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 (마 28:16-20) - 리더

  • 잡초 잡초
  • 330
  • 0

첨부 1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 (마 28:16-20)


중국 고서 『한비자』라는 책에는 ‘임금이 신하를 다스리는 일곱 가지 방법’을 기술한 다음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제나라 선왕이 악관에게 ‘생황’라는 악기를 불게 할 때는 반드시 300명이 함께 불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남곽처사’라고 하는 사람이 임금을 위하여 ‘생황’을 불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선왕이 크게 기뻐하며 수백 명분의 곡식을 상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죽자 민왕이 즉위했는데, 민왕은 따로따로 한 사람씩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씩, 한사람씩 생황을 불게 하였습니다.  이제 처사가 생황을 민왕 앞에서 연주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사는 생황을 불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여러 번 회피하다가, 결국 도망쳐 버렸습니다. 

“남취(濫吹)”라는 말은 이 우화에서 나왔는데,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체하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또, 이 이야기에서 나온 영어 관용어구가 있습니다. 

He refused to face the music. 직역하면, “그 사람은 음악 대하기를 거부했다.” 정도인데, 실제적인 의미는, “그 사람은 책임 직면을 거부했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볼 때마다, 남곽처사처럼, 여러분의 책임을 직면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도와 헌신이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요,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을 핑계대면서, 책임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서, 어, 목사님 오늘 전도를 강조하시려는구나! 
말씀의 서두를 들으시면서, 전도에 대한 책임을 직면하라고 그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셨다면, 정말 여러분들은 준비된 성도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할 믿음의 일꾼들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며, 마음의 문을 닫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전에 자주 들었던 말씀의 하나로 치부하지 말아 주십시오. 단지, 전도를 강조하거나, 강요하기 위해서 이 강단에 섰다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1절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빈무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듣게 되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무덤을 떠나 달음질 할 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는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잠시 중단되다가 다시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나는 이야기를 16절부터 전개해 갑니다. 하지만,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빈무덤을 확인하였고, 그 날 저녁,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은 그들이 모인 방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평안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의 만남은 갈릴리로 옮겨집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제자들이 수차례 만난 사실을 마태복음은 생략하고, 오늘  봉독한 본문으로 넘어갑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17절에 묘사된 제자들의 의심을 ‘부활을 의심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몇 번이나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는 의심과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의심”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14:31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큰 파도에 빼앗기는 바람에, 물에 빠져 들어 갔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야. 왜 네가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의심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가지는 불신과는 다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의심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반적으로 가지는 회의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 의심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바라보면서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지를 몰라 망설이는 상태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논리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물위를 걷는 능력,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하신 능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현실적인 망설임” 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망설임은 우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믿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을 믿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에, 온전한 헌신과 전적인 순종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적인 망설임.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몇 명의 제자들이 보였던 의심이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사실은, 예수님의 열 한 제자 모두가 현실적인 망설임에 머물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핀 17절에서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로 말미암아 비전채플시대를 여는 이 시점에, 우리 공동체 가운데도 현실적인 망설임 즉, 의심하는 사람들과 경배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믿음의 한소망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의심과 경배가 공존하는 혼란의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는 사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경배의 어원에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공존을 그림으로 묘사해 보면, 예수님을 보며, 앞으로 나아가 경배하는 제자들과, 뒤에 머무르며 망설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 공동체에게로 나아오십니다. 그리고, 의심과 경배의 혼돈에 말씀으로 질서를 부여하십니다.  태초에 존재하던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를 말씀으로 질서의 세계로 만드셨듯이, 의심과 경배의 혼돈 공동체를 말씀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말씀은 혼돈과 무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건설을 반대하는 사단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그 이후에, 하늘과 땅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와 그 권세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권세(엑수시아)라는 말은 권능(두나미스)이라는 말과 바꾸어 사용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두 단어는 확실하게 구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9:1에서는 권세라는 단어와 권능이라는 단어가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두 단어 모두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사용되었습니다. 두 단어 모두 우주적인 힘의 구조에 따르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부여된 힘이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하지만, 권능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는 개인적인 은사의 활용이라면, 

권세는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통치,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권능과 권세를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예를 들면,  5톤 트럭이 교통법규를 어겼을 때, 경찰 뱃지 하나로 5톤 트럭을 세울 수 있는 것은,     국가가 교통경찰에게 그만한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교통경찰이 중국에 가서 중국 교통 상황이 엉망이라고, 경찰 뱃지를 보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세입니다. 권세는 국가 권력의 통치 아래에서 효력을 발생합니다.

