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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바람을 보았습니까? (요 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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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람을 보았습니까? (요 3:6-13)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이라는 불리고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스스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를 다니자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성인인데 집에서 찬송가 부르고 성경 읽고 기도하면 되지 무엇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예수 믿는 티내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가 하는 말이 있답니다.
     “배가 고프면 어디에 가지?” “식당에.”
     “뭔가 알고 싶을 때는?” “도서관에 가면 되지.”
     “심심하면?” “극장에 가서 영화 보면 돼”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
     “그럼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셔도 갈증이 나고, 놀아도 심심하고, 배워도 답답하면 어디를 가나.”
     “그게 뭔데?”
     “배고픈 것처럼 갈증이 나는 것처럼 영혼이 굶주렸을 때.”
     
그러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데 그 때 그가 대답하는 말입니다.
     “그런 때 가는 곳이 교회란 말이야.”
     
살아오면서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셔도 갈증이 나고, 놀아도 심심하고, 배워도 답답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니고데모는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권력을 가졌는데도, 제법 많은 지식과 경험이 있는데도, 거기에다가 많은 돈까지 있는데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밥을 먹으면 부르는 배가 있지만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먹어야 채울 수 있는 배가 있지만 오히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배울 수 있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배울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I. 세계

세계(世界)란 무엇일까요?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세계는 ‘집단적 범위를 지닌 특정 사회나 영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세계의 계(界)는 경계를 가리킵니다. 어린이들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어른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남자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여자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특징에 따라서 서로 다른 세계로 구분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어떤 세계가 있습니까?
6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6a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이란 사람의 살(flesh)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육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있는 인생의 부패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인간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육으로 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것을 인간적이라고 합니다.
     
1. 인간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닮을 수 있을까요?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빼어 닮을 수 있을까요? 좋은 것 말입니까? 아니, 나쁜 것 말입니다.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이 어쩌면 그렇게 욕을 잘하는지요! 힘들여 가르치지 않아도 나쁜 짓은 왜 그렇게 쉽게 잘 따라 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만이 아니지요! 
     
밥을 먹고 땅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탄식하게 하였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법입니다. 그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그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롬7:21).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은 인간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개가 고양이를 낳을 수 없듯이 인간에게서 태어난 것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다가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에게서는 육적인 자손 이외에 다른 것이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구원은 없습니다.

육의 세계와 구별되는 또 다른 세계는 무엇입니까?
6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6b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의 세계와는 구별 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세계와는 구별 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과는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2.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육이 인간의 본성적인 육체를 가리킨다면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육으로 난 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라면 영으로 난 것은 성령이 낳은 영적인 본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에서 몸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난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령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의 서언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책 제목은 대담하게 붙였지만 나는 아직도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도움이 있으면 나는 그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빛을 향해 더 높은 곳으로 갈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이 글들을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고자 합니다. 
     
이어령은 자신을 지성에서 영성으로 넘어 가는 문지방 위에 서 있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고 지성 너머에 영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간적인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영혼의 갈증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갈증이 곧 구원은 아닙니다.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지성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영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넘어서 영혼을 적시는 생수의 강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인간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세계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II. 실체

7절 말씀입니다.
 :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강력하게 주문하십니다. 그에게 놀랍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놀라운 반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1. 이상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가셔야 했습니다(요 6:15).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시자, 제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요 6:58-66). 그들은 입으로 먹는 떡을 먹기 위해 모여 들었지만 믿어야 할 하늘의  떡을 말씀하시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부자 되세요!’하면 아멘을 안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고개를 숙일 사람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여당과 야당으로 갈려 서로 얼굴을 붉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땅의 것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하늘의 것을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으로 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8절 말씀입니다.
 :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바람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바람이라는 단어와 영이라는 단어(=프뉴마)는 같습니다. 바람과 영은 같은 단어이자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십니다. 바람 소리는 듣지만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증거는 있지만 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볼 수는 없지만 바람처럼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2. 영적인 세계는 실체입니다.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바람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바람은 느낄 수 있는 실체입니다.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 나도 당신도 볼 수 없지 / 하지만 나뭇잎이 흔들릴 때 / 바람은 지나가고 있지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 당신도 나도 볼 수 없지 / 하지만 나무들이 머리를 숙일 때 / 바람은 그 곁을 지나고 있지.
     
