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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을 받으라 (엡 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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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을 받으라 (엡 5:17-18)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절기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바람처럼, 불길처럼 임한 성령의 오심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에서 성령강림절기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사순절에 비해 그리 강조된 절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기 원하는 성도에게 너무도 중요한 절기입니다.  성령 없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령 없이 성숙한 삶을 이룰 수 없고, 성령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강조해야 할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성령'하면 적어도 우리는 4가지를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먼저 세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마치 물세례를 받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열매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9가지의 열매와 함께 믿음과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은사입니다.  이것은 성령과 함께 우리 안에 은사를 발견하고, 필요한 은사를 부여해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쓰임 받게 됨을 말합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은 갖가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주시는 은사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충만은 지배, 통치를 말합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여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성령 충만을 술 취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고, 통제를 받습니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술의 정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으로 그렇게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지배와 통제를 받아 나의 의지만이 아니라 성령으로 열매와 결실을 보며 성숙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에 대해 성경은 한마디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어의 문법적인 형태를 통해 발견합니다.  이 말씀은 4가지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명령형입니다. 

성령 충만은 명령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형태를 따라 몇 가지로 분류됩니다.  위로와 권면이나 교훈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 놀라운 힘과 능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명령이 있습니다.  명령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받고 안 받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많은 명령이 나옵니다.  가만히 보면 중요한 것은 다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도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도 명령입니다.  이것은 곧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요, 나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 부름 받아 세상을 사는 자들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으로 주시는 것은 모두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나를 위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와 같이 성령으로 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명령을 주신 뜻을 알고 날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현재형입니다.    

성령충만은 언제나 성령세례와 비교됩니다.  성령세례가 구원을 말한다면 충만은 성숙을 말합니다.  성령세례가 신분을 말한다면 충만은 수준을 의미합니다. 성령세례가 영적 갓난아이를 말한다면 충만은 성숙한 어른을 말합니다. 성령세례는 과거로 끝납니다.  한번 받는 것으로 영원합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체험이 필요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한번 예수를 영접하면 더 이상 영접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번 세례가 영원합니다.  한번 주님을 믿고 고백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한번 주님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과거와 현재, 심지어는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성령세례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은 세례와 다릅니다.  성령 충만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충만했다고 그것이 평생을 지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으로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물이 채워지는 것과 같고,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과 같습니다.  배터리가 소모되면 충전해야 합니다.  물이 바닥나면 채워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한번 충전한 것으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번 채워진 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과거사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련한 추억으로 맴도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세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은혜와 감격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성령으로 충만해도 현재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누구라도 넘어집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그것을 발견합니다.  처음 성령으로 충만한 개인과 교회였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이 생겼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히브라파 헬라파의 분열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음에도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한번 성령으로 충만한 과거가 현재까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언제나 현재요, 지금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을 명령형과 함께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귀한 의미를 깨닫고,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복수형입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특권이 아닙니다.  단지 몇몇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만 가질 수 있는 경험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도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고, 모든 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내가 받은 충만을 다른 사람도 받고, 다른 사람이 받은 충만을 또 다른 사람도 경험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 있었던 충만이 한국에 있습니다.  또한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남미에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은 모두에게 임하고, 누구라도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에서 성경은 이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여기에서 주목할 말씀은 ‘그들이’ 라는 말과 ‘다같이’, 그리고 ‘한 곳에’ 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바로 임했습니다.  다같이, 모인 곳에, 모여 기도하는 곳에 임한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개인적으로 임합니다.  특히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마음에 오십니다.  이미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십니다.  그 성령이 내안에 오시면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바로 세워갑니다.  내가 곁길로 갈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안에서 성령은 능력을 주십니다.  때론 지치고 고단할 때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내가 침체하고 낙심할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임하지만, 아울러 공동체적으로 임합니다.  모두가 함께하는 곳에 임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령의 객관적인 체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놀라운 힘과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의 성령이기에 주관적이면 매우 위험합니다.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능력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모일 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의 사건에서 중요한 말이 ‘다’입니다.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성령을 체험했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처음 성령이 임한 곳에 나타난 방언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면서 그들은 모두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방언하고, 다른 사람도 방언을 함으로서 모두가 인정하도록 객관적으로 경험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성령은 그렇게 임합니다. 

성령 충만은 이처럼 모두에게 임합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임합니다.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곳이나, 특정한 시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믿는 자라면 모두가 경험하고, 공유하고, 인정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제 베드로가 경험한 성령 충만을 우리도 경험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성령 충만을 우리도 받습니다.  지금 나만 누리는 은혜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함께 누리는 은혜입니다.  이런 충만한 은혜가 매번, 매순간, 나와 우리 모두에게 불길처럼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넷째는 수동형입니다.  

여기 말씀은 수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령 충만은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나 심지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의 뜻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그렇게 임했습니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홀연히'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홀연히, 갑자기, 사람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오셨습니다.  물론 징조는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사모하였고, 기도하며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성령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정확히 언제 임하는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베드로도 몰랐고, 성도들도 몰랐습니다.  기도하는 자도 몰랐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심각한 신앙의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만약 사람이 기도해서 다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함께 모여 사모했더니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용지물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만약 홀연히 오지 않고, 사람이 힘써서 예상대로 임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교만하고 자랑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 됐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수고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의 계획이 세워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결재가 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역사를 운행하시고,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여기 ‘홀연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부흥과 능력은 성령이 주도한 것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역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성령을 강력히 의지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이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성령 충만을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의 은혜는 언제나 사모하는 곳에 임했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42:1-2)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함같이 우리가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 충만을 사모할 때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농부가 단비를 기다리듯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기다리듯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성령 충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면서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은 언제나 기다림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고, 기대감이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는 바로 그런 곳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는 은혜를 기다리고,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릴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때에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임했던 성령의 은혜는 기도할 때 임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1:14)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은 바로 기도하는 곳에 임한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성령을 체험하는 길이 없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오직 기도할 뿐이어야 합니다.  사모하고 기다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기도하는 곳에 임합니다.  왜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며 살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을 체험할 수 없고, 우리 신앙은 아무것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명령형으로, 현재형으로, 복수형으로, 그리고 수동형으로 주셨습니다.  성령강림 절기를 보내면서 주신 귀한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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