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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절대주권 (롬 9: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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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 (롬 9:19-33)

 
어떤모임에 갔더니 한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부에 대한 이야기인데 병원에 어떤 남편이 팔이 부러져 왔습니다. 의사가 치료하면서 왜 팔이 부러졌느냐고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이 남편이 억울하다는듯이 하소연을 했습니다. 못살겠다고그럽니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부인이 저녁에 옷을 입고 외출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디가냐고 물어보다가 맞았답니다. 그래서 팔이 부러졌다는 겁니다. 왜 물어봤냐고 건방지게. 몇일 있다가 또 한남자가 왔는데 다리가 부러져서 왔더랍니다. 의사가 치료하면서 왜 다리가 부러졌느냐고 물어봤더니 직장에서 늦게 퇴근해서 10시쯤와서 밥을 달라고 했더니 밥달라고 했다고 두드려패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겁니다. 

몇일 있다가 또 한남자가 왔는데 허리가 부러져서 왔습니다. 당신은 왜 허리가 부러졌느냐 했더니 이유인즉 자기 부인이 친구들하고 여행을 간다고 그러더랍니다. 자기도 할 일도 없고 해서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했다가 그렇게 맞았다는 겁니다. 그런이야기를 들으면 부인들이 폭군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스개소리로 시대가 얼마나 많이 변했느냐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야기일겁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이들은 하나님이 폭군이 아닌가 왜 자기마음대로 모든일을 다 하시나 이런생각을 할때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무서운 아내처럼 폭군처럼 행동하시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점을 가졌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로마서9장 초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 이방인들의 마음이 열려서 아멘아멘하며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무슨말을 해도 다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고 세례를 받고 성령충만받고 인생이 변합니다. 구원받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정작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그들에게 율법과 은혜와 말씀과 선지자들을 줬는데 이 민족은 하나님을 바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 돌을 던지고 바울을 핍박하고 그러는 겁니다. 

바울은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오죽했으면 동족이 구원받을수만 있으면 자신이 예수그리스도께 저주를 받아서 내가 죽어도 좋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한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끝난것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아 내가 네 후손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네 후손들을 내가 다 복을 주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동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를 십자가에 죽이고 복음을 거부하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다 멸망당할 터인데 하나님의 약속은 끝난것이 아닌가 폐기된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신령한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바울아 네가 구약의 역사를 생각해 봐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있었지 네. 있었습니다. 또 이삭을 낳기전에 조급해서 그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 있었지. 네 있었죠. 그럼 누가 아브라함의 씨가 되었느냐. 보아라. 많은 유대인들이 있을지라도 버림당하는 사람이 있고 택함받는 사람이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중에 이삭만이 진정한 씨가 되고 후계자가 된것이다. 절대로 유대인들이 다 멸망당하는 일은 없을것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또 한가지를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아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지. 네 있습니다. 그럼 누가 버림받고 누가 구원받았니. 네 알죠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에 그런말씀이 있지. 네가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선과악을 행하기도 전에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버렸다 그런말씀을 하십니다. 

바울은 또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할자를 사랑하고 미워할자를 미워하시는구나. 그게 우리가 신학적으로 보면 선택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어떤사람은 이미 버리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심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다 망하는것도 아니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택함받는 자들만 구원받는 것이다하면서 바울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게 선택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또 한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모세와 바로를 생각해 봐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말씀하십니까. 

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긴다. 그게 무슨말이냐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모세가 화가나서 십계명판을 첫 번째 판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앞에 나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다 멸망시키시면 모두가 하나님을 비웃을 것입니다. 

저가 자기 백성을 심판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빼는한이 있더라도 이 백성만은 절대로 심판하실수 없습니다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긍휼히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긴다. 그러니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겁니다. 심판하시려던 마음을 바꾸셔서 오히려 이스라엘을 보존해 주신 겁니다. 

