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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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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 12:1-8)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5월 한 달 동안 절기 설교를 하느라 중단했던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간의 안식일 논쟁입니다. 1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밀밭은 좁고 긴 이랑 사이에 군데군데 통로가 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 밀밭 사이의 통로로 지나가셨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너무도 시장했든지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여행 중에는 이렇게 곤궁한 때가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제자들 형편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부요하고 풍요로운지 모릅니다. 받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먹으며 전도했다!”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밀 이삭을 비벼주면 못 먹을 음식인 줄 알고 먹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밀이나 보리는 그슬려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고픈 시절 그슬려 먹은 밀이나 보리는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이 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2절에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고 항의를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밀 이삭을 가난한 자들이나 나그네로 잘라먹게 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신 23:25절에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낫이나 주머니칼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많은 이삭을 자르지 않고, 단지 소량의 이삭을 손으로 직접 따서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손으로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도적질이 될 수 없었고, 따라서 제지들의 행동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이 안식일에 발생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은 모세의 율법에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유대인들이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안식일의 노동금지 조항을 39가지나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수확하여 들이지 말라 2)키질하지 말라 3)타작하지 말라 4)음식을 준비하지 말라. 5)안식일에 운반 할 수 있는 짐의 표준은 마른 무화과나무 두 송이에 해당 된다는 등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으로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추수 금지 규정을 위반하고, 손으로 비빈 행위는 타작 금지 규정을 위반하고,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부는 행위는 키질 금지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소위 안식일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면 안식을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자동적으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전기의 퓨즈가 나갈 때에 갈아 끼우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런 일이 발생하면 다른 외국인에게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대 나라가 이런 사회인지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즉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범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도 용인한 당신도 안식일을 범한 공범자입니다 하면서 예수님께 항의를 한 것입니다.      

이 같은 바리새인들의 항의를 듣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3. 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놉’ 땅에 갔을 때, 거기 있는 하나님의 집 회막에 들어가서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이 시장하여 떡을 좀 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그 때 아히멜렉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 밖에 없어서 그것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진설병은 성소 안의 떡상에 열두 지파의 수효대로 떡 열두 개를 두 줄로 진설해 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 떡은 매 금요일에 구워서 안식일에 대치하고 거둔 것은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굶어 죽어 갈 때 그 규정과 법을 어기고 죽어가는 사람부터 살린 예가 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존경하는 조상 다윗도 그런 일을 행하였거든, 안식일이라도 사람이 배가 고파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라고 하시면서, 이런 의식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말씀의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인 의미에만 집착해 성경을 오해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성경보다 자기들의 전통을 더 우위에 둠으로 말씀을 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이런 실수를 범하기가 훨씬 쉬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는 성경이 귀하고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인이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한다거나 오해할 소지가 적었지만, 오늘날은 성경이 보편화되어 누구나 쉽게 성경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큰 문제는 성경의 내용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성경의 비밀을 스스로 풀려고 하다가 자칫 이단이 나오기도 하고,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성경을 해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후 3:17절에서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경을 바르게 깨닫게 해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예를 들어서 깨우쳐 주었습니다. 5절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불을 켜는 일이나 짐승들을 잡아 제단에 들어 올리는 등 평상시보다 갑절의 일을 해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없음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안식일에 배고픈 사람들이 생명의 기력을 돕기 위해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정죄하느냐? 고 반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자신들이 율법을 근거로 해서 만든 전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씀에 자신들을 맞추기보다는 말씀을 자신들의 전통에 맞추어 생활하는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은 하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은 말씀을 자신의 삶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말씀에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신앙의 기준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말씀만 골라 순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우리에게 복된 말씀이나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는 말씀일 때는 밑줄을 긋고, 그 말씀을 암송하는 정성을 보이며 말씀이 은혜가 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우리의 위선을 책망하는 말씀이 나오면,  우리의 눈을 돌리고 못 본체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고 지키기 어려울지라도 순종하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봉급생활자가 십일조를 바치고 절기 헌금을 드리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직장인들에게 있어서 쉴 수 있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성전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해 