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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라보고 믿으면 됩니다 (요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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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고 믿으면 됩니다 (요 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의 성지를 순례하기 위하여 그 전후에 인접한 요르단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르단을 방문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거기에 느보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보산에는 모세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모세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을 출발했던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가나안을 건너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보면 멀리 사해와 여리고 지역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날이 맑은 날은 예루살렘의 감람산 지역까지도 식별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반드시 사진을 찍는 곳이 있습니다. 예배당 마당가에 있는 한 작품 앞입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원래 이곳에 세워질 것은 아니지만 모세를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두 가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놋뱀입니다. 장대를 타고 구불구불 하게 올라가는 커다란 뱀입니다. 거기에 커다란 뱀이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멀리서 보면 조금 화려하게 장식된 십자가입니다. 판토니는 놋뱀과 십자가를 한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놋뱀과 십자가, 십자가와 놋뱀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놋뱀과 십자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놋뱀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놋뱀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I. 광야에서

14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4a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오늘 본문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왜 광야에서 뱀을 들었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성경 민수기 21장 말씀을 펼쳐야 합니다. 민수기 21장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한참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출발하여 홍해를 건넜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먹었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믿음이 없어 광야에서 방황하는 중이었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도 있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죽은 후였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돔 지역을 돌아서가도록 하셨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형제들 끼리 싸우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입장에서는 가까운 길을 두고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동안 수 없이 그랬듯이 또 참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민수기 21:5 말씀입니다.
: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그들의 상투적인 말은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자신들을 꼬여서 데리고 나와서 고생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원망은 이유가 있는 듯도 합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그들이 경험하였던 애굽은 풍요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어느덧 원망과 불평은 그들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는데도 그들은 그것에 싫증을 느꼈습니다.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양파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그들에게 끊임없이 음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들의 신발이 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적인 공급에 감사하는 대신 그들은 끊임없이 원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만 어려워지면 쉽게 원망하고 실망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쉽게 하는 원망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앙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민수기 21: 6 말씀입니다.
 :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습니다. 여기에서 불뱀은 광야지역에서 사는 독사입니다. 이 뱀을 불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붉은 색이라서 불뱀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이에 물려 생겨나는 불같은 고통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원망한 결과로써의 고통입니다. 

     
2. 광야의 불뱀은 저주였습니다.
     
사람을 보면 피해서 숨어야 할 광야의 뱀들이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불뱀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불뱀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겪는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미국 의사 왈리스 박사(W. Wallace)는 위장병의 70%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불안에서 생긴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과격한 말, 불화와 분열 등이 사실은 남과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불안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불안은 자신에게서 나와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불안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독에서 오는 불안이든, 죄책감에서 오는 불안이든, 죽음에서 오는 불안이든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저가 큰 잔치를 마련해 놓고 많은 귀족들과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잔칫날은 아주 좋지 못한 날씨였습니다. 시저는 기분이 몹시 상해 화가 나서 엉뚱한 명령을 부하들에게 내렸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하들은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쏜 화살은 되돌아와서 그들의 머리에 떨어져 많은 중상자가 생겼습니다.
     
어떠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하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원망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와 박히는 화살’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망의 결과로 사람을 물었던 불뱀은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때 불뱀은 머리를 들고 우리를 물어버립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원망할 때 불뱀은 머리를 들고 우리를 물어버립니다. 원망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데 여전히 속이 쓰립니다. 원망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꼬여서 더욱 골치 아프게 합니다. 우리의 입에 원망이 마음에 불뱀이 되어 우리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불뱀을 불러들이지 맙시다.
그런데, 그래도 원망이 생겨서 불뱀이 자신을 물어 고통스럽게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최대 약점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최대의 강점이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원망이 불뱀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본 백성들은 모세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심각한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재앙을 받는다고 깨닫자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모세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재앙을 내리신 분이 재앙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수기 21: 8 말씀입니다.
 :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을 물어서 고통스럽게 하는 그 불뱀을, 다시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불뱀 모양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방 치고는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뱀탕을 끓여 먹어야 한다면 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뱀을 찢어서 상처에 바르면 낫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좀 더 의학적이고 고상하여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하였다면 그럴듯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민수기 21:9 말씀입니다.
 :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은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3.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았습니다.
     
쳐다보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백성의 엄청난 잘못에 하나님은 아주 단순한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 쉬운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쉬운 방법을 주셨느냐고 항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나 쳐다보기만 하면 사는 것이라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무 쉬워서 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간단한 방법을 주셨으면 간단하게 순종하면 됩니다.
     
쳐다보는 자는 살았습니다. 너무 쉽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쳐다보는 자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중요한 법칙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드셨을까요?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있었던 이 사건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II. 십자가에서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3:14절 말씀입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처럼 이와 같이 그렇게 예수님도 들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린다는 말은 놋뱀이 장대에 높이 달린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놋뱀이 장대에 달릴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반드시 그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되셔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들기라고 하였다는 말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장대의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까?
     
우리는 구약성경 시편 14편에서 다윗의 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절망하였습니다(시편14:1-3).
     
시편 14: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다윗은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찾는 자가 없고 다 치우쳐 행하고 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다윗을 절망을 이렇게 인용하였습니다. 로마서 3:10-12 말씀입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울 역시 자신을 포함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볼 때 착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에 비하여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불뱀이 되어 돌아온 자신의 원망에 물려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할 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신약성경 갈라디아 3:13 말씀입니다.
     
갈라디아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은 시신을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나무에 달아 죽일 만한 잘못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시체를 나무 달려 밤을 지내게 하지 말고 그 날에 장사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신 21:23). 예수님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2. 골고다의 십자가는 저주였습니다.
     
광야의 불뱀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내린 저주이듯이 십자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셨던 골고다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온 인류의 저주였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지신 저주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이는’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놋뱀이 들린 것같이 십자가에 들리셔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백성을 물어 고통스럽게 하는 불뱀을 상징하는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처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대신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3.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입니다.
     
단지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나았던 것처럼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쳐다보면 나은 것처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오래 전, 전도 훈련을 받는 중,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전도 한 적이 있습니다. 오십 대 후반의 남자 분에게 ‘사영리’로 복음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한참 동안 제 이야기를 들으시던 그 분이 벌떡 일어나 떠나면서 제게 하였던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받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분 생각에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너무 쉬워서 못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쳐다보기만 하면 사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쳐다보지 않고 죽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바람을 느끼기 위하여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 되듯이 다만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 저의 죄 때문에 저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만왕의 왕 내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같은 나 위해 그 보혈 흘렸네(151장 1절)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151장 2절)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51장 후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의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저주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도 원망하고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회복의 길은 저주의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길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든 뱀을 바라보았듯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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