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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교회 (요 7: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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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교회 (요 7:36-39)


며칠 전에 동물의 왕국을 보니까 아프리카의 어느 호수가 비쳐졌습니다. 제법 크게 느껴진 호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온통 호수 전체가 하마로 가득차 있는 정말 진귀한 풍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물이 부족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계속 비쳐지는 광경을 보니까 그 덩치가 큰 하마가 수도 없이 말라가는 호수 안에서 조금 더 자기 자리를 확보하느라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하더라구요. 마침내 그 호수가 마르자 그 하마의 엄청난 행렬은 물을 찾아 생사를 건 이동의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도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체도 80%가 물입니다. 물과 생명은 관계가 있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소성함을 입는 것에 반해, 물이 없으면 생명이 살 수 없고 결국에는 메마른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처럼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에 대한 말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유대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물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으면 그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양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이 없어 다 죽어 갈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반석을 치게 하여 생수를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나온 생수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초막절 때에 이것을 기념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하얀 성복을 입은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나와 언덕으로 뻗어있는 돌길을 따라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황금으로 만든 물통에 물을 가득히 채운 다음 다시 성전의 제단 앞으로 올라옵니다. 제사장들은 제단을 7번 돌면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옵소서”(시 118:25절)을 외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는 길어 온 물을 제단에 붓습니다. 

바로 그때에 실로암 못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에 붓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절) 얼마나 장엄한 멧세지입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가 기다리던 복음입니까? 이 세상, 사람 가운데서 이처럼 장엄하고 분명한 멧세지를 가지고 사람들을 초청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목마른 인생들에게 그 목마름을 해갈 시켜 주겠다고 외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시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목마름이 깊어가는 시대입니다. 사실 시대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현대인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목마름의 문제입니다. 문화수준이 발달하여 이제는 만족하고 살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만족은커녕, 답답함과 목마름이 더해집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전1:8절에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나 귀는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헤밍웨이라는 작가를 알 것입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을 거머 쥘 만큼 탁월한 명성을 지닌 사람이었고,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라라는 작품들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심금을 울려 줄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1961년 그는 62세의 나이에 사냥용 엽총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인기도 얻었고 노벨상이라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항상 공허했습니다. 그의 유언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필라멘트가 끊어져버린 텅 빈 전구와 같이 공허하며 고독하다.”    

그는 세상적인 명예나 인기가 그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쾌락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그는 하루에 세 번씩이나 성관계를 가질 정도로 성적인 쾌락에 도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쾌락도 그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네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 어떤 결혼에서도 그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남이 모르는 마음의 공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죽어라 달려가기도 합니다. 명예를 얻으면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쾌락으로,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어떤 사람은 출세로 그 공허함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에 있는 그 공허함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으로 갖다 부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잠시잠간 후면 또다시 공허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마음의 공허감을 채우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열심히 나옵니다. 열심히 봉사도 하고, 열심히 찬송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뭔가 만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종교나 그 어떤 종교적인 열심으로도 그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공허감을 채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종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예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열심은 우리를 여전히 공허하게 만들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37-38절에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단어입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주님은 조건을 달지 않고 누구나 환영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무엇입니까? 본문 39절에서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흘러납니다. 

그 생수의 강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환상을 연상케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성령에 이끌리어 에스겔이 성전에 들어갑나더, 그런데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요. 아주 작은 물인데 이 물이 동편으로 흘러갑니다. 예루살렘 동쪽은 유대광야이고, 유대 광야를 넘어서면 사해에 이르게 됩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곳으로 흘러갑니다. 처음에는 문지방에 흐르는 작은 물이었는데, 조금 지나 가보니까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조금 더 가보았더니 물이 무릎에까지 차올랐고, 조금 더 가 보았더니 이제는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헤엄쳐서도 쉽게 건널 수 없을 만큼의 큰 강물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었던 땅이 회복되고, 메말라 죽어가던 나무들이 되살아나 사시사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죽음의 바다가 생명을 얻어 고기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물론 이것은 에스겔이 본 환상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환상이 곧 이뤄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 성령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과 같은 작은 생명수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죽음의 땅 사막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고, 그 물이 죽음의 바다인 사해에 닿자 죽음의 바다가 살아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갈한 심령을 채워줄 유일한 생명수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심령에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케 됩니다. 텅 빈 마음으로 허전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마음에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에 하늘의 은혜와 꼴로 흡족하게 채워주십니다. 이런 은혜를 누구에게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하십니까? 목마른 사람입니다. 