그런가하면 바로의 예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나오려할 때 바로가 그것을 막았습니다. 모세가 가서 10가지 재앙을 행하는데 첫 번째 재앙을 행하면 바로가 겁이나서 돌려보내주겠다고 하다가 또 마음이 변하고 또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자꾸 강팍해지고 완악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완악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11절에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를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랬습니다. 무슨말이냐면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악한 도구로 쓰임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한도구로 쓰시고 어떤사람은 악한 도구로 쓰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8절 19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긍휼히 여길자는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자는 완악하게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10가지 재앙까지 장자의 재앙까지 다 경험하고 바로가 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사람은 이렇게 악한 도구로 쓰임받고 왜 어떤사람은 선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요즘 사극중에 동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십니까. 동이는 참 착하고 지혜로운데 동이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은 장희빈이라나 옥정이라나 중전이라나 또 그의 오빠인 장희재 이런 사람들은 악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가하면 차천수나 서용규 이런사람들은 동이를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드라마속에서도 악역을 맡은 사람이 있고 선한 역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누가 시키는 겁니까. 작가가 시키는 겁니다. 연출하는 감독이 지시하는 겁니다. 너는 착한 역을 하고 너는 악한 역을 해라. 사람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성경을 읽어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와 같은 역할을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세와 같은 역할을 맡기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는 구원받지만 바로는 멸망받습니다. 그럼 이것은 불공평하지 않느냐하는 말입니다. 또 바울이 의문하길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를 책망하지 않으십니까. 19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냐는 것은 책망하신다는 너는 왜 바로 못믿느냐하고 책망하시지 않습니까. 그럼 이게 엉터리 아닙니까. 하나님 불의하시지 않습니까. 폭군같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떻게든 구원받도록 이끌어가서 구원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안믿을려고 안믿을려고 하나님께서 결국 좋은 전도자를 보내서 믿게만드셔서 그를 구원받게 만드신다면 하나님 이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한가지 이야기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20절 21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토기장이의 비유 이것이 예례미야 18장에 소개되는데 원래 이 근원은 예례미야에서 시작합니다. 예례미야시대에 남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직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게 빨리 항복해라. 싸워봐야 별거 안된다. 내가 바벨론을 너희에게 보냈다 하십니다. 

예례미야는 궁금합니다. 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저 악한 백성을 쓰시느냐는 것입니다. 바벨론 저 못된 놈들을 들어 쓰시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바벨론을 강성하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흥황하게 하시고 죄없는 애굽은 포로가 되게하시고 우리는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왜 그러시느냐는 말입니다. 이유가 뭐냐고 묻는 예례미야를 데리고 토기장이의 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을 빚여서 그릇만드는 사람입니다. 보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여서 그릇을 만드는데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토기장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만들다가 마음에 안들면 다 된것을 망치로 깨뜨립니다. 그리고 다시 물어 넣어서 다시 반죽을 해서 다시 만듭니다. 그런데 보니까 하나는 집에서 쓰는 좋은 도자기를 만들고 하나는 집에서 천하게 쓰는 개밥그릇처럼 쓰는 싼것들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것은 귀한것을 만들든 천한것을 만들든 토기장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쓰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누구도 멸망당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어야할 죄의 짐 저주와 죽음은 이미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지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아름다운 구원과 축복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다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하는 은사, 어떤 사람은 달리기를 잘하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씨름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고 다 은사가 다릅니다. 다 각각 다르게 만든 겁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구원과 흥망권세는 누구에게 달려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사람을 흥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시고 패하게도 하시고 성공하게도 하시고 장수하게도 하시고 단명하게도 만드시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라고 합니다. 감히 터치할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불평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출세해서 대통령이 되게 만들고 누구는 이렇게 농부의 삶을 살게 만드느냐.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불평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의 합당한 뜻대로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순종하며 나가면 됩니다. 