누구도 바람을 보지 못했지만 나무 잎이 흔들릴 때면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나무가 머리 숙이면 바람이 나무 옆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미국 매사추세스 병원에서 임종직전의 말기 결핵 환자를 3시간 40분 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35.4그램 줄어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년 반 뒤에도 임종 직전의 다섯 환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숨을 거두는 순간 역시 평균 28.4그램이 줄었답니다. 
     
최근에 스웨덴의 룬데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실험을 해 보았더니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 그램이었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무게일까요?
     
살았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은 겨우 21그램의 차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살았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을 몇 그램의 차이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실체가 있듯이 다른 영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바람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거듭난다든지 영적이라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는 분명한 실체가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적인 세계의 실체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실체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III. 믿음

예수님께서 바람을 비유로 거듭나는 것을 설명하셨음에도,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0절 말씀입니다.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고 하신 것은 그의 영적 무지를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는 선생이었지만 몰랐습니다.
     
1. 지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배워도 알 수는 없는 것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손에 들려주어도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낫을 놓고도 기억(ㄱ) 자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물로 바닷물을 담는 노력에 비유했습니다. 
     
그물을 바다에 던져 놓았다가, 그물 안에 담겨있는 바닷물을 잡으려고 끌어 올립니다. 하지만 그물이 끌어올려지는 순간, 바닷물은 그물 사이로 다 빠져 나가고 도무지 그물로 바닷물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톨스토이는 그물을 바닷물에 담가놓는 수밖에 없다고 답합니다. 바닷물을 잡으려 하지 말고, 그냥 바닷물 안에 담가 놓으면, 그물 안과 밖에 바닷물이 그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사용하면서 톨스토이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포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전 존재로써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노출 시킬 것을 권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라는 그물로는 하나님을 담아 둘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지식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 한계를 알고 자신에게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1b)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12절 말씀입니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거듭남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배워야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식입니다. 지식의 세계는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를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진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러나 믿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수영을 다 배우고 난 뒤에 물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결코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겠지만 물에 뛰어든 사람만이 수영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원하는 사람은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믿으려는 사람이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3b)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b)고 하였습니다.
지식으로 알 수 없는 신앙을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자신을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자신을 기꺼이 맡겨야 하겠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기에 하늘에 올라간 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기에 우리를 하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만약 아직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 당신이 계시다면 나의 영혼의 갈증을 채우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부르짖음 없이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길이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사역한 ‘스티븐슨’ 선교사는 정글 한복판에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짓고 살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뜻밖에도 백인 청년 두 사람이 선교사의 오두막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면서, “저희들은 진스 강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강으로 가는 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는 “유감스럽게도 이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란 청년들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신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인도하여 온갖 식물들로 뒤덮여 있는 정글을 헤쳐가면서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전했습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설명할 수 없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데리고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 다시 하늘에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데리고 가시면 우리는 하늘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원하시는 분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영혼의 갈증이 해결될 때까지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 주실 준비를 하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인도하여 온갖 식물들로 뒤덮여 있는 정글을 헤쳐가면서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길을 전했습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복잡해서 설명할 수 없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데리고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 다시 하늘에 올라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데리고 가시면 우리는 하늘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원하시는 분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영혼의 갈증이 해결될 때까지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 주실 준비를 하고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바람을 보았습니까? 바람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다는 것은 바람을 느껴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을 느끼려면 언덕에 올라가 눈을 감고 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기 원하시면 두 손을 모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육이 아니라 성령으로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여러분에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기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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