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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에게 베푸신 능력 (엡 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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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게 베푸신 능력 (엡 1:15-23)
 
 
제가 최근에 경험한 기적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기적 이야기 하니까 기대가 되죠. 며칠 전에 초등학교 3학년인 남자 조카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서울 이모 저 내일 운동회해요. 저 달리기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겠네 그런데 이모가 몇 등할 수 있게 기도해 주면 되는데 하니까 문자가 오기를 꼴등만 아니면 되요! 이렇게 왔어요. 

그래서 제가 조카에게 전화를 했어요. 몇 명이 뛰는데 하고 물었더니 6명이 뛴다는 거예요. 자기는 일학년 2학년때 다 6등, 꼴등을 했대요. 그래서 이모가 기도해서 몇 등이 되면 되는데 하니까 5등만 하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5등을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조카와 통화하면서 휴가 때라든가 조카 세명을 데리고 운동장에서 같이 달리기를 하면 7살 짜리 조카보다 더 못 뛰는 조카의 모습이 그림처럼 지나갔어요. 그래서 5등 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거라는 조카의 말에 동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모가 내일 새벽 기도에 가서 5등 하도록 기도할께! 약속했어요. 그리고 어제 운동회를 했어요. 그래서 저녁에 전화를 했죠. 조카가 몇 등을 했느냐고 했더니 5등을 했다는 것예요. 그래서 조카가 말한 것 처럼 기적이 일어났는데 조카의 말을 들어보니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을 알겠더라고요. 갑자기 5등하는 아이가 힘들어서 좀 쉬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서 5등을 한 것라고.
아마 하나님이 조카 5등하게 하려고 5등하는 아이의 마음에 좀 쉬고 가고 싶은 마음을 준 거 같아요!!! 이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전에 전 교인수련회때 남성 중창을 하셨던 분들의 찬양이 나는 크리스챤 이라는 내용이었다. 박자는 아주 경쾌하고 밝았지만 사실은 내용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챤으로서의 고뇌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크리스챤으로서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여러분들은 그리tm도인들 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기쁨에 넘치고 확신에 넘치고 승리감에 넘친 모습이 떠오릅니까 아니면 심각하고 침울하고 무언가 걱정 근심이 많은 인상이 떠오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분명 기쁨에 넘치는 모습인데 우리는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깨에 큰 짐을 메고 끝없는 염려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쁨을 조롱하고 고통스런 날들을 살아가는” 같은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의미하는 바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라는 식의 생각을 혹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그는 자신을 생각해 볼때 도저히 풀려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놀라움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행하여 오셨던 일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저의 삶과 저의 삶에서 제가 경험하는 갈등과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삶에서 만나는 문제를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습관의 문제.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 죄의 문제, 육신의 정욕의 문제, 마음 속에 두려움과 의심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단을 대적하는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등. 

우리 성도들이 삶의 여러 정황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을 잘 대처하고 이기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 문제속에 빠져 문제를 잘 대처하지 못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며 기쁨을 삶을 살지 못하며 연약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해서 고민하고(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으로어떻게 대처하는 지 모른다) 또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런 것들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담아두고 괴로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성도들에게 가능한 것을 이야기 하나? 나도 살지 못하면서 나에게도 되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그렇게 살아라고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들에게 주신 권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누리는 문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얻게 되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가난과 질병과 죽음과 죄의 문제 사탄의 문제 등등 더 이상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런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해 주셔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소유한 자로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에게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고 예수님이 하신 것 처럼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1:5-6)

흠정역 성경에는 “ 나라” 대신에 “왕”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왕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는 대사의 권세, 왕자의 권세, 공주의 권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 상속자의 권세로 다스리도록 하셨으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제사장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롬 5;17)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대신하는 왕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세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권세가 무엇인지 성도들에게 주신 능력이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되었다. 벧전 2:9절의 말씀도 이해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승리의 삶이 기독교인들에게 정말 일상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다시 성경을 보니 우리가 성경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묵상없이 읽고 있구나 그리고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사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피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 첫 번째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하여 주십시오 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음의 눈을 밝히사 성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시고 성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해주십시요. 세 번째로 성도들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주십시요 

오늘 세 번째 기도 성도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9절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더 많은 능력이 주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능력이 부단하게 필요로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인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들로 알게 하려는 중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알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며 우리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절)

“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 새번역)

사도는 우리가 어떻게 믿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능력을 힘입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엡 1:7)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1:9)
   
“모든 일을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1:1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나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롬 1;16)