구원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 10명이 배가 뒤집어져서 바다에 다 빠졌습니다. 지나가던 구명보트가 왔는데 10명을 다 구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늦게와서 3명밖에 못구했습니다. 7명은 물속에서 못나와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3명중에 내가 꼈습니다. 그럼 우리는 불평할 수 있습니까 구조대원에게 당신 구조하려면 똑바로 해 10명이 빠졌으면 다구해내야지 왜 3명만 구하는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구조대원은 최선을 다했지만 3명밖에 구원을 못했습니다. 나머지 7명은 시간이 없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려면 다죽게 하든지 구할려면 다구하든지 그럴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구조대원이 자기 판단에 따라서 급한 사람들 3명을 구해냈고 나머지는 미처 손이 못가서 죽은 겁니다. 더구나 구해진 사람중 내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만세전에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때가 되어 나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삼아주시고 천국백성 삼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불평할게 없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복을 생각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 살아가다보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은 왜 구원 안하십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유한 권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다닐때 헌법시간이 있는데 그 강사님이 그럽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고유한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직회에서 의논하고 공동의회에서 의논하고 당회 장로님들하고 의논하고 하지만 의논하지 아니하고 담임목사가 고유권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대단한건 아니지만 중요한 겁니다. 오늘 내가 어떤 설교를 할까 본문을 정하는것. 찬송을 몇장을 할까, 설교제목을 뭐라잡을까, 그것은 담임목사의 교유 권한입니다. 내가 오늘 기도를 어떻게 할까 이것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자가 오면 진단을 하고 처방을 줍니다. 그런데 머리가 아파서 오면 두통약을 줘야하는데 두통약이 한가지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한 30~40가지 정도 됩니다. 그건 의사의 마음입니다. 어떤 회사의 약을 주든지 의사의 마음입니다. 아무도 터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죄인이 왔는데 판사가 판결하는데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여러면에서 보고 기준은 있죠. 똑같은 사건을 놓고 어떤 판사는 무죄라하고 어떤 판사는 유죄라하고 그것은 판사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 삶은 바로 하나님이 그를 예비하신 길로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전적으로 하루하루 사는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난폭하고 폭군이면 날 실컷 고생시키고 뺑뺑이 시키다고 돌려 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련이 많은가봐 그리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사람은 평안한데 난 왜이리 고생이 많고 아프고 집안이 복잡하고 왜이러냐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때는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왜냐면 사랑하시는 자를 더크게 쓰시려고입니다. 더 아름다운 인격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아름다운 믿음을 주기 위해서 연단시키시는 경우는 있지만 누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러시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시험하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인생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찌되든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복받기를 원하시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없습니다. 단 어떤 훈련과 연단을 위해서 일시적인 아픔을 줄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선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 외아들 예수그리스도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분이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무엇을 또 아끼시겠습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을 그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시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20절에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불평하느냐 항의하느냐 그런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항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시는데 선하신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설명하는게 있습니다.

22절 23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이 선하신분이라는 것에 대해 동일한 예를 바울은 하나 더 들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 나옵니다. 이 진노의 그릇은 심판받기로 예비된 사람들입니다. 죄를 많이 쌓아서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해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참고 관용하시는 겁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까지냐면 회개할 때 까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범죄할때마다 심판을 받았다면 여기 남아있을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신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구원받기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온전히 보전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것, 내가 지나간 과게에 하나님을 알지못할 때 무수한 범죄의 거역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때 나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늘까지 나를 용납해 주셨다가 오늘 내가 예수믿고 구원받게 하신 것 그것을 생각할 때 생각할 수록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바로 이렇게 진노의 그릇이었고 긍휼의 그릇이었지만 하나님이 오래참으시고 보존하셔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호세아서에 인용된 몇가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4명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의 이름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남편된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과 짝한 유대민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멜이라는 여자가 온전한 여자가 아니고 나가서 외갓남자와 바람을 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게 유대민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이방신들과 짝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낳은 아들의 이름을 로람미라고 지었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시고 둘째는 암미라고 부릅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라는 뜻입니다. 또 그 다음에 아들은 로루하마라고 부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마음을 바꾸시고 르하마라고 부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는 호세아서의 인용된 이야기를 바울은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랫동안 참으시고 기다리사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바울은 소개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27절에 보면 남은자에 대해서 우리에게 또 말씀해줍니다. 남은자라는 것은 아합왕시대에 엘리야 선지자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합왕이 자기 부인 이세벨이 데리고 들어온 우상을 숭배하게 해서 선지자들이 다 타락해서 바알 아세라상만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는 엘리야 밖에 없습니다. 1대 850입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아야 낙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잘 섬기고 우상에게 때묻지 않은 선지자 7천명을 내가 숨겨놓았다. 남은 자들 때묻지 않고 남은 자들을 준비해 놓았다라는 것입니다. 다 멸망한것도 아니고 다 우상숭배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이 깨끗한 7천명을 남겨놓았다. 이것이 남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그것을 바꾸어서 사용합니다. 

