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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 (갈 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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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들 (갈 2:15-21)
   
   
맥스 루카도 목사님이 쓰신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목은 “It's not About Me”입니다.  이 말은 저자가 서문에서 한 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맥스 루카도 목사님이 어느 여름날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절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있었고, 목사님을 배가 고팠습니다.  목사님은 샌드위치를 사서 테이블을 찾아 두 사람이 함께 앉았습니다.   목사님이 그 친구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올해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신가?”  그의 대답은 “올해, 그 분이 내게 뭘 가르쳐주고 계시냐고?” 그는 되받아 묻고는  “중요한 건 내가 아니다.  그걸 가르쳐주고 계시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을 루카도는 친구의 말을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되었고, 바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삶의 문제가 더 커진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루카도 목사님을 우리에게 조언하기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의제와 시간표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자기의 의제와 시간표를 내려놓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고 위대하심을 깨달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화자찬에 빠지고, 자기 보호에 민감하고,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중요한 것은 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살고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율법을 행하고 선하게 살려고 하던 자신을 내려놓으며,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죽었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19절 말씀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자세히 보려면 새번역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사도 베드로의 행동을 책망하는 자리였는데, 가장 중요한 교리를 말씀하는 것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게바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두 사람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도 율법을 지키며 살았고, 사실 그런 관습이 몸에 젖어서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도 유대인으로 살고, 율법을 준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에 와보니 이방인들이 많았고, 이방인들이 대사도 베드로가 왔다고 음식을 준비하여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는 주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신앙생활하던 유대인들이 오니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던 중에 할례 받은 교인들이 들어온다는 말에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답지 않게 행동한다는 말을 들을 것으로 두렵게 생각하여 도망을 치는데,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자리를 피하였고, 그동안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복음을 전하던 바나바도 그의 외식에 유혹을 받아 함께 피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는 사도 베드로를 불러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보고 듣는 자리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4)고 하셨습니다.  한 점 책망하거나 나무랄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살아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처럼 살아서 구원받으라고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성전이 있고, 율법을 가진 사람으로 이방인들을 사람으로도 보지도 않았습니다.   개나 돼지 같은 자들이요, 장차 멸망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고, 나중에 가면 유대인들의 노예로 전락할 자들이라고 천박하게 보았고, 사람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말씀하는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아닙니다.  

16절 말씀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는 율법으로 구원받고, 율법이 주는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며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준행하여 구원받겠다고 하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죄를 죄 되게 정죄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으로 무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 되게 할 수 없고, 죄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되고, 율법이 없으면 조금 양심적으로 살았다는 것으로 자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므로 죄를 죄 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율법 앞에서 무능한 존재임을 알게 하시니,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율법도 은혜의 선물인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복음주의자 프레드 브라운(Fred Brown)은 율법의 목적을 묘사하는데 세 가지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첫째)  율법은 치과의사가 환자의 입안에 넣는 작은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치과의사는 이 거울을 가지고 충치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충치를 치료하거나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 거울은 단지 충치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한 비정상인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거울로는 진단은 가능하지만 치료는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브라운은 다른 유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또한 회중전등과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면 여러분은 회중전등을 사용하여 전기차단기가 있는 어두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전등을 비추어 퓨즈를 살펴 볼 것이며, 곧 차단기 안의 퓨즈가 타버린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당신은 전원이 다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 타버린 퓨즈를 제거한 후, 새로운 퓨즈로 갈아 끼울 것입니다.   회중전등은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율법은 마치 다림줄과 같다고 했습니다.  건축가는 종종 세우고 있는 건물이 수직으로 잘 올라가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무거운 추를 달아 점검을 합니다.  그래서 만약 삐뚤어져 수직에서 벗어난 실수가 발견된다면, 그 건축가는 망치와 톱을 사용하여 그것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건축가는 다림줄을 통해 수직여부를 검사하며, 고칠 때는 망치와 톱 같은 다른 연장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의 문제를 지적할 뿐이지 그 문제의 해결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죄의 문제의 해결은 오직 복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나의 죄만 지적해주고, 무능한 것만 깨닫게 할 뿐입니다.  바울은 일찍부터 율법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혼에 새겨두는 율법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유학하여 유명한 율법의 대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준행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착각이었고, 그는 율법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입니다.  그는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을 놓고 조금 고민하는 죄인과 아예 처음부터 율법을 무시하고 죄를 짓는 사람이 있을 뿐인데, 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 설 뿐입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16절 말씀은 두 가지 주제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이 중복되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지를 순례한다고 준비하면서 몇 권의 책을 보는 중에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란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 정성욱목사는 하버드대학에 석사학위를,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덴버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트라이시티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었습니다.  