많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그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금을 입혀 치장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신성 모독죄로 규정하여 극형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성전을 귀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건축하는 데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에 있는 그 거대한 성전들은 당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장식하고 꾸민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성전을 짓고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도 그 성전이 무용지물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의 주인이 그곳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사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일 뿐, 하나님께서 거기에만 임재해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분열 왕국 말기의 예루살렘 성전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중심이 아닌, 그 성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특히 그 성전이 예표 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그리스도는 성전의 본질입니다. 때문에 성전은 그 건물 자체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에 미칠 수 없습니다. 집에 거하는 사람보다 그 집이 더 위대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을 중요시하고 존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건물 자체를 신성시하고 꼭 교회에서만 기도하거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에서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전보다 크시고 성전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성전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전 건물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성전보다 크시고 그리고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7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는 호세아 6:6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자비’로 번역된 ‘엘레오스’는 불쌍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향하여 그들을 구제하고자 원하는 호의나 친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의 마음과, 사람에 대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없이 드리는 제사를 싫어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잘못된 신앙 비뚤어진 신앙, 율법적 신앙을 가지면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독선에 빠져 남을 정죄하기 쉽고, 사랑의 손길은 펼 줄 모르고, 남을 비판하며 의의 칼만 휘둘러,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많은 생명에게 상처를 입히는 수가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 예수가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고 중상모략하고 싸우고, 믿음이 약한 형제들의 믿음을 떨어지게 만들고, 천국 문을 가로막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이러한 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와 믿음과 기도와 어떤 법과 전통과 규례에 앞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보다 사랑과 자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의의 칼에는 죽는 자가 많지만, 사랑과 자비의 손길에는 죽어가는 생명들이 많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뉴욕의 시장 중 남달리 유명한 시장으로 알려진 라과디아 씨의 일화입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빵을 훔치다 체포되어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으러 왔습니다. 어찌하여 빵을 훔쳤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울먹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지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빵을 훔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당신의 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벌금 10불을 내시오.” 그렇게 판결을 하고서 그는 자기 지갑을 열어 10불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벌금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처럼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나는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 죄로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벌금을 낼 사람이 있으면 내라고 말하고서 모자를 벗어 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47불을 노인에게 주었고, 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정을 나갔습니다. 잠 11:17절에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최상의 자비는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인의 자비입니다. 남양만에 가서 활빈 교회를 세워 일하고 있는 김진홍 목사님이 있습니다. 한 때 청계천에 있는 판자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면서, 리어카도 사주고, 빵을 먹이고, 병든 자에게 약을 사서 낫게 하는 등,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한 번은 그가 어떤 집을 지나가는데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폐병에 걸려서 약을 못 먹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약도 못 먹는 그를 위해 보신탕을 만들어 먹이고,  개구리를 잡아 먹여 결국은 병이 나았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온 몸에 피를 흘리면서 어떤 여자가 예배실로 들어와, 김진홍 목사님에게 소리를 쳤 김진홍 목재인즉 “당신이 남편의 병을 고쳐 놓으니 매일 술만 마시고 나를 때려서 이 꼴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당신 때문에 내 신세를 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술에 취해 있는 남편을 찾아가서 “아저씨, 제가 아저씨께 약을 사다드리고, 보약까지 만들어 드릴 때는 빨리 병이 나아서 좋은 분 되라고 한 것인데, 이러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가 말하기를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술만 먹으면 주먹이 근질거려서 안 때리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남을 때려 놓으면 돈이 드니까 곁에 있는 아내만 때리게 됩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얼어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화장시키고는 재 한줌을 들고 오면서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에게 빵을 먹이고, 병을 고쳐 주고 했는데, 결국 남은 것이라곤 이 한 줌의 재 봉지뿐이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 체 비참한 생을 마치게 한 저의 허물을 용서 하소서” 하면서 땅에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그 후로는 구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저들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하리라 결심을 했습니다. 오직 복음을 주는 것만이 최상의 자비요, 궁극적적인 선이란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점을 명심하여 힘써 복음을 전해서 최상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자비는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자비는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비의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를 모르신다면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마땅한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 이 자비를 경험하시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자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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