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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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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 (행 6:8-15)


여러분, 강재구 소령을 기억하는가? 신병훈련 중에 한 사병이 수류탄을 잘못 던져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어뜨리자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져서 장렬한 죽음을 죽은 사람이다. 그의 평소의 신념은 “짧고 굵게 살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살았다. 

초대교회 일곱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집사도 역시 짧고 굵게 산 사람이었다. 그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젊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는 집사로 안수받고 얼마 살지 못했지만 그의 순교로 인해 복음의 역사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값있게 던진 사람이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어떤 도식 즉 패턴이 있다. 마치 구약의 사사기가 범죄-경고-징계-회개-구원의 순환이 있듯이, 사도행전에서는 이적-말씀증거-성장-핍박이 순서로 진행이 된다. 2장에서 성령강림과 방언이 나타나고, 베드로의 설교가 있었고, 3,000명 예수를 믿었고 그리고 핍박이 있었다. 3장에서도 앉은뱅이를 고쳤고, 말씀을 증거했고, 5,000명으로 성장했고 그리고 핍박이 있었다. 5장에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과 치유의 권능이 나타났고, 담대히 말씀을 증거했고, 교회가 성장하고 칭찬을 받고 그리고 핍박이 있었다. 6장과 7장에서도 스데반의 능력이 나타나고, 말씀을 증거하고, 그리고 핍박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 

즉 기적과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났고 행해졌다. 그리고 기적 후에 말씀증거로 교회가 성장되었고 그리고 그후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라왔다. 핍박 후에는 또 기적이 나타나고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나고, 교회가 성장하면 또 핍박과 방해가 있곤 했다. 왜인가?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이 진리이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사도가 아닌 집사였다. 그러나 그는 구제와 봉사 이외에도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다. 나중에 빌립집사도 전도자가 되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기사와 표적을 행했고 그의 지혜가 충만한 전도는 말로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8절에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했고 10절에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했다”고 했다.

전도는 사도들만의 사명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사도들이 전념했지만 실제로 전도하는 일은 사도들만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했다.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며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최고의 지상명령이다. 그러므로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도의 열매가 없음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전도하지 않고는 못견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디서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한다. 

스데반의 반대자들은 리버티노사람을 비롯한 이방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다. 리버티노란 자유노예를 말한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폼페이우스장군에 의해 노예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사람들로서 고국에 돌아와 살았지만 그들만의 회당이 따로 있었다. 이들은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라지역에서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함께 모였던 것이다. 

특히 9절에서 길리기아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고향이 바로 길리기아지방의 수도인 다소였다. 즉 이때에 사도 바울 즉 사울도 이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비록 스데반은 순교하여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그와 바울과의 만남으로 인해 후에 사울이 바울이 되는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때로 희생을 당하고 죽어지고 손해보고 의미없어 보이는 일을 겪고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께 순종해서 믿음과 사명의 길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과 충성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모르는 고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나를 만나고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내가 고난중에서 믿음을 지키고 참고 견디고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과 내가 어려운 중에서도 여전히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감동을 받고 예수를 만나고 예수의 사랑을 느끼게 하라.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지고 죽어지고 묻혀지는 사람이 있어야 복음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힘쓰라.

스데반을 고소한 죄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전모독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모독죄이다. 11절에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했다. 스데반의 7장의 설교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7:48절에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라고 했다. 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성전을 지어서 봉헌하면서 기도한 내용이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만 모실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또한 율법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이제는 은혜의 복음의 시대가 왔다고 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처럼 이제는 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을 통해서 그들이 이제는 옛 생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새 역사에 참여하여 나오라고 부르셨지만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거부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귀가 어두워지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받지 못했다. 

오늘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다 잘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다. 베드로가 성령충만해서 설교할 때에 3,000명이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는 일도 있었지만, 스데반도 똑같이 성령충만해서 같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지만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공의회에 고소하고 잡아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고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여전히 꾸준히 계속해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자.

스데반은 이렇게 고소를 당하고 잡혀와서도 평안했다. 두려움이 없었다. 15절에 보면 오히려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준다. 그 사람이 가진 마음상태에 따라서 그 얼굴이 다르게 보인다. 미국의 루빈스타인화장품회사 사장 루빈스타인은 “여자는 30세가 지나면 그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다. 그동안 피부를 얼마나 잘 관리하고 가꾸었는가에 따라서 얼굴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사람은 40세 이후의 자기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했다. 정작 자기 자신은 참으로 못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존경을 받았다. 즉 사람은 40년간 살아오면서 스스로 닦아온 인격과 성품이 그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선택할 때 인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고 한다. 

