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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 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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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 4:12-25)


왕의 행차 앞에 먼저 가서 나팔을 불며 왕의 행차를 알리는 전령이 있습니다. 그 전령의 나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왕의 행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왕이 도착한 후에 전령은 나팔 부는 일을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왕이 도착했는데도 요란하게 나팔을 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전령의 역할은 왕이 도착하기 전까지입니다. 왕이 도착한 후에는 전령이 더 이상 드러나면 안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전령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타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또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인 주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의 시대는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세례 요한은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요한의 소개를 받으시고 등장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16절에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큰 빛’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요 9:5에도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빛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빛이 밝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변방의 빛이십니다(13-15절).

13절과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죽은 후 가셔서 사신 곳이 갈릴리 가버나움입니다. 13절에서는 ‘스볼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 이라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스볼론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라고 했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한 지파 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두 지파는 갈릴리 지방 북쪽을 분배받아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의 땅과 접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자연히 이 두 지파는 이스라엘의 중심에서 먼 변방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그 두 지파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주류 세력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이런 사람들을 ‘주변인’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marginal people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margin이라는 말은 종이에 글씨가 써지지 않은 가장자리 여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이 안에 text가 써지는 부분을 그 사회의 주류세력이라고 한다면, 여백은 그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땅은 자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솔로몬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회의 주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20년에 걸쳐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건축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람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금을 거의 무제한으로 솔로몬에게 공급했고, 그 모든 공사를 마친 후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갈릴리 땅의 성읍 20개를 대가로 주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물건 값으로 주어버릴 만큼 갈릴리 땅이 중앙으로부터 소홀하게 여겨졌다는 증거입니다. 

그 후에 팔레스타인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갈릴리 지역에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반복되면서 혼혈인종, 혼합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하찮게 생각되던 땅인데, 그나마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 유대인들 보기에 이방인들과 혼혈 족속이 되어버린 갈릴리 사람들은 얼마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겠습니까? 

주님은 지리적으로 변방이었고 사회적으로 비주류 즉 주변인에 속했던 갈릴리에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학교성적은 항상 꼴찌였습니다. 그는 예술학교를 세 번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습니다. 이유는 ‘교육불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통탄했습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바보가 태어났을까” 이 소년이 바로 세계 최고의 조각가 로댕입니다. 
다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멍청한 아이'로 불렸습니다. 산수는 항상 낙제점. 담임선생으로부터 ‘환상에 사로잡힌 저능아’라는 평가를 받고 퇴학당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세계적인 석학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또 한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왜 둘이 되느냐”며 따졌습니다. 어떤 날은 새끼를 낳겠다며 온종일 오리 알을 품었습니다. 담임선생은 그를 ‘혼란스런 문제아’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열세 살 때 퇴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신 7:7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강한 민족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고전 1:26-29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약하고 미련한 사람들, 세상의 변방, 주변인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중심, 세상의 주류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화시키실 때 백향목이나 포도나무, 감람나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열매도 없고 기름도 없고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하찮은 떨기나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찮은 떨기나무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니 위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비록 떨기나무처럼 하찮은 존재하더라도, 스볼론과 납달리처럼 변방이요 비주류, 주변인에 속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가치는 나 자신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빛으로 오신 그분으로 인하여 내 가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구리반지일지라도 물방울 다이아보다 더 가치가 있는 주님이 내게 붙어 있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게 붙는 순간 나의 가치는 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치가 내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고후 4:7에서 이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변방의 빛이십니다.

2. 예수님은 흑암을 몰아내는 빛이십니다(16절).

16절에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고 말씀합니다. 흑암에 빛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어둠이 물러갑니다. 요 8:12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2:46에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물리치시는 분입니다. 

어둠은 죄악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요 3:20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둠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빛을 비추면 됩니다. 빛만 임하면 자연스럽게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빛 되신 주님을 만나면 어둠에서 해방됩니다.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사람도 빛 되신 주님을 만나면 전혀 어렵지 않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디언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캄캄한 굴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고, 별은 해에게 흑암을 보여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빛 되신 주님이 계신 곳에는 어둠이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합니다. 

사울은 주님의 빛을 보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은 빛 된 일을 한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어둠의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는 핍박자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빛 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그에게 주님의 빛이 임하니 그가 새 사람이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둠의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빛이 임한 순간 어둠의 일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빛 된 삶을 시작합니다. 빛 되신 주님을 만난 순간 변화되어 빛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흑암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났을 때 믿지 않는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믿는 예수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알아?”, “몰라.”, “예수님이 설교한 것이 몇 편이나 되는지 알아?”, “몰라.”, “자네는 도대체 예수님에 대해 무얼 아는가?”, “잘 몰라. 그러나 내게 나타나는 일이 많아.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술주정꾼이었잖아. 월급을 모조리 술값으로 쓰느라 빚만 졌잖아. 또 내가 퇴근할 때가 되면 우리 가족들이 나를 피해 여기저기 숨는다고 뿔뿔이 흩어졌잖아. 

내가 얼마나 나쁜 남편이었고 나쁜 아빠였는지는 자네도 알았잖아. 그러나 지금의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빚도 다 갚았다네. 또 내가 아내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퇴근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네. 지금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하다네. 이것이 증거가 아니겠나.” 이분 속에 주님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이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흑암을 몰아내는 빛이십니다. 

3. 예수님은 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나시는 빛이십니다(18-22절).