권능은 경찰의 손에 쥐어진 총과 같습니다.  강도가 경찰의 권세를 무시하고 덤벼들 때, 경찰은 총을 꺼내어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권능입니다.  

만약, 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나라가 아니, 중국에서도 총을 가진 위력은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그 어니나 ‘하나님 나라’ 라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우리에게 또한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이심을 선포하셨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역사하는 모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우리를 통하여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 나라를 바라지도, 사모하지 않는 이 땅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이며, 이 일은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자 삼는 삶을 세 가지 동사(사실 원어상으로는 분사입니다)로 묘사합니다.

첫째, 모든 민족을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 가지를 하나님 나라와 관련지어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민족을 향하여 가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 땅 끝까지 가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말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삶의 영역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으로만, 제한하거나 축소시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땅 끝을 바라보며, 땅 끝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도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이해하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 나라가 나를 통하여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카오스 이론의 대표적 용어인 “나비효과” 를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는 큰 폭풍이 분다는 이론입니다. 이 나비효과는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땅 끝을 바라보며, 나비의 날개짓처럼 잠시 잠깐 기도할찌라도, 우리의 기도가 많은 영혼의 중보기도로 확장되어, 땅 끝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새로움을 경험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의에 대하여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건을 예전적 용어로 표현한 말이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계속해서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어, 그들이 한없는 용서와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용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게에 분부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은 이 땅에 대한 관심의 눈, 세속적인 눈을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이나 세속적 가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것이 바로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삶입니다.

이러한 우리 믿음의 순종에 대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에서 “세상 끝날까지”라는 말씀을 빼어도 말은 됩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살 것이기 때문에 ‘세상 끝날까지’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는데,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앞에서 살핀 “권세”라는 용어는 개인이 아닌 국가적 통치 개념인 동시에,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둔 종말론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권세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대항하는 반대 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반대 세력이 없어지면, 권세도 더 이상 권세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세는 반대세력이 모두 없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의 때, 즉 “이 세상 끝 날까지” 더욱 더 빛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제자 삼는 삶,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을 사는 우리와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8세기 영적 대각성 운동과 20세기 성령의 역사 사이를 잇는 영적 각성 운동이 19세기 독일에서 있었습니다.  그 운동은 블룸하르트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블룸하르트는 스스로 무기력한 목회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삶이 모든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일상이었기에 별로 문제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틀리빈를 만나면서 새로운 목회로 전향하게 되었습니다.  고틀리빈은 환청과 자기 학대 등  악한 영에 시달리고 있었고, 블룸하르트는 자신의 교구 일이라 습관적으로 가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틀리빈의 영적 투쟁은 갈수록 심해졌고, 이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던 블룸하르트는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주님께 “주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틀리빈과 그 가족에게도 “주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짧지만 간절한 기도 후에, 고틀리빈은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발작이 있을 때마다 블룸하르트는 “주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경험은 블룸하르트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계기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승리자이심을 그는 새롭게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리자이시다”고 선포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권능과 권세가 블룸하르트를 통하여 독일 슈바벤 지역에 흐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제자를 삼는 삶은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기를 사모하며, “주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솔직하게 우리의 믿음을 담아 고백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하여 이 땅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 때,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지는 그 때, 진정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삼는 삶을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매일의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날마다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를 삶의 자리에서 선포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의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 16절에,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갈릴리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곳이며,  믿음의 새 출발을 하는 곳이며, 버린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곳이며, 흩어진 공동체를 재건하는 곳이며, 절망을 바꾸어 희망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갈릴리로 제자들을 부르셨고, 특별히 “지시하신 산”에서 만나셨습니다. 
저에게 이 마태복음 마지막 장면은 아브라함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러한 연상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아담과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베다니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으로 마무리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지경이 아닌, 갈릴리의 지시하신 산으로 마무리 합니다.