이 분은 오늘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꿰뚫어보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주님이신 것을 선포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멕시코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하신 어떤 목사님이 서울 시내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에 따르면 슬프게도 자기가 방문한 교회들,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사례는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번영의 신학, 긍정적인 사고력, 예수 믿고 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설교가 판을 치고, 복음이 빠져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은혜롭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으로는 안 되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하는 그 깊은 의미를 말해야 합니다.  19절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선행을 쌓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 하나님 앞에 무조건 나아갈 것입니까?  

다시 맥스 루카도목사님이 쓰신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 한 인쇄공의 딸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감정이 있다면 하나님은 다만 두려우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성경조각을 주었습니다.  한 면에 이런 말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고 “주셨으니”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글씨가 찍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그 말씀만을 가지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주셨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의 변화가 그의 어머니의 눈에 띄었습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즐거워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딸은 주머니에서 성경구절이 찍히다만 구겨진 종이쪽지를 내어놓았습니다.  어머니가 그 글을 읽고서 물었습니다.  “무얼 주셨는데?” 어린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도 몰라요. 

하지만 뭔가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뭔가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조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겠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기에 다시는 같은 죄값을 물을 것이 없다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무엇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범죄한 자를 반드시 벌하시고야 마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신데, 그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 없는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제물이 될 수 있는 이는 오직 성자 예수,  하나님의  아들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십자가에 내어주어 죄인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놓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신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믿고 나아오는 사람을 구원해주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창세기에는 이미 완벽한 복음을 사례를 들어 말씀했습니다.  창15:6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변치 않고 이루시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열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시고 불러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헨리나우엔의 “춤추시는 하나님”이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서커스팀에서 공중그네를 타고 있는 프라잉 로들라이(Fiying Rodleighs) 가족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절친한 친구인 로들라이의 초청을 받아 서커스를 여러 번 관람하였습니다. 헨리가 생각할 때에 서커스는 참으로 매력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아름다움과 스릴,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이 넘쳤습니다. 나우엔 박사는 공중그네를 바라보면서 나는(날으는) 사람과 잡아주는 사람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대에서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는데, 이편에서 저편으로 그네에다 발목을 걸고, 거꾸로 그네를 타면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면서 몸을 날리면 저 편에 있는 사람이 나는 사람의 손을 잡아 줍니다.  

아주 오랫동안 서커스에 몸을 담은 로들라이가 나우엔에게 해준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은 잡아주는 사람을 먼저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나는 사람은 잡아주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우엔은 그 말을 한참 음미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사람이 자기가 살겠다고, 잡아주는 사람보다도 먼저 잡으려고 하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은 두 손을 힘껏 뻗치고 있으면 잡아주는 사람이 정확히 잡아주어, 두 사람 다 안전하게 공중그네를 즐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나우엔 박사는 이 말을 들으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바라보았는데, 아브라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잡아주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더러운 손을 내밀고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3.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살고 있으면 주님이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내려놓았다는 말보다 훨씬 더 결단을 요구합니다.  버린다는 말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렇습니다.  나로서는 구원받을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믿지 못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제일 구제불능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고상하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나의 구원을 위하여 어느 것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완전 무능하고 완전 타락한 사람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셔야 구원받은 것이요,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로움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칭의와 함께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귀한 성화도 내 안에 주님이 사시면서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가시도록 위탁해야 합니다.    성화는 자기 부인과 회개와 순종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세상을 행하는 나는 죽었다고 선언하시고 이제 이후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이 일평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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