18-20절에 보면 빛 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빛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택하신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주님은 다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생을 통해서 주님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우리들이 세상의 빛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아와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빛을 발하실 수 있는 발광체이시고 주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주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반사체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님의 빛을 주셔서 세상에 빛을 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빛을 받고 그 빛을 세상에 반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빛을 받으니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세상에 빛을 발한 것입니다. 
새벽기도시간은 하나님의 빛을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 시간도 하나님의 빛을 받는 시간입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주일예배에 가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예배드리며 은혜 받고 기도하다가 ‘예배는 국력이다’라는 영감을 받고는 모든 군대에 주일예배를 시행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군목제도의 시작입니다. 예배가 국력입니다. 예배가 우리의 재산이요 삶의 활력입니다. 예배시간은 주님의 빛을 받는 시간입니다. 빛 된 삶을 살려면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2) 사랑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요일 2:9,10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영성의 최고봉은 사랑입니다. 예언도 능력도 치유도 귀하지만 더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른 것이 부족해도 사랑이 충만하다면 그 사람은 부족한 모든 것 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국방장관인 스탠튼과의 얽힌 사연이 있었습니다. 스탠튼이라는 사람은 국방장관이 되기 이전에는 링컨을 몹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 비방하기를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하면서 ‘고릴라의 원종’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는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고 아브라함 링컨을 보면 됩니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마침내 링컨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링컨은 아무런 말이 없이 참고 또 참았습니다. 마침내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방부장관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누가 그 자리에 적임자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비록 자기를 비방하였던 원수 같은 스텐튼이었지만 국방장관의 자리에 그가 적임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자기를 비방한 사람이라도 그가 적임자이기에 그를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더욱이 링컨은 스텐튼을 존경했으며 예의바르게 대했습니다. 마침내 4년 후에 링컨은 흉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텐튼은 링컨의 유해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면 반드시 커다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링컨은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에 온통 예수 그리스도가 가득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위대한 인격을 가지고 세상에서 빛을 발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3) 착하게 살아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 5:16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을 발하는 방법은 착한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착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모시면 착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 여류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는데 장사가 너무나 잘 되었습니다. 그녀는 장사가 잘되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미우라아야꼬에게 “여보! 우리 가게가 너무 장사가 잘되니 우리는 좋지만 이웃가게 주인들에게는 힘든 일일 것이요. 그러니 우리가 물건을 줄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미우라아야꼬는 남편의 말을 듣고 기도하다가 남편의 말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게의 물건을 줄이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되니 시간이 좀 남게 되고 남는 시간에 소설을 써서 빙점이라는 작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빙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녀는 아주 유명해졌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런 착함이 어디서 왔을까요?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을 모신 부부가 주님이 주신 감동에 순종해서 그런 착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4) 복음을 전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에 복음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둠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벧전 2:9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두운 세상은 밝아지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에도 유익이지만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유익이 됩니다. 미국의 기독교 조사기관인 바나 리서치 센터가 2002년 8월부터 2003년 5월까지 미국 48개주의 성인 4265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조사 결과 같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더라도 전도자들이 비전도자들보다 훨씬 더 신앙과 생활면에서 만족감을 누리고 있다는 조사 결과 나왔습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도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삶이 매우 행복하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74%로 전도하지 않은 사람들의 63%보다 11%포인트나 높았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도 전도자가 78%,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60%를 차지했습니다. 그 조사결과에 의하면 전도하는 사람의 삶이 더 행복하고 신앙도 더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행복해지기 원하면 전도하시고, 신앙이 더 성장하고 싶다면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전도는 교회 성장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단별로는 하나님의 성회 성도의 67%가 전도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으며 오순절교회와 독립교단 교회들의 전도 비율도 높았다. 그러나 침례교는 40%, 장로교는 31%, 루터교는 24%, 감리교는 21%, 성공회는 13% 등으로 나타나 대조를 보였다. 최근 미국내에서 전도에 힘을 쓰지 않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 전통 교단보다 전도에 힘을 쓰고 있는 오순절교회 등이 훨씬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성도들이 전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치료의 빛이십니다(23, 24절).

23, 24절에 보면 빛 되신 주님이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 고쳐졌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모든 앓는 자 즉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주님께서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지금도 치유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한다면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치유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병고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병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 8:16,17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사 53:4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하신 말씀을 마태가 인용한 것입니다. 

벧전 2:24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한 10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형제의 가족들이 우리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족에게 문제가 있으니 가족들의 성격이 좀 예민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별일 아닌데도 시험에 잘 들었습니다. 제가 어느 날 설교 중에 “믿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시험이 되어서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지난 후 장신과 치료를 받던 형제가 제 사무실을 두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교회를 나간 후 3년 동안 6개월씩 6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형제는 저에게 기도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고 그 형제의 역할로 가족들은 다시 우리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와 그 형제 그리고 형제의 가족들은 그 형제의 치유를 위하여 2주간 작정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작정기도를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날 그 형제를 뉘어놓고 기도를 하는데 제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누워있는 형제에게 귀신 3놈들이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환상 중에 귀신을 잡고 그 형제의 몸에서 뽑아내려고 했지만 귀신들은 뽑히질 않았습니다. 저는 환상 중에 귀신들에게 주님의 보혈을 뿌리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떠나라”라고 하면서 귀신을 뽑아내지 세 놈이 “쏙, 쏙, 쏙” 뽑히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사역이 끝나고 보니 형제는 치료가 되어서 정신적으로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 형제는 신학교에 입학을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니 빛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우리를 고쳐 주실 것입니다.
말 4:2에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시는 분입니다. 암을 치료할 때 방사선 치료를 하듯이 하나님은 자신에게 나오는 자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셔서 영의 치료, 혼의 치료, 몸의 치료, 환경의 치료, 관계의 치료, 가정의 치료 등 모든 분야의 치료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와서 치료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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