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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피투성이와 왕후와 음부 (겔 1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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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와 왕후와 음부 (겔 16:6-14) 
  
 
에스겔 16장은 “왜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비참함을 당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긴 답변입니다. 

에스겔 14장 23절에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볼 때에 그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무고히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하게 징계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해 본다면 “왜 하나님은 성도인 나에게 복 대신에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셨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단히 길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에스겔 16장은 63절이나 됩니다. 성경에서 몇 번째로 절수가 많은 장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시편 119편이 176절로 1등이고, 70절 넘는 장이 몇 장 있습니다. 

에스겔 16장은 5등 정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여인의 인생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들에 버려진 피투성이의 여자아기를 살려 왕후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후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축복으로 방자한 음부 짓을 했습니다. 어찌 이런 여인을 그냥 둘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애굽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번영을 누리게 했더니 세계 각국에 우상을 들여와 영적인 간음을 행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남편 되신 하나님이 간음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의 고통을 내리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 할 수 있는 비유일 수 있지만, 한 성도의 영적인 삶을 개괄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비유를 한 사람의 영적인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Ⅰ. 구원받기 이전의 죄인의 비참함 (1-6절) 
 
사람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죄인입니다. 본문 1-6절에 이 죄인의 비참함을 그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집안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상 숭배자입니다. 무슨 원인인지 몰라도 이 딸을 탯줄도 자르지 않고, 물로 씻지도 않고, 소금도 뿌리지 않고, 강보에 싸지도 않고 들에 버렸습니다. 아무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들에서 갓난아기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고 있습니다. 짐승 밥이 될 신세요, 햇볕에 타 죽을 신세요, 해가 지면 얼어 죽을 신세입니다. 

이 그림은 생명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사망의 그림이고, 불행의 그림이고, 저주와 비참의 그림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진술한 것입니다. 조금도 과장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울 자도 없고, 소망과 능력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죄인 된 모든 사람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전도서 7장 20절에서 솔로몬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그럼에도 마귀는 사람들이 자신의 참된 영적 상태를 볼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사회에 선을 행하며 살았다. 내가 왜 버려진 피투성이냐?”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죽으면 천국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도덕적인 능력이 있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이 어느 정도 쌓이면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피투성이가 광야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는데 무슨 자유의지가 있습니까? 피투성이가 발길질하는 것이 자유의지입니까? 인간에 관련된 자유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새 발의 피이며, 피투성이의 발길질입니다. 하나님 개입이 없이는 피투성이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버려진 피투성이 아기는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불교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은 마치 피투성이가 스스로 일어나 왕후가 되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피투성이의 비유는 하나님이 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기에게 다가오셨습니다. 

 
Ⅱ.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개입(8-13절) 

1. 하나님이 피투성이게 베푸신 은혜는 C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 동사이다. 
 
첫째, 하나님이 먼저 이 아기에게 다가오셨습니다(Came). 본문 6절 전반입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아기가 하나님께 다가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기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과 요한일서 4장 19절에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찾아오셔서 비참함과 곤비함을 알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 아기에게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Commanded). 본문 6절 후반입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합니다. “살아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피투성이가 살아납니다. 죽어서 나흘 된 나사로에게 예수님이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명령하자 무덤 문을 열고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은 전능하신 명령입니다. 이 아기가 살아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아기의 의지로 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적극적이고, 사랑이 섞인 명령으로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이 아기를 씻기셨습니다(Cleansed). 본문 9절입니다.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기름까지 발라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넷째, 이 아기가 성장하자 최상의 옷을 입히시고 왕후로 삼아주셨습니다(Clothed). 본문 10절에 13절입니다.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띄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으므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왕이신 하나님이 버려진 아기를 잘 길러서 옷 입히고 왕후로 삼으신 것입니다. 죄의 옷을 벗기고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입니다. 의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이 아기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Covenanted). 본문 8절입니다.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내 손에서 누구도 빼앗아 갈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호적에서 지울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목숨 걸로 맹세하고 언약으로 맺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예수님이 이 언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구원하라고 맡기신 영혼을 하나라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입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멸망의 자식은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제자들의 돈 통을 맡아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훔쳐 자신의 주머니에 착복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자식인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 당신의 백성은 모두 보전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들에 버려진 피투성이 같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씻기시고, 기름을 바르시고 최상의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후가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왜 버림받은 피투성이에게 완전한 구원을 베푸셨는가? 
 