나의 인상은 어떤가? 어떤 얼굴을 가지고 사는가? 나의 인생여정과 성격과 인격은 어떻게 내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가? 그러므로 태어날 때의 얼굴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서 주신 것이지만 그후에는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또한 똑같은 사람의 얼굴도 순간순간 그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 표정이 천편일색이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믿음의 상태나 영적 상태에 따라서 그 얼굴이 변한다. 군에 있을 때에 한 소대의 군종이 있었는데 정말 부드럽고 순하고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자고 찾아갔더니 못간다고 대답을 하는데 깜짝 놀랐다. 그 부드럽고 순한 사람의 얼굴이 돌같이 굳어 있었고 얼굴색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아마 교회에 가는 문제로 누구하고 다툰 모양이었다. 순간 악령이 들고 마귀에 씌운 사람의 얼굴이 저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의 얼굴이 저랬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화가 난 것만이 아니었고 누군가가 무척이나 미워하는 마음과 분노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에 가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나왔다. 

그 다음 날에는 다 풀어져서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지만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때의 놀람과 충격은 잊혀지지를 않는다. 똑같은 한 사람의 얼굴의 그때의 마음의 상태와 영적 상태에 따라서 얼마든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을 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부분에 민감해야 한다. 특별히 평안하고 아무런 일도 없을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고난과 시험이 있을 때에 나의 얼굴이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이다. 즉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 나의 마음의 상태와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데반은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시 스데반을 잡아온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데려다가 위협하고 매를 때려서 내보냈었다. 당시는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을 가지고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이 공의회였다. 그러므로 이 공회의 결정으로 스데반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지금 그는 무슨 잘못을 해서 잡혀온 것이 아니라, 기적과 능력을 행하고 예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이 없었다. 누가 심한 소리를 한 마디만 해도 마음이 상하고 분노하고 조그만 어려움이 있어도 실망이 되고 불안해하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불안해지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 스데반은 이러한 위험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이 보였는가? 천사의 얼굴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이는 평안이 있는 상태이다. 기쁨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로마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 썼는데 4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편지에서 그는 “기쁨”이란 말을 무려 18번이나 썼다. “기뻐하라,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기뻐하고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그는 로마 옥중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항상 기쁨이 충만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스데반은 어떻게 해서 그런 평안이 넘치는 천사의 얼굴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가?
*그는 사명감이 투철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사명감이 분명했고 또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고난이나 시험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피하려하지 않았다. 주를 위해 일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일로 자존심 상하지 말라.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실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었다.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움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고 평안햇던 것이다. 로마서 8:31이하를 보라. 8:37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를 위해 고난당하는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반드시 받아주실 것을 믿었다.

*그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죽어도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었다. 즉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던 것이다. 7:55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다. 그는 돌에 맞으면서도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에 그는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고 밝을 수 있었다.

 천국은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다. 천국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기업이다. 천국은 주를 위해 살고 믿음으로 살다가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다. 처국은 성도의 최후의 승리이다. 성도를 괴롭히는 세상의 권세와 마귀의 세력이 끝장이 나고 성도가 승리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러한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하고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같게 된다. 

나의 얼굴은 어떠한가? 어두운가 밝은가? 어떤 환경과 상황에 있는가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고 내 믿음이 어떤가를 말하는 것이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났다. 내 얼굴은 빛이 나는가 아니면 시커멓게 얼굴색이 죽었는가? 평안과 기쁨이 있는가 없는가? 나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내 얼굴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믿음의 사람, 예수의 사람, 복음의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닌가? 예수 안에 있어서 참 평안과 기쁨이 넘쳐서 아무리 고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천사의 얼굴처럼 그 얼굴이 빛나는 성도들이 되자.

물가에 심은 나무는 더위가 오거나 가뭄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오히려 청청하고 더 푸르르게 뒨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의 소망에 우리의 삶과 믿음의 뿌리를 뻗치고 사는 성도는 언제나 평안하고 즐겁고 기쁨이 넘친다. 

시편 52:8에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고 했다. 시편 92:12이하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고 했다. 푸른 감람나무같이, 종려나무 같이,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푸르르고 결실이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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