유대 민족이라고 다 망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중에서도 반드시 구원받은 남은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유대민족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코 유대민족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다 망하지 않을거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반드시 구원받을 백성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선택의 교리와 하나님의 주권의 이야기를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길로 인도하시고 계획하실지라도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고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받는데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예정이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면 받아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무리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누가 빵을 줬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지 않으면 입에 넣어줘도 씹지않으면 그것은 어쩔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 말을 냇가 까지는 끌고 갈 수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것은 믿음으로 난 의입니다. 그들은 의로운 백성이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범죄를 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럼 유대인들은 왜 실패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하다가 율법도 지키지 못하고 율법의 본정신은 잃어버리고 행위를 의지하다가 결국은 넘어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30절부터 32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난 의로써 그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딪칠것에 부딪쳤다 행위를 의지하다가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는 무엇입니까. 이 부딪칠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구원받을수 있다고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믿는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그러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 거기에 넘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느냐 여기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마치 어릴때 초등학교 교실이 복잡복잡해서 책상들을 세워놨지만 애들이 움직이니까 책상이 삐쭉삐쭉 나옵니다. 거길 막 달려가다가 책상에 걸려넘어진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또 어릴때 지나가던 차 구경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많이 넘어졌습니다. 다시말하면 유대인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 누굽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하다가 돌부리에 걸려넘어집니다. 여기와서 이사람 때문에 시험들과 저 사람 때문에 시험들어가지고 결국은 포기하고 맙니다. 넘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에 걸려 넘어져 버렸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를 많이 안 믿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33절 결론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록된 바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것은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위한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들도 이방인들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게 진리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나눠도 진리는 이것입니다.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지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신학박사일지라도 성경을 다 암송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9장의 결론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탄광의 지하갱도에서 탄을 파는 광부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일입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오려고 하는데 감독관 한 사람이 목사님께 질문했습니다. 목사님은 노력해서 구원받는게 아니라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그러는데 나는 그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고 어떻게 구원받는게 그렇게 쉬울수가 있느냐고 노력을 많이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수만 믿는다고 구원받는냐고 나는 그게 이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여기 지하갱도가 지상에서 100미터 깊이로 내려왔습니다. 그 지하갱도를 연결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기서 걸어서 저기 100미터를 걸어 올라갈 수가 있습니까? 못올라갑니다. 그럼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면 쉽게 올라갈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럼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때 작업이 쉬웠습니까 어려웠습니까. 감독관이 이야기 합니다. 무지무지 어려웠습니다. 지하 100미터를 파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는데 수많은 수고와 땀과 돈이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때 목사님이 설명합니다. 맞습니다. 그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 것은 쉬운것 같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엄청난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지하 100미터에 설치하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희생과 고통을 당하시고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분이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 지상까지 올라가듯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설명하니 감독관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 그렇군요 하면서 이해했다고 합니다.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도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대민족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신것이 아닙니다. 오래참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 믿음의 축복을 다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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