다만,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습니다. 

신명기 7장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무조건적입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만한 조건이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가 커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Ⅲ. 은혜 받은 자의 배역(Backsliding) 

1. 외인과 사통하는 방자한 음부가 되었다. 
 
에스겔 16장 15절입니다.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옷을 화려하게 입고 나가서 길거리에서 행음을 하는 것입니다. 30절에는 방한한 음부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32절에는 지아비 대신에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라고 말합니다. 돈을 받고 간음하면 직업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직업여성은 동정이라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남편이 살림하라고 벌어다 준 돈을 가지고 외간 남자에게 주면서까지 행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동정받을 여지가 없는 여자입니다.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심한지 이런 방자한 음부의 간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 예루살렘은 사마리아나 소돔보다 그 죄가 더 크다. 
 
사마리아의 우상 숭배가 심하다 해도, 소돔의 죄가 악하다 해도 예루살렘의 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의 성님이요, 소돔은 예루살렘의 아우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 제일 나쁜 여자는 예루살렘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더라도 자기 동네에 있는 우상을 섬기면 되는데, 우상을 수입합니다. 애굽 우상, 앗수르 우상, 바벨론 우상까지 수입해서 세계 각국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경상도 선생이 서울에 있는 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야외 수업을 나가서 연못에 갔는데 개구리가 많았습니다. 개구리를 보고 선생이 “얘들아, 개구리가 천지 빼 까리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천지 빼 까리가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선생이 “쌔 비리다 아이가”라고 답합니다. 이 말은 매우 많다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에도 우상이 쌔 비렸는데 앗수르, 바벨론 것까지 수입해서 산당에 세워 놓느냐는 것입니다. 

3. 블레셋이 흉볼 정도의 배역이었다. 
 
이렇게 되자 블레셋이 흉을 봅니다. 에스겔 16장 27절입니다. “너를 미워하는 블레셋 여자 곧 네 더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는 자에게 너를 붙여 임의로 하게 하였거늘” 블레셋이 말하기를 우리도 다곤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 국가이지만, 예루살렘은 너무 심하다고 흉을 보는 것입니다. 너희처럼 막가는 음녀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배역하면 이처럼 세상에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배역이란 뒤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저는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을 매우 좋아합니다. 아주 잘하지도 못하고, 못하지도 않습니다. 좋아하는 운동 중 테니스는 할 때에 금기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무리 못 쳐도 뒤로 물러가면서 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면서 쳐야 합니다. 신앙도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뒤로 미끄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이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4.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왕이신 하나님이 아내로 삼은 왕후가 방자한 음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여인을 어느 남편이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에스겔 16장 38절입니다.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 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고” 국문은 중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리를 트는 것입니다. 

5. 그 원인은 신앙의 배역 때문이다. 
 
은혜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포로 됨의 고통이 찾아오는 이유는 신앙의 배역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배역은 왜 찾아옵니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피투성이 같은 나를 왕후로 만들어 주신 은혜를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감사도 없고, 전진도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스겔 16장 22절에 “네 어렸을 때에 벌거벗어 적신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처럼 물에 새겨 다 떠나보냈습니다. 

에스겔 16장 43절에는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격노케 하였은즉”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죄인 된 나를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적으로도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잘 살게 해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겪은 6·25는 들에 버려진 피투성이가 아닙니까? 6·25때 불렀던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맬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저는 어렸을 때 버스나, 기차에서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여의고, 정묘 호란 때 어머니를 여의고, 6·25때 동생을 잃었다는 내용을 쪽지에 써 가며 껌을 파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버려진 피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들어갔습니다. 왕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방자한 음부처럼 기독교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공산주의 김정일에게 기웃거립니다. 이것은 국문을 당할 일입니다. 주리를 틀어야 합니다. 젊은 세대들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피 흘리고, 싸우며 지킨 나라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을 국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에스겔 16장 60절로 63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eternal covenant)을 세우리라” 영원한 언약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성자 예수님이 피 흘려 죄를 갚으시고,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사 성령의 기름을 부어 내주하시고, 영원토록 구원하시고, 절대 잃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방자한 음부 짓을 하면 징계는 할지언정, 영원한 지옥에 버리시지 않습니다. 유기는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 제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신앙이 뒤로 미끄러졌습니다. 방자한 음부 짓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왕후였습니다. 다시 왕후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씻어주시고, 받아주시고,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앞으로 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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