 믿고 살 것 같은데!”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의 망각의 속도보다 빠른 것이 없다.” 우리가 은혜를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 존재인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맛나, 메추라기, 불기둥, 구름기둥을 다 경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잊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적을 이기도록 도와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에만 집착해서 보지 말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큰 틀에서 현재를 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나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우리의 지형적 특성이나 정치적, 군사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불안해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5천 년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지금처럼 잘 풀린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외국의 침입을 931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런 침입에도 살아남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민족을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DNA를 독특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독특합니다. 여러 차례의 외침을 받으면서 음식을 오랫동안 숨겨 뒀다가 먹어서 그런지 발효음식이 발달했습니다. 우리 교인 한 분이 영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하루는 된장찌개를 끓였답니다. 그런데 문소리가 꽝꽝 나서 나가보니 바로 윗집에 사는 영국 할머니가 “이게 무슨 냄새요? 다음부터는 먹지 않았으면 좋겠소!”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청국장을 구해서 끓였답니다. 그랬더니 또 위층 할머니가 내려오셔서 “이건 또 무슨 냄새요? 그냥 어제 것 먹어요!”라고 하셨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처럼 많은 잡초를 먹는 나라도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김이나 미역을 먹으면 미국사람들이 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김이나 미역, 우뭇가사리, 다시마 등등을 다 합쳐서 seaweed(바다잡초)라고 하지요. 우리처럼 다양하게 먹는 경우가 없습니다. 봄만 되면 냉이, 쑥, 씀바귀 등등 육지 잡초도 남김없이 먹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음식을 눈으로 먹습니다. 차려놓은 것을 보면 작품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코로 먹습니다. 음식 냄새부터 맡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맛을 먼저 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배로 먹습니다. 양으로 승부를 보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많이 먹고 다양한 것을 먹을 뿐만 아니라 언어 속에도 ‘먹는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고생했지!”를 “애먹었지!”라고 합니다. “망했다”를 “물 먹었네”, “쫄딱 말아먹었네”라고 합니다. 홍수완 씨는 챔피언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뇌물도 먹고, 욕도 먹고, 감동도 먹고, 나이도 몇 살 먹었냐고 물어 봅니다. 사람이 “싱겁다” “짜다” “밥맛이다” “맛이 갔다” 등등 먹는 표현이 많습니다. 심지어 이메일 주소에 붙이는 @(at)표시를 ‘골뱅이’라고 읽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우리 민족은 뭐든지 먹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다, 즉 무엇이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931번의 외세의 침입으로 독특한 문화와 언어가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 독특한 DNA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에 우리 민족을 쓰시고자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이 어렵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들인 5천 년, 우리를 쓰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을 기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질은 또 얼마나 독특합니까? 이렇게 조급한 민족도 없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컵을 붙들고서 기다리는 민족은 우리 밖에 없습니다. 편의점에 가서 3분 컵라면에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가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다 먹는 데까지 3분 걸립니다. 티백은 뜨거운 물에 담가 두면 저절로 차가 우려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 두질 않지요. 마구 흔든 다음에 스푼으로 꾹 눌러 반 죽여 놓습니다. 차를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알차게 우려먹는 민족입니다. ‘빨리빨리’ 정신을 우리의 약점이라고 하지만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에 대한민국이 뜰 수 있는 최고의 기질은 바로 ‘빨리빨리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쏠림현상’이라는 기질이 더해집니다. 뭔가가 좋다고 하면 모두들 우르르 몰려갔다가 아니라고 하면 쑥 빠집니다. ‘신드롬 공화국’, ‘바람의 왕국’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어쩌다 일을 저지를 때 보면, 진짜 ‘저지른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무모하게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올인(All in)’이라는 말을 마구 씁니다. 

이런 무모함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칼 웨이그라는 미시간대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세상을 연구하고 그 데이터를 분석한 후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려면 이미 세상은 바뀌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생기는 문제들을 즉흥적으로 잘 대응하는 나라나 기업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CEO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표현이 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 말씀이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분이 기가 막힌 표현을 합니다. “다리같이 보여? 그러면 무조건 뛰어!” 그 결과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배려 문화’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대화 소통에 상대를 동참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머리를 자르러 가서 미용사가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적당히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음식점에서 “얼마나 맵게 해 드릴까요?”하면 “적당히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맵게 나오면 ‘이 집 음식 맛없어!’라며 다시 안 갑니다. 손님인 나를 눈치 없이 대했다는 결론입니다. ‘눈치가 없다’는 말은 ‘미련하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의 극치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제일 많이 쓴다는 ‘거시기’라는 단어입니다. “거시기한테 거시기 좀 갔다 주그라.” 그래도 일이 진행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눈치문화’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기질이 좋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처음에는 어리버리 하다가도 금방 상황 파악을 끝내고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흩어져 사는 민족은 중국인도 유대인도 아닌 우리 민족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고자 이렇게 준비하셨구나, 믿는 사람이 깨어서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으로 봐야겠구나 하는 기대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는 늘 한결같이 하시지는 않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내려갈 때 사람들은 죽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내려갈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더 높이 올리시겠구나!” 이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올려 보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정상에 가까울수록 산이 더 가파른 것처럼, 우리가 힘이 들수록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에서 매사를 보면서 그분과 더 가까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관점’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정탐꾼들도 동일한 경험을 합니다. 갈렙이 “우리가 그 땅을 올라가서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할 때 열 명의 사람들은 “우리가 능히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두 부류가 모두 그들의 믿음대로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명에게 “너희가 나를 멸시하느니라”라는 엄청난 표현을 쓰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만드십니다. 나머지 두 사람을 통해서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세대가 성숙하여 이들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최근에 굉장히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보았습니다. 주제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가, 떨어지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먼저 참여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기 위한 설문을 실시했습니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은 그 설문내용의 의미는 모릅니다. 연구자만 알 수 있습니다. 두 부류 중 하나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가 들더라도 기억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수년에 걸쳐서 추적한 결과, 참여자들은 애초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뇌는 나이가 들면 다 망가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뇌는 망가집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연구는 뇌는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발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인지적 편향성’이라고 합니다. 같은 것을 봐도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어떻게 보고 있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단 긍정적인 것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 부정적인 것이 틈타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것이 들어가면 긍정적인 것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을 넣느냐는 선택입니다. 두려움과 낙심과 어둠을 넣는다면 기대와 소망과 믿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도 이것을 알기에 긍정적인 것을 집어넣으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어떻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을 집어넣으십시오. 소망을 집어넣으십시오. 기대를 집어넣으십시오. 긍정을 집어넣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끌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매사를 영적으로 보면서, 지금까지 나의 삶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주관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을 가지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매사에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박성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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