목마르기에 예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목이 말라 생명수 되신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이사야 44:3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마음이 갈한 자에게 하나님의 신 성령이 임합니다. 목말라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동성 교회가 속한 이 광진구는 축복받은 도시입니다. 주변을 보면 무엇보다 생명의 젓줄인 한강을 끼고 있지 않습니까? 가끔 양평 쪽으로 기도하러가면 남한강을 끼고 가게 됩니다. 또 춘천 쪽으로 가면 북한강이 나오지 않습니까? 가면서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기쁨이 생깁니다. 그래서 강변의 음식점을 가게 되면 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건물이라도 강가에 지어진 건물이 훨씬 더 비쌉니다. 왜 그렇습니까? 강줄기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강줄기를 따라가다보면 거기 여러 군데의 댐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발전을 일으킵니다.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강이 흐르는 곳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강을 국토? 젓줄이라고 합니다. 강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력이 공급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속에 성령이 있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사람들에게도 또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먼저, 성령이 있으면 마음이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던간에 피곤함이 없습니다. 기쁨으로 일들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행5:41절을 보면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니까 그들 심령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니까 어떻게 변했습니까?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피곤하다고 짜증이 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간단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줄기만 남아있고 그 외의 물은 다 말라서 강바닥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41주년의 감격스러운 자리에 왔습니다. 광진구에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지역에 희망을 주고 이 민족과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성장을 해 온 것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예수님이 피 값 위에 세워진 교회, 사도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세웠던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를 열망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쉽게 말해서 사람을 살리는 생명운동과 그들을 세워 사명의 사람으로 한 생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이 엠 바운즈는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가나안 정복의 첫 출발은 교회가 사람에게 투자하고 사람을 키우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임을 알고 여기에 ‘올인’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9세기의 영적인 양대 거인을 들라고 한다면 미국의 디 엘 무디와 영국의 찰스 스펄전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스펄전은 설교의 황태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설교가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의 설교집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종종 여러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읽어 보면 어떤 설교집은 거의 스펄전의 설교집을 베껴 놓다시피할 정도의 책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비난할 의도가 아니라 그 정도로 스펄전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스펄전은 명성과 함께 많은 헌금을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재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스펄젼은 교회를 지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거대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입니다. 19세기에 5천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교회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교회에 몇 명이 모이는 줄 아십니까? 100명이 조금 넘게 모이며, 난방비를 절약하고자 강대상을 중심으로 칸막이를 했다고 합니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던 교회가 이제는 사람이 더 이상 없는 부끄러운 몰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미국의 무디는 배운 것이 거의 없는 구두수선공 출신이었습니다. 

설교할 때 문법에도 맞지 않은 말로 설교해서 많은 사람을 당황시켰다고 합니다. 무디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자 어떤 청년이 “목사님은 오늘 설교에서 150번 이상이나 어법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그래, 내 설교에서 문법은 많이 틀렸다. 그러나 그 부족한 문법의 말로 수 많은 영혼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너는 그 정확한 언어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영혼을 살렸냐!”고 하자 무안해 하면서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일화로 남을 정도로 무디의 문법 실력은 엉터리였습니다. 

종종 ‘이삭의 아들 아브라함이 어쩌고 저쩌고’하면서 설교를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무디에게는 실력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역시 스펄전과 같은 많은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펄전과 같이 교회를 짓는데 그 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디성경학교입니다. 

무디 이후에 미국의 복음주의자의 삼분의 일 정도가 이 학교와 그의 영향권 아래에서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탈봇 신학교 출신의 존 맥아더 목사님입니다. 거대한 교회를 지어 놓고 100년 이후에 1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남은 스펄전의 사역과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는 학교를 남긴 무디의 사역 중 누가 더 옳았습니까? 물어 보나마나 무디가 옳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디는 사람에게 투자하고, 사람에게 집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사람에게 투자하는 사람은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살아있는 교회는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과연 교회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죽음의 바다로 여겨졌던 사해를 살리고 주변에 황무한 곳에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의 보혈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 보혈의 생수가 흘러 들어갈 때 이 땅의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 교인수가 얼마가 되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몇천명이 모이고, 몇만명이 모인다 하더라도 지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많은 숫자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비록 교인은 적다하더라도 적은 숫자의 신앙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세상을 바르게 주도해간다면 그게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게 지역을 살려내는 길입니다. 정말 교회가 문제인 것은 교회를 통해서 더 이상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제자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교회는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가 사람을 세우는 일에 그리고 제자를 만들어서 세상 앞에 복음의 증거자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생수를 마신 자는 주님으로 인해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감격이 없습니까? 기쁨을 잃어버렸습니까? 행복을 잃어버렸습니까? 주여 제게 감격을 주십시오. 성령이여 찾아오셔서 내게 기쁨을 주십시오. 나도 은혜의 강물에 내 가슴이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마다 기뻐서 찬송할 수 있고 기도할 때마다 은혜가 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꽉 차 오르는 기쁨과 행복에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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