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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받는 삶을 이루라 (행 2: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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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받는 삶을 이루라 (행 2:37-41)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사도행전2:38-39)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인 사도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120명의 무리들은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중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그들을 보고 놀라움과 함께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성령강림의 사건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 중에서 성령강림의 역사는 오래 전 예언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고(행2:36), 그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다시 부활하여 하님께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숫자는 삼천 명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받기 위한 중요한 신앙적 요인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무리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은혜 받게 하는 요인입니다. 

  
마음의 찔림 
  
그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찔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를 자기들이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와 로마병정들이 죽였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가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찔림을 주었습니다.   
  
‘찔려’ 라는 동사의 원어의 의미는 ‘날카롭게 후벼 파다’, ‘찔러 관통하다’ 는 뜻입니다. 마음에 감추고 있던 것이 철저히 파헤쳐져 아픔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곧, 양심의 찔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말의 어원은 ‘함께 안다’(know with)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이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알게 되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왜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아는 양심이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놀드 바우브케’ 라는 사람은 ”양심은 선과 내적인 빛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이다”고 했고, ‘느헤미야 로저스’는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양심을 인간의 마음속에 세워 놓으셨다”고 했고, ‘J. 루소’는 “양심은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정이다”라고 하면서 “양심은 영혼의 소리이며 욕정은 육체의 소리이다”고 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안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도형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모양을 삼각형으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이처럼 삼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만약에 잘못을 범하면 삼각형의 양심이 움직여 뾰족한 모서리로 마음을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찔림을 받는 양심의 가책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삼각형의 양심은 마음의 벽에 닳아 무뎌지게 되고 인생의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이 양심은 둥근 원형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을 인디언들은 어른의 양심이라고 부르는데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그들의 양심을 찌를 만한 본래의 양심이 무뎌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의 명령을 계속해서 거역하면 우리의 마음은 둔해져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바울은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양심이 무뎌져 외식하는데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쬬’ 목사님은 “전선에 전기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려면 전기 소켓에 손을 넣어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소켓에서 하나님을 전기처럼 느낄 수 있다. 이는 양심이다. 양심에 하나님의 능력이 짜릿하게 느껴온다. 어떤 이는 ‘나는 조금도 양심에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은 퓨즈가 끊어졌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증거 하는 말씀은 바로 이 퓨즈를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 말씀으로 양심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찔림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마음에 찔림을 받는 양심의 깨달음을 가진 은혜 받는 성도이시기를 바랍니다.
  
이천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그 당시 유대인들과 제사장과 로마군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죽인 것”이라는 성령의 깨우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음에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는 자“라는 음성을 듣는 다면 우리의 마음은 큰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 찔림을 받는 마음이 우리로 은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을 줄 아는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찌할꼬’고백할 수 있어야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을 뿐 아니라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치를 깨닫고 탄식하는 고백입니다. 
  
오늘의 우리시대의 문제는 ‘어찌할꼬’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어찌할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부끄러운 죄와 수치를 보고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는 깨달음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마음을 졸이면서 괴로워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솔직하고 필사적인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모두는 ‘어찌할꼬’의 해야할 사람임에도 ‘어찌할꼬’ 할 줄 모르는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꼬’ 할 수뿐이 없는 자임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때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병들어 몸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어찌할꼬’ 할 줄을 몰라 밤새워 술을 마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일 끝나는데도 ‘어찌할꼬’ 를 몰라 인생을 낭비하며 탕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할꼬’ 하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인생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의 삶으로 만들어 가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했습니다. 애통은 ‘어찌할꼬‘ 하고 자기 부족함과 수치를 보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자기부끄러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하는 은혜의 삶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추악한 죄의 모습을 깨닫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위대한 예언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할꼬’ 할 수 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회개
  
베드로는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은혜 받는 삶은 회개의 행동과 비례합니다. 지금 내가 은혜롭다는 것은 회개의 삶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회개의 삶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가장 큰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실 때 먼저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였습니다. 천국의 삶은 회개의 역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 회개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해야 할 회개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이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진리를 믿지 않고 거부한 죄를 회개하는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일생 일회적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성화를 위한 회개가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17:3)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짖는 죄들을 그때그때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회개의 삶으로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곧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런 회개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일으키십니다. 성령께서 회개하게하시는 역사에 따라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회개하는데서 은혜 받는 신앙의 삶을 이루게 될 수 있습니다. 
  
항해 중에 있는 배가 암초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선장이 발견했습니다.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갑판을 닦는다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퍼낼 준비를 시킴으로서 위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를 구하려면 배의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장은 재빨리 명령을 내리고 배의 방향을 돌려 위험을 모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죄라는 위험한 바위에서 방향을 돌려 안전한 구원의 항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키를 돌릴 때 배 전체가 방향을 바꾸듯이 회개는 반드시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은혜 받는 삶의 조건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하나님 앞에서 변명하고 도피하던 인생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자신의 진실을 하나님 앞에 긍정하는 용기는 그 사람의 생애 중에  최대의 용기이고 그를 변화시키는 최대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복’이라는 양들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지만 앞쪽의 양들이 풀을 뜯어 먹어버리면 뒤따르는 양들이 풀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툼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양들의 행렬은 조금씩 빨라지게 됩니다. 뒤쪽의 양들이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려오므로 앞쪽은 선두를 지키기 위하여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모든 양떼가 전 속력으로 앞으로 달리다가 달려가는 힘에 의해 모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린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탐욕으로 좀더 차지하고 누려보겠다고 멸망을 향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달려가고 있습니다. 회개는 이러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T. 맨톤’이라는 사람은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결국 그 영혼이 사단에게 저당 잡혀있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오늘 해야할 회개의 삶을 찾지 못함은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삶을 잊고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삶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용서의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되는 세례의 백성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의 찔림’과 ‘어찌할꼬’ 할 수 있으며 깨달음과 회개의 행동을 가집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은혜의 삶을 만들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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