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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물을 파는 자와 제단을 세우는 자 (창 26: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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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우물을 파는 자와 제단을 세우는 자 (창 26:12-33)
  

제가 미국에서 개척 목회를 하고 있을 당시 어떤 젊은 집사님께서 새 집을 사게 되어서 교인들을 초청하여 감사예배와 함께 소위 '집들이'를 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집주인의 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저와 대화를 나누시던 중에 당신 아들이 일단 집부터 한 채 가지고 있어야 다른 무슨 일이든지 안정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집을 살 때에 자기가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새 집을 얻게 된 아들 부부 역시 무척 기뻐하면서 자기네는 평생토록 그 집에서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 뒤에 저는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이삼 년 후에 휴가를 맞이해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 집사님께서 도저히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물론 '평생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집은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집만 한 채 있으면' 다른 일은 안정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집사님의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일단 생업부터 찾고' 나머지 생활 여건은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신앙의 선조 이삭도 한때는 그처럼 자신의 '생업'을 좇아가며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 '축복의 조상'들 중의 한 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기독신자들이 물질생활에서도 진정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 기반을 과연 무엇에 두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사회에서 피곤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12절부터 16절에 기록하기를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그 땅"이라고 한 곳은 이삭이 당시 거주하고 있던 '그랄' 땅인데 거기서 그는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게" 됩니다.
원래 그 지역은 비가 그리 많이 오지 않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런 농업의 대수확과 동시에 "양과 소가 떼를 이루는" 목축업에 이르기까지 큰 물질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5절에 기록된 내용은 바로 이 당시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나중에 18절에 다시 나오는 대로 훨씬 이전 즉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일어났었던 일을 여기에다 첨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선조 제1대였던 아브라함이 죽자 평소에 그의 부(副)를 시기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그 아비의 종들" 즉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종들이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삭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 역시 이삭이 그처럼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시기하여" 이삭을 찾아와서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협박을 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처럼 당시 블레셋 왕을 부르는 직명(職名)으로서 그 이름에만 해도 벌써 한 민족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권위가 충만했습니다.
그에 비하여 이삭은 그저 '우거하는 자'였습니다.
즉 타국에서 온 '이방인'이요 본토 민족의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는 '객'에 불과했으니 사회적으로는 초라하고 불안정한 약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삭은 아비멜렉의 그런 위협 앞에 항의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모처럼 대성을 거둔 농지와 목초지를 다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7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에 "17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18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비멜렉에 의하여 쫓겨난 이삭에게 제일 급한 것은 "우물"이었습니다.
이제 농사는 못 짓게 되었으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양떼와 소떼'를 치는 목축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그 가축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우물'을 확보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 즉 이전에 농사를 짓던 '그랄 평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 즉 아까 15절에서도 나왔던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메웠던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샘 근원"을 얻게 됨으로써 이삭은 이제 자기 생업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잡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지금 이삭이 새로 판 우물은 자기네가 자리 잡고 있던 땅에 있는 것이니 자기네가 임자라고 우기고 나왔습니다.
사실 '목자'란 당시 사회에서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집에서 길리운 자'들로 하여금 칼을 들고 나서게 하여 한바탕 전쟁까지 불사했을지도 모르며,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았고' 얍복강가에서는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기까지 했던' 야곱이었더라면 결코 얌전히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조상 셋 가운데 성격상 가장 온화했던 이삭은 기껏 애써서 파 놓은 우물을 뺏기게 되자 원래는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던 우물을 그저 '다툼(에섹)의 우물'이라고 개명하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래면서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도 또다시 그 우물의 소유권에 대하여 "다투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삭으로서는 참 어이가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번에도 그는 그 우물 이름을 "싯나" 즉 '대적함'이라고 명명하고는 또 미련 없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아무도 "다투지 아니하자" 이번에는 그 우물을 "르호봇" 즉 '장소가 넓다'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아마 하나님께서 이제는 나를 다른 목자들과 다툴 일이 없는 이 넓은 땅에서 번성케 하시려나 보다.'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상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지는 동안 이삭의 인생은 그 얼마나 불안한 것이었겠습니까?
모처럼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면 그것을 시기하는 자들이 세속적 권력을 동원해서 한 순간에 빼앗아 갔습니다.