이 말씀들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죄용서 받고 구원받고 천국에 가게 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이 믿을때 한번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줄때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뒤의 모든 삶 가운데도 하나님의 능력의 강력이 계속 역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여러분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여러분됨이 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하신 능력이 여러분 안에 활력있게 역사하여 왔기 때문임을 인식하셨습니까? 그 일이 여전히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라고 인식합니까?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부는 우리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우리들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도 다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강력한 역사하심을 떠나서는 전혀 그리스도인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조차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거의 모두가 당하는 고통의 주요 원인은 우리가 이미 들어온 구원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 함께 구원의 위대함을 누리고 있으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순하게 죄용서 받는 것,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그리스도의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구원이란 영생이란 신적인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신으로 사는 것,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사도가 알기를 원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얼마나 엄청난 능력으로 역사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능력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대적하여 버티고 있는 세력들의 힘 때문입니다. 
우리는 A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 능력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1. 세상과의 싸움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의 사고방식과 세상의 정신을 향하여 부단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교활한 힘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두렵습니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 일서 2;15-16)

우리가 사방에서 만나는 세상적인 것 처럼 영혼에 위험스런 것은 없습니다. 세상적인 것의 교활함 때문입니다. 계층을 자랑하고 사회계급을 자랑하고 외모적인 뽑냄과 겉치레 등을 자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흥미진진 한지 모릅니다. 또한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동참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회가 이 현시점에서 대적하여 하는 가장 큰 싸움입니다.

2. 육신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육신에 대하여도 싸워야 합니다. 육신은 언제나 거대한 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게으름과 태만의 모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1) 습관의 문제- 여러분 끊지 못하는 죄의 문제 어떻게 하십니까? 아무리 여러분이 여러분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것을 끊을려고 해도 끊을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습관의 문제 끊을 수 있다.
   
2) 두려움과 의심의 문제
    두려움아,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너를 거부한다( 사라져라)
    의심아,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너를 거부한다.( 사라져라)


3. 악한 질병.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 우리는 질병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와 졌다고 말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질병의 문제도 해결해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이미 나음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 것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입으로 시인할 때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는 것을 시인할 때 구원에 이른다. 다른 말로 하면 치유에 이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이미 나음을 얻었다” 고백만으로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4. 마귀의 문제

우리들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마귀의 힘이 어떠한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마귀의 활동들이 부단하게 강조되어 경계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마귀의 힘이 어떠하다는 것을 얼마만이라도 인식하였다면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드린 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 을 알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힘이 하나님의 힘 다음으로 세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마귀의 능력은 아담과 하와의 사건에서 가공스러운 명백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둘다 완전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낙원에 있었습니다. 그 낙원은 완전한 환경입니다. 그는 죄를 전혀 짓지 아니한 상태였습니다. 그 안에는 그를 유혹하는 정욕이나 부패의 요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으며 하나님께 아뢰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의(原義)를 부여 받았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섰으며 하나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타락하였습니다. 그가 타락한 것은 바로 그 마귀의  힘과 교활함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우스개거리로만 여깁니다. 마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려고 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완전한 사람이던 아담이 이 강력한 여우에 의하여 패퇴당하고 말았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하여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말고는 우리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 이기게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탄을 실제로 이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방비 상태이지 않습니까? 요즈음 저는 사탄이 얼마나 생각을 통하여 우리도 모르게 교묘하게 우리에게 침투하고 공격하는지 기가 막힙니다. 이 사탄을 이기고 있습니가? 사탄의 책략을 알고 있습니까? 성경은 사탄의 문제를 어떻게 말합니까?

어떤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사탄을 좀 무찔러 주십시오
사탄의 문제에 대하여 나에게 기도하지 말라 나는 이미 그것에 대해 너에게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라고 물었을때 하나님은 야고보서 4;7절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4;7)

우리 성도들은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한다고 하였다 우리를 무서워해서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 때문에요.

“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떠나가라”  

어떤 생각이 여러분을 침투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어떻게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사탄아 나는 너를 거부한다.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다.너는 나를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너의 다스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다스림만 받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한일서4;4)

마귀는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환경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질병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나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 보다 크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며 내 안에 살고 있다
그분이 나를 이기게 하실 것이다.
그분이 나를 성공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신다
그분은 시험과 시련보다 더 크시다.
그분은 내가 당면하는 어떤 능력보다 크시다.
그분은 나를 대항하는 어떤 세력보다 더 크시다.
나는 인생의 모든 위기마다 
그분께서 내 안에서 일어나실 것을 기대한다.

나는 그분께서 내 마음을 조명하여  주실 것을 기대한다.
나는 그분께서 내 몸에 힘을 주실 것을 기대한다.
나는 그분께서 내 영에 방향 제시를 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분은 내 안에 살고 있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살고 있다
나는 질 수 없다 나는 실패할 수 없다.
나는 그분은 믿는다. 나는 그분을 신뢰한다.
나는 그의 능력안에서 강하다 오 영광!  

B. 적극적인 측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소명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도덕법. 산상설교, 내가 온전한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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