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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2) : 마태의 성령세례 (마 3:1 - 마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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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2) : 마태의 성령세례 (마 3:1 - 마 4:11)


성령강림주일 이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에는 마가복음이 말씀하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강론하였고, 오늘은 마태복음이 말씀하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성령세례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가입하는 것으로 신분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했고 성령을 주심은 일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럼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이 받으신 세례를 어떻게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를 위해서는 우선 마태복음의 주제와 전체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28:16-20절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삼위 하나님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곧 마태복음이 다른 복음과 다르게 말하는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가르치고 지키는 제자 삼음이 곧 세례를 주는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5편의 설교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강조하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주님의 가르침이 대비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옛 교훈과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의 의와 법을 가르침으로 받아 천국을 소유하라는 유대인들을 향한 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이루어짐’을 매우 강조하여 언약의 성취를 유대인들에게 확실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보에 설교개요란에 나눈 것처럼 세례 요한의 세레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마귀에게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다른 점은 성령세례에 있어서 마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새찬송가 194장을 보면 ‘성령의 큰 불을 주소서’라는 가사가 후렴구처럼 매절마다 반복됩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냉랭하고 악한 맘에 사랑의 불이 타도록 성령의 큰 불을 주시라고 하며 부릅니다. 이런 가사를 보아도 성령은 불로 임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성령은 뜨거운 불길로 자신에게 임하며 그런 체험이 곧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어느 집회에 가보면 성령의 불이 임하였다고 하며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길길이 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뜨거워 견딜 수 없다고 펄펄 뜁니다. 그때는 제가 어렸었는데 그런 현상이 매우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럼 과연 성령은 그와 같은 불세례로 임하는 것입니까? 그런 이상한 현상과 체험을 하게 한 것은 실제 성경해석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단어는 구원역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갖고 이 볼펜도 여러분들 보시기에 파란색으로 어떤 모양으로 생겼다고 아실 겁니다. 그러나 이 볼펜에는 ‘숙명여자대학교’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요. 저희 집사람이 입시설명회에 갔다가 받아 온 것이거든요. 이렇게 알게 되면 이 볼펜을 그냥 물리적인 현상이나 모양으로 알지 않고, 그 볼펜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까지 포함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에 비로서 이 볼펜을 바로 아는 것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의미를 빼버리고 단어가 갖는 의미만을 생각하여 불같이 뜨거운 성령이 임하여 차갑고 악한 마음을 불태워 주어야 한다고 해석하며 또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 강에서 올라오실 때 불이 뜨겁게 임하였습니까? 물에서 올라오시니까 몸을 말리려고 불이 임하여야 합니까? 전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잖습니까?!!

세례 요한은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어떤 회개입니까? 회개는 마음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말하는 회개는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시는 이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방향전환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럼 어떻게 능력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냥 그 구절이 말하는 것을 따라 풀면 능력이 어떻게 많으신 분이신지 알 수 있어요. 즉,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기 때문에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가복음의 성령세례와 아주 다른 점입니다. 이방인에게 쓰여진 마가복음은 불의 세례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불의 세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은 불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선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는 불은 성소의 번제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거둔 수확물을, 즉 그들이 수고해서 얻은 열매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고 와서 번제단에 불로 태워 드렸습니다. 그 제물들이, 곧 그 열매들이 흠이 없는 것이라면 불의 태움을 통해서 제물을 드린 자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당하게 성소의 뜰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들이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생명의 교제를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불을 통과한 제물을 제사장이 물로 수족을 씻고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 앞에 드리고 그 제물을 되물리면 제사장과 드린 사람이 함께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는 대표적인 불입니다. 

또한 엘리야 선지자 때에 온 이스라엘이 우상의 나라가 되어 버렸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때 갈멜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가 드린 데물을 불로 태워서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 역사 가운데 불의 임하심으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임을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살핀 후에 마태가 말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본문의 앞뒤 문맥을 따라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데 있어 마가복음과 크게 다른 점은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본문 7-10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 요한이 말한 중요한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자신들이 그의 자손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그냥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니까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흔히 발에 채이는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런 후에 불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생각지 말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에 던져 태워 심판하시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과 불의 세례를 말씀하는 본문의 말씀에서도 일치함을 보입니다. 12절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서도 알곡과 쭉정이를 말하므로 열매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불에 태운다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과 불’의 세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은 좋은 열매를 맺는 자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누구의 자손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입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로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신분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입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으면 어떤 신분이 되는가? 마가복음의 성령세례를 지난 주일에 강론하면서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신분의 변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이 신분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므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아주 다르게 나타내 보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허락하라고 하시고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못 지킨 율법을 다 지킨다는 뜻입니까? 여기 ‘의’라고 하는 말도 항상 언약관계, 즉 신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의를 말한다면 구약은 종으로서의 의이고, 신약은 아들로서의 의입니다. 그랬을 때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예수님은 이제 아들로서의 의를 얻으실 것입니다. 구약 백성이 가졌던 종의 의를 신약 백성이 갖는 아들의 의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종으로서 가졌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처럼 이방인을 위해 쓰여진 책은 이런 ‘의를 이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의 언약을 따라 종의 의를 가졌던 백성이기 때문에 이 말을 알고 있으므로 ‘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며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라도 그는 종으로서의 의를 가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그저 주님께서 성령세례를 받으시므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만 하면 되지만, 마태복음은 의를 다 이루는 것이라고 함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역사의 성취로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마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됩니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세례된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것을 마태복음 4장의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읽으셔서 아시는 것처럼 이 광야에서의 시험은 마가복음과 아주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어떤 시험을 받았는지 상세히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 대하여 3가지로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왜 마태는 이러한 시험을 상세히 기술하는지 여러분은 주목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럼 마태가 기록한 광야에서의 시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각각의 시험마다 항상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되’를 반복하며 시험을 이기십니다. 이게 마가복음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입니다. 

