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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룩을 주의하자 (마 1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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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을 주의하자 (마 16:5-12)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5-12)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누룩은 그들의 사상(思想)과 교훈(敎訓)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즉 그들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①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율법주의(律法主義)’입니다. 성도여러분, 율법주의란 무슨 뜻인가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율법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율법주의란 율법을 지킴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율법에 목을 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지옥이 예비되어 있으므로 지독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만 판단을 하게 되고, 그래서 남을 엄격히 정죄하게 되고, 자기 자신은 죄책감으로 쌓이게 하면서 동시에 ‘위선’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의 특징은 무자비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엄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교훈에 빠진 사람은 따뜻함이 없고, 용서와 이해가 없습니다. ‘나도 저랬지. 나도 죄인이지 않는가’하는 이해와 포용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사람은 도덕으로, 선한 행동으로,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만큼 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만큼 될 수 없습니다. 살인을 하지 않아서 6계명을 범하지는 않았더라도, 거짓말 하면 8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계명을 범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누군가가 물 밖에서 줄이나, 튜브를 던져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물밖으로 끌어 당겨야 합니다. 즉 인간의 구원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선한 행동으로 구원 쪽으로 다가갑니다. 모든 이단들도 마찬가지로 율법주의입니다. 이단들이 왜 그렇게 열심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실적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구원을 못 받으면 나는 어쩌나’ 하는 극단적인 감정이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영생’을 위해 모든 것을 올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감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그런 마음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이 기쁨과 감격을 누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주를 위해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무엇인가요?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마태 2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마22;23-28)

한마디로 부활 때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고, 천사를 부정하고, 영의 세계를 부정하는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사람들입니다. (행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현실주의(現實主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의 돈’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부자가 되고, 부자로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여깁니다. 

성도여러분, ‘미국은 부자나라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하는 일은 옳습니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가난하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나라입니다. 북한은 악의 축입니다.’이런 말이 옳습니까?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은 책임을 받은 것이지, 많이 가진 사람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나 권력자는 분명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하나님에게 더 많은 것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책임을 진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이란나라는 밤에 외출을 못하는 나라입니다. 지하철도 함부로 못타는 나라고, 이세상의 온갖 범죄가 매시간 일어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또 성경을 보십시오. 선지자들 중에 몇 명이나 부자였습니까? 이사야가, 예레미야가 부자였나요? 예수님께서 부자였나요? 우리는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들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바르게 사는 지, 믿음으로 사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이 가진 것으로 더 많은 죄를 범하지는 않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그들에게 ‘천국(天國)’에 갈 수 있는지도 물어보아야합니다. 심방을 하다보면 나이 드신 분들, 너무 많이 아프신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천국’을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천국’을 말씀드리면 빨리 죽으라는 말로 생각하시기에 참 말하기 어렵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천국설교입니다. 그래서 예배전에 ‘천국’찬송을 하려고 찬송가를 보니... 아는 찬송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 찬송을 거의 부르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장례식때 부르는 몇곡 뿐입니다. 그만큼 천국은 평소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사람이 '운명'을 해야만이 부르는 찬송이 천국찬송입니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 세상이 더 좋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성도여러분, 이 말은 성경의 생각이나 성경의 교훈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에서 오래 버티다가 마지못해서야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고향이며, 정말 사모하고 사랑하는 곳입니다. 눈물과 아픔많은 이 세상을 살면서 언제나 바라고 바라는 곳이 내 아버지 계신 천국입니다. 전도가 무엇인가요? 현실에서 복 받고 오래 오래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이 세상은 내 고향이 아니요, 이 세상은 잠깐이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전도 아닌가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고, 천사를 부정하고, 영의 세계를 부정하는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현실주의(現實主義)’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두개인들의 교훈에 물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이런 생각을 ‘누룩’이라고 표현 하시면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룩이란 부풀어 오르는 특징을 가진 것입니다. 누룩이란 강력한 전염성을 가진 것입니다. 가루 서말 속에는 단지 한 숟가락정도의 누룩이면 됩니다. 조금 만 있으면 가루 서말 모두가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나는 괞찮겠지... 나는 문제없어’ 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은 ‘주의 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혹시 이미 많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에 오염되지는 않았습니까? 이미 많이 부풀어 오른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주의(律法主義)’ 와 ‘현실주의(現實主義)’ 의 교훈에 주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고 그런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자들의 반응을 봅시다.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 말씀의 본뜻과는 다르게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룩이 떡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영적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적인 말씀으로, 먹을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역시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네. 확실히 우리들과는 다르시구나, 가장 중요한 떡을 챙겼느냐고 지적해 주시는구나, 아 우리는 왜 이런 중요한 것을 잘 잊어버릴까?’ 이러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떡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제자들은 육신적인 것을 생각하고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렇생각을 합니까?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누룩’도 당연히 ‘떡’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참 답답한 모습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8~11)  얼마나 더 말해야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는 질책입니다.  제자들은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예로 들어가시면서, 다시 한 번 영적 의미를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이미한 경험들을 통하여 먹는 것에서 벗어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 아니다 하십니다. 먹는 것 즉 육신적인 것에 더 이상 매이지 말고 그것을 넘어 영적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치 복음을 다 깨달은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 3:19 말씀을 통해 “복음이신 그리스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계속 깨달아 가라.”고 간구했습니다.  복음은 반복하여 알아갈수록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들으면 들을수록 더 깊은 맛을 느끼게 됩니다. 이 복음의 맛을 느끼는 만큼 우리의 체질이 바뀌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신앙인격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계속 확장됩니다. 간장그릇만한 것을 꼭 채웠던 신앙이 밥그릇, 국그릇 만하게 되고, 대야 만하게 되고, 큰 항아리 처럼 커지게 되고.. 이런 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계속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솔트라인(salt lin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다로 흐르는 큰 강에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을 이르는 말인데요,  이 솔트라인은 해마다 수시로 변한다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물면 민물의 힘이 약해져 바닷물이 강의 상류까지 침범합니다. 그러면 강 상류의 수원지가 소금기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반대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의 양이 많아지면 솔트라인은 바다 가까이까지 밀려가서 형성되어 수원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영적 솔트라인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지 못하여 영적으로 매마르면 사단의 공격이 바닷물과 같이 우리들 속으로 밀려들어오게 됩니다. 영적으로 죄에 오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할 리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은혜에 가뭄이 들면 이처럼 사단은 항상 우리의 옛 체질과 옛 습관을 건드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늘 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 훈련의 자리, 기도의 자리, 전도의 자리, 교제의 자리를 회복하고, 반복해야 합니다. 이만 하면 되었지..하지 맙시다.  우리 신앙인격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계속 확장되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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