지금 마태는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새롭게 시작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부터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하여 새롭게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극적인 인생을 상기시켜 주듯, 갈릴리의 지시하신 산으로 마무리 합니다. 

창세기 22:2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개역한글판)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산,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이삭을 데리고 가는 그 삼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의 순종과 현실적인 망설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제사할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사드릴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이삭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제사드릴 넓은 장소에서 이삭을 잡기 위해서 그를 묶고 칼로 이삭을 내리치려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제사드릴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하나님으로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22장의 사건은 한 사람의 순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순종을 보여줍니다.  약속으로 받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는 결단의 순종. 그러한 현실적 망설임을 딛고 일어서 결단하며 믿음의 순종을 행하는 아버지의 순종을 바라보며, 죽기까지 순종하려는 이삭의 말없는 순종.

이 두 사람의 순종 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면서, 

창세기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크신 이름을 걸고 하시는 맹세, 분명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순종과 축복의 약속이 모리아산에서 있었고, 이 모리아산의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무수히 얻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갈릴리의 한 산에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로 바뀌고, 아버지와 아들의 순종으로 여호와 이레를 온전히 경험한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들, 현재 말씀을 받고 있는 우리의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임마누엘을 온전히 경험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모리아산에서 맺었던 믿음의 후손을 위한 축복의 약속이, 모든 민족에게까지 이르러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한 산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순종을 보면서, 이삭처럼, 말없는 믿음의 순종을 할 때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명령-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제자 삼는 삶을 살라는 말씀 앞에 결단하며 순종할 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별같이 수많은 믿음의 후손을 거느리는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며, 바다의 모래같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영적인 무리들이 따르는, 영적인 리더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칭기스칸이 정복한 땅은 777만 평방 km... 알렉산더 대왕(348만)과 나폴레옹(115만)과 히틀러(219만), 세 정복자가 합친 것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칭기스칸이 이렇게 넓은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요인은 적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통하여,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렸기 때문입니다. 

칭기스칸에게는 4명의 탁월한 장군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장군의 이름은 “제베”입니다.  그는 원래 활을 매우 잘 쏘는 칭기스칸의 적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활로 칭기스칸의 목을 뚫어서 칭키스칸을 죽음의 문턱까지 보냈던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을 칭기스칸은 죽이지 않고, 충성을 맹세한 다음에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너커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화살촉이라는 뜻을 가진 “제베”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관대함에 제베 장군은 감동하여 칭기스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장군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칭기스칸보다 더 위대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의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는 칭기스칸의 제국은 비교도 되지 않는 우주적인 규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희생과 사랑은 칭기스칸의 용서와 사랑이 비교 될 수 없는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며,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너를,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리더로 사용하기 원하노라.”

주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망설임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예배하며 주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의심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 모두를 보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나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제자 삼는 삶, 영적인 리더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충성된 일군으로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제 다음 주일 예배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비전채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생황’을 불지 못하면서 300명의 악사들과 함께 하는 “남취”를 즐기는 남곽처사처럼 살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비전 채플 시대에는 우리 모두 저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천국음악을 연주하는 영적인 리더로 서야 합니다. 한 사람도 자신에게 주어진 이 비전채플시대의 시대적 사명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천국음악을 연주하는 한사람, 한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의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매일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힘들고 지쳐 연약할 때,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일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충성된 일꾼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게 하시고,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이제 비전채플 시대를 맞아,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뒤에 머물러 앉아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새롭게 전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의 복이 저희 심령과 저희 가정과 직장, 사업장에 풍성하게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