새로 터를 잡은 곳에서 겨우 기반을 잡았다 싶으면 또 누군가가 법적 시비로 딴죽을 걸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이삭이 그저 '우물' 하나를 얻기 위하여 전전긍긍할 때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추구하고 있던 것과 그의 주변에 살던 불신자들이 추구하고 있던 것이 일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아비멜렉 역시 자기 땅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던 이삭보다 더 '거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그랄의 목자들 역시 '우물'에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자연히 이들과 이삭 사이에는 '생존경쟁의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권력자 앞에서는 일방적인 굴복이요 가장 지위가 낮은 평민들로부터도 억울한 손해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신자라는 사람이 그저 '우물 파는 일'에만 자기 전 인생을 걸고 살아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인생관과 목적이라는 것이 불신자와 똑같은 것이 되면 자연히 그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양쪽 다 돈 자체가 자기 인생의 최고 목적이 되고 그 돈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면 그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신자 역시 불신사회에서 철칙으로 통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른 피해자가 될 뿐이며 '먹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하는' 비참한 인생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하여 여기저기에 '우물을 파 보면서' '르호봇'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그와 똑같은 욕심과 목적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시기'와 '다툼' 속에서 자신의 평생을 피곤하고 불안정하게 살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제단 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불신자조차 괄목상대하게 되는 만사형통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23절부터 25절의 말씀에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 지라 25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삭은 '르호봇'에서 자기 인생의 안정과 축복을 찾은 줄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거기로부터" 즉 르호봇에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에 그는 거기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인생 패턴'은 그가 브엘세바로 올라갔던 바로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즉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평생토록 인도하고 보호하며 축복했던 하나님이니 너 역시 나만 확실히 믿으면 너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는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비멜렉 같은 세속 군주의 권력이나 그랄 목자들과 같은 불신자들의 핍박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수 있는 길은 그저 '그들에게서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바로 '저 위에 계신 절대주권자를 철저히 의지하는 신앙'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축복의 언약을 이삭에게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을 '넓은 곳'에 '우물' 하나만 소유할 수 있으면 그곳에서 '번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살아왔던 이삭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진짜 축복은 어찌하든지 성공해 보겠다고 그렇게 좌충우돌하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걸고 스스로 맹세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진정 확고부동하게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관에 있어서 그처럼 일대전환을 이루게 된 이삭이 그 브엘세바에서 곧 이어서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25절에 나오는 대로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호와께 예배드릴 제단'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런 후에 이삭은 "거기 장막을 쳤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삭이 그 살기 좋아 보이던 넓은 땅 '르호봇'을 버리고 이 '브엘세바'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일 마지막으로 한 일이 바로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던" 일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닙니까?
지금까지 이삭은 어디를 가나 제일 먼저 '우물'부터 팠습니다.
우물을 파서 '샘 근원'을 얻어야 일단 '먹고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되었고, 그 우물을 빼앗기지 않고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다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브엘세바에서는 그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었고 축복의 언약을 받게 되었으며 바로 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을 제일 먼저 쌓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직 그곳에서 '우물'을 파 보기도 전에 아예 '장막'부터 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심'을 믿게 해 주는 제단,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반드시 복을 주어 번성케 해 주실 것이라는 언약'을 확인하게 해 주시는 제단이 이삭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된 이상 다른 것들은 전혀 따지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삭의 인생 패턴이 이제부터 '우물 중심'이 아니라 '제단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자 정말 기가 막히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26절 이하 33절에 기록하기를 "26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 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고 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은 후에 '장막'을 쳐서 정착도 하고 '우물'도 파면서 물을 찾고 있던 이삭에게 느닷없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자기 친구 한 명과 자신의 군대장관을 거느리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이삭으로서는 정말 뜻밖의 방문이었던 까닭에 "당신이 나를 미워하면서 쫓아내는 바람에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제는 나를 찾아왔느냐?"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아비멜렉이 대답한 말의 요지는 "당신과 우리 사이에서 서로 해치지 말자는 평화조약을 맺으러 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비록 거부이기는 했지만 그저 떠돌아다니는 한 이방인에 불과하고, 아비멜렉은 그래도 한 부족의 왕이었는데도 오히려 아비멜렉 쪽에서 제 발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강하고 자신 있는 쪽에서는 약한 상대방에게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삽시다.'라고 저자세로 나갈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비멜렉이 그처럼 멀리서 이삭을 몸소 찾아와서 평화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것은 아비멜렉 쪽에서 이삭에 대한 어떤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말 한 마디로 이삭을 쫓아낼 수 있었던 아비멜렉이 왜 지금에 와서는 이처럼 이삭에게 사정하는 입장이 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본문 28절 상반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이삭을 보고 "너 우리 땅에서 떠나라."하고 쫓아 보내었지만, 그 후에 이삭이 어디를 가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에게는 그가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함께 계시고 그를 크게 복 주시는 것을 아비멜렉도 보고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아비멜렉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내가 저 이삭을 섭섭하게 쫓아내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저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차라리 지금 내 자존심을 좀 접어 두고 이삭과 평화조약을 체결해 놓는 것이 앞으로의 내 신상에 이롭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에 그처럼 머리를 숙이며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이제 그냥 '거부'가 아니라 '제단'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따라서 아비멜렉까지도 이삭을 그야말로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아비멜렉과 평화의 "맹세"를 맺고 그를 돌려보낸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라고 했습니다.