왜 이런 차이점을 나타내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태복음의 주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기록된 말씀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마귀는 매 시험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항상 ‘기록되었으되’로 대답하시며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들의 전체적인 결론적인 성격은 마지막 시험에 있습니다. 4:10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함이 시험을 이기는 결정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지면 마귀에게 경배하고 그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과 불로 세례된 하나님 아들은 어떤 자입니까? 기록된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며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된 신분으로 거듭난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3가지 시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면 누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다 당하는 시험입니까? 그래서 혹자는 이 3가지 시험이 떡에 대한 시험, 세상의 영광과 권세에 대한 시험, 누구를 경배할 것인지에 대한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해석이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경험상으로 모두 이런 시험에 노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가는 인간이면 누구나 공통으로 당하는 시험이라면 그 시험들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방인들도 당하는 시험이라면 다 기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의 시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험을 일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유대인, 곧 구약의 이스라엘이 당했던 시험이며, 그들이 이 시험들에 실패하였던 자들입니다. 이방인의 권세와 영광을 탐하고 이방신을 수입하여 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만들었던 구약의 역사 가운데 그들이 당했던 시험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이스라엘은 종의 의를 가지고 시험들에 망하고 넘어졌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이제 성령과 불로 세례하여 아들의 의를 갖는 새 백성으로 만들려고 주님은 오셨습니다. 새 창조된 새 피조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얻는 성령으로 세례된 자들입니다. 회개에 합당치 못한 열매를 맺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불로 심판하여 성령으로 세례된 나라의 백성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쫓겨나고 새 나라에 성령으로 세례된 새로운 백성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된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들은 마태복음의 결론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분부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들로 일을 할 것입니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로 세울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십니까? 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혹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술로만 경배할 뿐 마음으로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우리 중에 많습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단지 교회 다닌다는 것만 확실하지 주님의 분부한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한 번 영접하면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고요? 그런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 만들려고 성령세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구약 백성은 비록 시험에 실패하여 그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이제 신약 백성은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기록된 말씀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함으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자신이 뜨겁다고 펄펄 뛰는 자들이 성령과 불로 세례된 자들이라고 마태는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되어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룰 수 있는 아들이 된 자들을 말합니다. 이 아들들은 우리 주님처럼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말씀을 지킴으로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다. 15절부터 23절까지 한 절씩 교대로 읽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5장-7장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내용입니다. 천국시민의 법과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씀을 듣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국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형식을 반복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세에게 들어서 사는 옛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씀을 듣고 사는 새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셈입니다.

그에 대한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데,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의 열매로 안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나쁜 열매는 맺는 나무마다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어떤 것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과 전혀 다른 가르침으로 많이 속아왔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천당갈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열매를 맺는 자여야 하고 그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확신만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안전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는 관심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은 것 같으나 그런 가르침은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 말아라, 너희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말아라. 그런 족보와 신분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됩니까? 차라리 이 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어떻게 구분할 수가 있겠습니까? 21절에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를 알고 있으면 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를 시인만 하면 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갖고 주여 주여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들어갑니다.

혹 우리는 좋은 열매인 것처럼 속는 일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면 다 괜찮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좋은 열매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면 좋은 열매입니까? 

그냥 우리는 잘 가르치는 선생이면 됩니까? 선생이면서도, 가르치면서도 말씀을 지켜 행하지는 않는다면 어찌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면 다 괜찮습니까?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자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으며 그저 권능만이 최고로 아는 자들입니다. 

수가 많이 모이면 좋은 교회입니까? 대통령이 그 교회에게 가서 예배하니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까? 무슨 선교사업을 많이 하니 좋은 교회입니까? 많은 구제를 하니 좋은 교회입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말씀을 지키어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분명히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하실 것입니다.

부모에게 가장 기쁜 자식은 어떤 자들입니까?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자식입니까? 많은 지식을 갖고 박사학위를 따면 좋은 자식입니까? 권력을 지닌 자가 좋은 자식입니까? 좋은 집에 사는 자가 좋은 자식입니까? 아닙니다. 부모의 말을 순종하는 자가 좋은 자식입니다. 이런 자식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성령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우리가 듣는 이 구속의 언약을 말하는 복음이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을 복종케 하는 권세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거절하는 자가 가장 불행한 자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안전한 구원만을 바라고 아무 열매도 맺지 않고 계십니까? 가장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수가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된 주님의 나라 백성은 말씀을 지켜 순종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로 이런 귀한 아들의 신분을 얻은 자로써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열심히 일하여 집을 지었는데 홍수가 나서 다 떠내려가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지 마시고, 말씀을 잘 순종하여 반석 위에 집을 지어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는 집을 짓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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