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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의 때 (막 13: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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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의 때 (막 13:14-27)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종말을 이렇게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초만원 극장 밖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이야!’ 소리를 지르면 많은 사람이 넘어져 발에 밟혀 죽게 될 아비규환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한 배우가 공연을 멈추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차분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밖에서 불이 났습니다. 여러분이 한꺼번에 뛰어나가면 모두 죽습니다. 출입구는 뒤와 좌우에 하나씩 있습니다.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분부터 차례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관중은 그의 말이 연극의 일부인 줄 알고 박수를 치며 웃고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상황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기가 스며들어 오고 불길이 순식간에 극장 안을 뒤덮었습니다.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지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사위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기다가 망했습니다. 종말의 징조가 왔다는 말을 농담으로 흘려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거짓된 가르침이 가득할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3주간 금식을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면 머리도 안 돌아가고 오직 음식 생각밖에 안 나는 법입니다. 3주를 금식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파진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죽을 파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본능적으로 뛰어가서 죽 한 그릇을 마구 퍼먹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속으로 ‘저런! 이제 너는 파문이다. 이제 너는 쫓겨났다’라며 그 제자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봤습니다. 사실 너무나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가 어떤 시대입니까?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습니다. 죽을 먹은 당사자 역시 죽을 주르르 흘리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어색한 분위기를 당장에 깬 사람은 프란체스코였습니다. 그는 자기도 뛰어가서 얼른 죽 한 그릇을 게걸스럽게 퍼먹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실은 나도 배가 무척 고팠어. 오늘로 금식 끝! 너희들도 먹어!”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지도력입니다. 저는 프란체스코가 먹고 싶어서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한 행동의 중심에는 한 명의 제자를 건져내려는 뜻이 담겨있었습니다. 근엄한 태도로 제자의 경솔함을 나무라고 훈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프란체스코는 “나도 죽 먹을래”하면서 같이 망가지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는 제자의 입장에 섰습니다. 규율을 어긴 한 명과 규율을 지킨 다수가 있을 경우 낮아진다는 것은 규율을 어긴 자의 자리에 자기도 뛰어 들어가 같이 서는 것입니다. 그 한 명과 같은 자리에 서주는 것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이런 입장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전혀 실수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런 실수도 할 수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지만 선생이 되어 그런 실수와 허물이 있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과연 그것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만큼 지도자에 대한 잣대는 엄격합니다. 그런데 과연 자신에게도 스스로 그런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요? 아니 앞에서 본 것처럼 그런 실수와 허물을 볼 때 함께 망가지면서까지 다른 사람은 세워가고자 하는 이런 아름다움이 과연 우리들에게도 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까지 자기를 욕하며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을 불러 야단을 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새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하시면서 그들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갈 때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동행하시고 이윽고는 그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사 그들을 위해 축복하심으로 그들의 눈이 열려 알아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비난의 화살을 퍼부은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를 행해서도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라고 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 하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투성이에 겁으로 가득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다시금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도록 내가 네 상급이요 방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방패요 상급이 되심을 믿으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상급만 주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바로 이 세상에 환난의 주로 오실 주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상급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어기면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분명 주님은 그러하기에 우리들에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우리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조차 정작 기도해야 할 때는 졸며 자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힘주신다고 했는데도 믿음으로 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나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핑계 거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주님은 그러니 형편에 따라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아니 세상의 일이란 어떻게 해서든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다짐을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면 무엇보다도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가십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작은 감동, 작은 소리도 놓치지를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던 것들이 깨달아집니다.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만들어줍니다. 옳고 그른 것을 바로 분별하게 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이 우리의 길을 안내하듯이 그렇게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깨어 있어 기도할 때 작은 자도 섬길 수 있게 되며 모든 일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거짓된 가르침에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판단하는 자가 아니요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은혜로 감싸주게 됩니다. 비난의 돌을 던지기 보다는 사랑으로 감싸 주게 됩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나의 연약함을 보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접근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형편을 보지 마십시오. 나의 육체의 연약함을 보지 마십시오. 오직 주신 말씀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십시오. 힘들기 때문에 더욱 깨어 있어 기도하십시오. 모든 예배를 철저하게 지키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평안 가운데 놀랍도록 이기고 또 이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거짓된 가르침으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해도 이렇게 깨어 있어 기도함으로 날마다 말씀과 은혜 안에 바로 서서 살아가며 평강과 감사가 넘쳐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을 보면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있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도 못하고 말씀도 잘 모른다”고 하면서 뒷걸음질을 칩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못합니까? 하다못해 우리들에게는 밥 먹을 힘이라도 있습니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교회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비록 지각을 해도 예배 시간에 조금 졸아도 교회에 안 온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만날 구시렁거리면서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우리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저러면서 뭐 하러 교회에는 나오느냐?” 하는 이야기나 듣는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이 등산 가는 사람보다 낫다는 시각으로 성도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원래 지저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밤낮 지각하고 구시렁거리고 뭐 하나 준다고 하면 하나라도 더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자들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작은 믿음으로 반응할 때 주께서 그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주님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제 작은 믿음을 사용해주십시오. 비록 늦게 나오고 졸기나 하지만 그래도 주님 전을 찾는 이 작은 믿음을 사용해 주시고 남들이 다 불평할 때 불평하지 말자며 분위기 바꾸려고 선뜻 한 마디 던지는 이 믿음을 사용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그런 믿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한데 보다 자세히 보면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갈릴리 어부 출신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풍랑을 매우 무서워했습니다. 그건 어부이기에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풍랑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어부가 아니겠습니까? 기도하라고 했더니 기도하기보다 금세 잠이 들어버릴 만큼 의지가 굳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자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고 헛소리나 하는 도무지 영적 감각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요 떡 가져오는 것도 만날 잊어버리고 누가 가지고 오겠지 하는 부주의한 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예수께서도 또 잊어버렸냐고 꾸중을 하셨을까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지만 이들은 한 번의 실수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마을에 들어가서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해 버리자는 저주의 말까지 서슴지 않던 자들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그것이 부모의 죄냐 자기 죄냐 하는 잘못된 생각을 품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평범하기보다 결함이 있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나약함과 허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변화되었습니다. 비록 허물이 많았지만 제자들은 단순하고 성실하고 소박하며 열정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들어 쓰시기에 좋은 점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결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면모를 가꾸어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둔해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쫓겨난 에디슨을 보십시오. 에디슨은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고 달걀을 품었던 엉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에디슨을 사람들은 위대한 발명왕이라고 부릅니다. 
