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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에서 물이 나오리라 (출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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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서 물이 나오리라 (출 17:1-7)

 
1944년 작품인 ‘사하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을 한 영화입니다. 2차 대전 북아프리카에서 미군과 독일군이 우물을 가운데 두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은 메마른 우물입니다. 물이 없습니다. 미군은 그 사실을 알고 독일군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목말라합니다. 그래서 물을 줄 테니 무기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권유합니다. 독일군이 정말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데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독일군 포탄이 떨어졌던 자리에 웅덩이가 생기면서 그 웅덩이에 우물물이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죽을 뻔하던 양쪽 병사들이 살게 되었다는 줄거리입니다. 참 기적적인 일도 다 있지요. 말라버린 줄로 알았던 우물에 포탄이 떨어지니까 거기에서 물이 다시 흐르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돌에서 물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돌에서 어떻게 물이 나오겠습니까. 암반수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암반 위에 지하수가 고여 있다는 말이지 암반 자체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은 아닙니다. 석수라는 말도 돌 위에 지하수가 고여 있다는 말이지 돌에서 물이 나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거기에서 물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마실 수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그런 곳에서 온 백성이 먹고도 남을만한 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이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도저히 계시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말씀대로 돌을 치면 거기서 물이 나와서 우리가 살 수 있지만 낙심하고 뒤로 돌아가면 목말라 죽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다고 낙심하고 등을 돌리면 그 사람의 영혼은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마음에 느껴지는 것, 첫인상에 좌우되면 안 됩니다. 첫인상은 늘 살벌하고 늘 삭막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첫인상이라는 것은 늘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신 다음에 제일 먼저 가신 곳이 어딥니까. 광야에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들어간 데가 어딥니까. 광야에요.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기고 돌아왔을 때 그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왕의 시기와 미움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시기 ․ 오해 ․ 그를 죽이려는 음모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갔더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기근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라는 얘기냐.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첫 발걸음을 내딛으려고 할 때 첫인상에 좌우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뿐만이 아니고 천국을 계시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하여 오셨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몇 가지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면 예수님의 주신 단서를 주목해야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은밀히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God who is in secret. 하나님이 은밀히 보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은 은밀히 계신다는 사실이에요. 안 계시는 것 같은데 계십니다. 안 보이는 데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골방과 같은 하나님과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사귐이 있어야 됩니다. 

만일 사람이 결코 고요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늘 누가 옆에 있어줘야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음악을 끄고 TV를 끄고 핸드폰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과 사귀지 않으면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밀히 계시다는 것 때문이 하나님이 없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감각적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에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을 알 도리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목음 14장 9절 말씀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예수님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 하나님의 사랑 ․ 긍휼 ․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 이런 것이 예수님과 다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친절하고 하나님은 엄하고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고 예수님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하나님과 나는 하나이니라’ 이 말은 일치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고 예수님은 저런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하나님은 일치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이에요. 마태복음 19장 17절에 ‘선한 이는 오직 한분이시니라’ 오랜 세월동안 인류는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신의 선의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벌주시는 하나님 ․ 진노하시는 하나님 ․ 무서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선한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은 매우 단순한 진리이지만 획기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는 믿지만 그분이 좋은 것을 주실 줄로 기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복음성가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노래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좋으시다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네 번째 단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God is spirit-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이 당연히 영이지 육이냐.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게 그만큼 당연하다면 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자연을 경배합니까. 태양을 경배하고 바다를 숭배하고 고목나무 밑에 우상을 만들고 자연을 두려워하고 자연을 섬기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영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하다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물론이고 부적이든 효험이 있는 물건이든 뭔가 물건을 만들어서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은 자동차 백미러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사고로부터 지켜 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 십자가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적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그분을 예배하고 영적으로 그분을 의지해야 되는 것이고 거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든지 그분을 알고 경배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또 성경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봄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고 들음으로 온다고 했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기적을 보면 믿음이 생길 줄로 생각하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사도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을 때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깨닫고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이 영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하다면 왜 여전히 사람들은 육신의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까. 인간의 오감, 육체의 감각, 보는 것 ․ 듣는 것 ․ 만지는 것 ․ 맛보는 것 또 냄새 맡는 것 이것이 인간의 오감이지요. 이것이 육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예배하다가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뻐지고 눈물이 나는데 그게 하나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까.’ 은혜는 은혜인데 결과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가 감정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걸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라이팬에 요리를 할 때 프라이팬이 뜨거워지면 계란 프라이를 할 수도 있고 볶음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프라이팬이 뜨거워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를 감동할 때 거기에서 눈물이 날 수도 있는 것이고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고 기쁨을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프라이팬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감정위주의 신앙생활이 습관이 돼버리면 그것처럼 우리를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취약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이제 그런 사람은 마귀가 기분을 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기분을 건드리기만 하면 그 사람은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에 기분이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분이 나쁘면 교회도 안가고 천당도 안갑니다. 기분에 좌우되는 사람. 그래서 대표기를 맡았는데 기분을 나쁘게 만든다거나 설교를 맡았는데 마음을 위축되게 만든다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든가 이 모든 것은 감정을 통해서 오는 것인데 우리가 감정 위주의 삶을 살게 되면 결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감각은 오히려 영적인 진리와 맞설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께 우리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통증이 더 심해져요. 그러면 어느 것을 믿겠습니까. 통증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가나안땅에 들어가 보니까 거민들이 키도 크고 장대하고 힘이 있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어느 것을 믿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것입니까. 

아니면 가나안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할 것입니까. 육신은 영적인 진리와 맞설 때가 많이 있어요.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머무는 성을 포위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까 적군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가 ‘오, 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 선지자가 기도하기를 ‘하나님 게하시의 눈을 밝혀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게하시의 눈을 밝혀주었더니 하나님의 불병거와 불수레가 그들을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이제 어느 것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의 불수레와 불병거를 믿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원수를 믿겠습니까. 

이 믿음의 위대함은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마음이 들뜨고 흥분됐을 때는 다 믿음이 큰 것처럼 보이는데 모세처럼 광야에서 물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아우성치면서 우리에게 마실 물을 달라, 마실 물을 달라. 옛날부터 백성은 불평이 많아요. 리더십이 어려운 이유는 백성들이 불평하고 불신하고 원망할 때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리더십이 어려운 이유는 백성들은 믿음보다는 당장 자신들의 현실에 이끌려서 낙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돌에서 물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돌에서 어떻게 물이 나옵니까.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돌이 상징하는 것은 인생의 현실입니다. 인생의 현실은 돌처럼 딱딱하고 어렵습니다. 지팡이가 상징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물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돌과 같은 현실에서 믿음을 사용했더니 물, 영적인 실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실체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마실 물이 없는 그 상황에 다다른 것이 오히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어요.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경우가 언제이냐. 

물이 없는 돌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그러한 현실에서 낙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뒤로 물러가는 사람도 있고 착하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돌과 같은 인생의 현실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거기에서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느냐에 차익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 많아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착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신실하신 것과 하나님의 신원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엣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얼마나 귀중한 찬송가 가사입니다. 이 눈에, 내 눈에 아무 증거가 아니 보여요. 이 귀에, 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이게 믿음의 고백이지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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