즉 이삭은 그 브엘세바에서도 자신의 생업인 목축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완전히 충족된 것이었습니다. 
  
아까 '그랄의 목자'들과 우물 하나를 두고 티격태격하다가 이곳저곳으로 다른 우물을 찾으면서 살던 때와는 아예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일단 '제단'부터 쌓은 후에 '우물'을 파니까 그처럼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 이삭에게 물질 축복 정도는 아예 자동적으로 활짝 열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그곳을 가리켜 지은 "브엘세바"란 이름은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이라는 뜻인데, 전자라면 바로 아비멜렉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것이며 후자라면 그 브엘세바에서 판 우물이 '일곱 번째로 판 우물'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하여튼 그 '브엘세바'라는 지명은 지금 이삭 자신의 인생에 줄줄이 이어지는 '만사형통'의 축복을 대변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브엘세바에 세워진 제단'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 중심의 생활'입니다.
'교회 중심'은 곧 '성경 중심'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직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을 교회 위에 든든히 세우면 그런 신자는 절로 '언약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의 동행'을 체험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일단 교회를 중심으로 '영혼이 잘 되면' 나머지 '범사는 다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자와 '함께 해 주시는 여호와'께서 그를 '복 주시며 번성케 해 주시는' 일이 자동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로목사님을 통하여 익히 배운 놀라운 '축복의 철칙'이 이것 아닙니까?
바로 '교회가 복을 받으면 그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교회는 우리 기독신자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해 주고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을 재삼재사 확인해 주는 축복의 제단입니다.
  
그러니 항상 교회를 통해서 충만한 은혜를 받고 매사에 교회중심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도는 절로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반면에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고 교회 생활에서 아무 기쁨이 없는 교인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전무할 것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비멜렉'처럼 경쟁 상대를 악착같이 물고 뜯고 늘어짐으로써 자기가 조금 더 잘 살겠다는 협잡꾼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늘 바른 관계를 맺는' 예배자가 되기만 하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신자들조차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유력인사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랄의 목자'들처럼 무슨 정당이나 압력단체를 만들어서 자신의 이권을 사수하겠다는 졸렬한 소인배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저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매사에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사명인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복을 내려 주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느니라.'는 말이 오히려 불신자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오직 철두철미한 교회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매사에 만사형통의 축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비멜렉에게 쫓겨난 후에 '우물을 파는 자'로 살던 이삭에게는 어디를 가도 사회 최하층의 인생들과 다투어야 하는 피곤한 인생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고 '제단을 세우는 자'가 된 후에는 그의 '장막'으로 아비멜렉이 머리를 숙이며 찾아왔고 그가 판 '우물'에서는 아무 빼앗아 가려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물이 펑펑 솟아나왔습니다.
  
불신자들은 '세상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 신자들은 '먼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나머지 복들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2년 전 주일 밤예배 시간에 우리 교회의 어느 젊은 장립집사님께서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가족 모두가 불신인 가운데서도 중학교 때부터 혼자 경향교회에 출석하시다가 결혼도 원로목사님의 주례를 받으셨으며, 정말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끝내 의사까지 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가족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 산본에 살고 있었고 또한 늦게 끝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교회에는 주일예배밖에 출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집사님께서는 먼저 온전한 예배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교회에 가까운 염창동에 있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부터 하셨습니다.
새 직장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만 믿고 결단한 걸음이었는데, 실제로 얼마 후에 좋은 병원에서 훨씬 더 나은 조건으로 근무하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부원장까지 승진했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고 결국 우리 교회의 장립집사의 직분까지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셨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경향교회에는 그처럼 철두철미하게 교회중심, 예배우선으로 살아감으로써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성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과연 어떤 우선순위로 되어 있습니까?
'우물-장막-제단'의 순서입니까?
일단 '직장'부터 구한 후에 거주할 '집'을 마련하고 그 후에 그 근처의 어느 가까운 '교회'를 골라서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물'에 자기 전 인생이 다 달려 있는 줄 알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달라붙는 사람은 평생토록 '아비멜렉'과 '그랄 목자'들과 다투면서 피곤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제단-장막-우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과연 어떤 '교회'에 가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로 믿고 따르는 신앙'을 지킬 수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결정을 내리고, 그런 교회의 모든 예배와 기도회에 부지런히 참석할 수 있는 가까운 지역에 '아파트'나 '셋집'부터 구해 놓고 그런 다음에 '직장'을 찾거나 '사업'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복 주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평생토록 그저 '물질'의 뒤꽁무니만을 좇아가다가 똑같은 목적을 가진 불신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다툼'의 인생으로 전락하지 말고, 오직 '교회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늘 의지함으로써 진정 이 시대의 '축복의 자손'이요 다음 세대 앞에 '축복의 선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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