월트 디즈니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고 신문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편집장에게 그가 그린 그림을 보여줬지만 “이것도 그림이냐?”는 타박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받지 못하고 연거푸 실수만 저지르던 디즈니는 신문사를 나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전 세계 어린이들의 꿈이라는 디즈닐 랜드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가 신문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신문사에서 계속 만평이나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부로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결점을 절망적인 결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손에 붙들리면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진흙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진흙은 쳐서 주무르면 무엇이든 빚을 수 있는 흙입니다. 토기장이가 제일 다루기 쉬운 흙이 진흙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결함도 많았지만 배우려고 하는 겸손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도 실수가 많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실수가 많고 결함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문제를 많이 일으키기도 하지만 무언가 지적해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장점이 있습니다. 실수할 때마다 일일이 지적해도 그 말을 듣습니다. 욕을 해도 듣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완벽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집 부리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무슨 말을 해주어도 안 듣고 자기만 옳다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배우겠다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평범해도 괜찮습니다. 결함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배우려고 하는 진흙과 같은 겸손함이 있으면 주님은 우리를 써주십니다. 우리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꼭대기를 좋아하고 정상을 좋아합니다. 1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다들 외로워합니다. 최정상에는 단 한 사람밖에 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낮은 곳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올려주시면 곧장 수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 낙차를 통해 겸손이라는 원리가 나타납니다. 바닥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댐의 낙차를 이용하는 수력발전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자기를 낮추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법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자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들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압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양떼를 사랑하고 존귀히 여길 줄 압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이 실수 투성이였기에 자기 역시 상한 심령을 경험했기에 연약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사랑으로 권면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래서 기도 못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이렇게 권면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쫓아다녔으면서도 기도하다가 자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도 보지 못한 당신이 기도하다니 너무나 귀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낮아져서 주님의 사람들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럽고 추한 것을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찾는 것은 낮아진 사람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낮아졌다면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습니다. 아무데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낮추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와 비슷한 수준만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일한다면 그 사람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외면당하고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대명사인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기쁨으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수 있었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시며 그들을 세우고 건져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병들고 버림받고 비난 받는 사람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입니까? 이처럼 버림받는 사람들 외면당하는 사람들 어쩌면 가장 바쁜 것 같고 모든 사람이 다 기뻐 찾는 사람이되 스스로는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남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손을 내밀고 도와주면서도 막상 자신을 위해서는 아쉬운 소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혼자 아파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런 아파하는 자들을 위해서 몸소 채찍에 맞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렇게 홀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있는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에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조차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였던 분입니다. 

반면에 거짓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는 자입니다. 희생은 없이 영광만 받으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아닌 열매를 보고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교회와 성도들이 할 일이 바로 이렇게 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타락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의 입장에 서셨습니다. 오히려 허물이 많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셨고 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위해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의 가졌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도록 먹이셨던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손에 있는 아니 우리들이 드리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큰 역사를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보기보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작은 것으로 큰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해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비록 내 가진 것 보잘 것 없고 나 역시 허물 많고 내세울 만한 것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드리오니 나를 받아 주옵소서” 간구할 때 마치 진흙을 빚듯이 나를 빚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질그릇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고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리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달아 주님과 함께 낮은 자리에서 섬기시는 귀한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짝퉁 시대입니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시대입니다. 오히려 가짜가 더 번성하고 더 큰 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짜가 넘쳐난다고 해도 비록 짝퉁인지를 알면서 짝퉁을 찾는 시대라고 해도 결코 짝퉁이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그냥 단순히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누구를 통해서건 예수님이 불러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곧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로 맞이해 들이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게 되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가 날마다 더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이 채워주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을 더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조금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잠시는 어려움도 있고 슬픔과 고통이 있는지 몰라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감사와 찬양으로 넘쳐나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누릴 수가 있습니까? 낮은 자리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이 모든 복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낮은 자리에 서십시오. 그리고 그 어떤 말씀에도 순종하십시오. 깨어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비록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고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환난으로 세상이 가득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지켜주시기 때문이요 그분이 눈동자와 같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자기 백성들을 살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풍랑 속에 제자들을 위해 물 위로 걸어오시듯 그렇게 우리를 살피시며 지켜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물러 그 주님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모두 주님 앞에 기쁨으로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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