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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과 한 걸음 사이에서 (삼상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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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과 한 걸음 사이에서 (삼상 19-20) 
 
 
18장에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세 번 시도했습니다(11, 17, 21). 그 후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윗을 죽이는 일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망과 한 걸음 사이에 있는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사울은 더 이상 비밀스럽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공개적으로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1)고 말합니다.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은 맨 정신일 때조차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다윗을 심히 기뻐”(1)한 요나단은 다윗을 변호합니다.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4-5).

요나단은 다윗을 보호하는 것이 일생의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윗의 중보자가 됩니다. 그의 변호 속에서 다윗은 사울조차 기뻐했던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윗의 행한 일들은 사울에 대해 선했으며 무죄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은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6). 이 말이 진심이라면 다윗의 삶은 사울이 생각해도 흠이 없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요나단에게 살해 의도를 감추기 위한 말이었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한 것이지요. 진심이었을 지라도 이후 쉽게 그 맹세를 깨뜨린 자세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 죽이려고 작심하고 덤벼드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능히 죽일 수 있는 힘과 조직을 갖춘 사람이 공개 석상에서 ‘제거 대상’으로 선포했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요나단이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7a)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지요. 아무것도 모른 채 있다가 꼼짝없이 죽을 뻔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과 연락”(18:1)되었던 요나단을 통해 이 위험을 미리 막아 주셨습니다. 신앙적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님을 향하여 같은 믿음을 가진 동료를 통한 보호였지요. 본인이 위험을 감지하기도 전에 막아주신 보호하심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요나단 덕분에 다윗은 “사울에게로 인도”되어 계속 “사울 앞에” 있었습니다(7b). 대외적으로는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 했고, 개인적으로는 사울을 위한 수금 연주를 계속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다시 사울에게 접했습니다(9). 사울은 손에든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했습니다(10). 다윗이 “사울의 앞을 피하고” “그 밤에 도피”했지만(10), 사울은 암살단을 집에까지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하고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려서, 다윗으로 하여금 “도망하여 피하”게 했습니다(11-12).

미갈은 “우상을”(13) 집 안에 둘 만큼 신앙적으로는 다윗과 하나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삼하 6:16). 요나단처럼 다윗의 신앙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간 다윗의 매력에 끌려 사랑했던 여인이었지요(18:20, 28). 그녀는 체포조에게 “그가 병들었느니라”(14)고 둘러댑니다. 사울이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고 추궁했을 때도,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17)라고 둘러댑니다. 순간적인 재치가 돋보이지만 목숨 걸고 정직하게 조언했던 요나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갈을 통해서도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나단 같은 믿음의 동료뿐 아니라 미갈 같은 불신 가족을 통해서도 다윗을 보호하셨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만 주관하시지 않고 불신자들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본문은 악령까지도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 표현하여 그분의 통치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9). 하나님은 참 성도들로 구성된 ‘은혜의 왕국’뿐 아니라 불신자들과 타락한 천사들이 포함된 ‘권능의 왕국’에서도 왕이십니다. 이를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예배당 안에서는 강하게 통치하시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무력한 분처럼 여기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겠지요. 불신 세계에서도 성도를 보호하는 것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59편은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 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1)라는 간구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납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 비록 요나단과 미갈의 도움을 받았지만, 다윗은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피난처이시며 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고난은 그의 중심에 있던 신앙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고난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고난에 관한 그의 기도와 찬양은 구속사에 귀하게 쓰임 받았지요. 성경은 성도가 받는 고난의 이유를 낱낱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며,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가르치지요(벧전 2:19-21). 고난 받는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고난의 때에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요나단의 우정과 미갈의 사랑이 다윗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원한 피난처와 힘이 되지는 못했지요. 지속된 핍박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가장 친밀했던 신앙 동료, 그리고 아내를 떠나게 했습니다. 더 이상 믿음의 친구와 가족조차 도울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지요. 우정에도 사랑에도 기댈 수 없는 고통스런 이별이었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따뜻한 공간과도, 수많은 시간과도’ 이별해야 할 때, 그것이 얼마나 가슴을 후벼 파는 깊은 슬픔인지는 경험해본 사람이라야 공감하겠지요. 아마 사울의 핍박보다 이별이 더 피를 토할 듯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이별 앞에서는 용사들이었던 요나단과 다윗조차도 함께 울게 되지요(20:41).

한 밤중에 창문으로 겨우 탈출한 다윗은 “도피”하여 사무엘에게 갑니다.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겠지요(18). 그런데 잠시 숨 돌리는가 했더니 사울은 지치지도 않는 터미네이터처럼 그곳까지 체포 부대를 보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20). 마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불려왔던 발람의 마음을 돌려놓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체포하려는 마음을 돌려놓으셨습니다(민 23:11).

세 번의 시도가 똑같이 실패하자 사울은 직접 나섭니다. 이번에는 도착하기도 전에 노중에서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셨고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했습니다(23). 계속 길을 찾아간 것을 볼 때, 이 예언이 자의식을 잃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행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폐위를 선언했던 사무엘 앞에서 왕복을 입고 있지 못했습니다.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지요(24). 하나님께서 사울에게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회개할 수 있도록 여러 번 기회를 주시면서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시는 보호가 없었다면 사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망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비상한 섭리, 곧 기적을 통해 다윗을 보호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다양한 형태들은 단지 다윗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여러 모양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성도는 어떤 막다른 상황에서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단지 환난으로부터 의 지킴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았고 탄식과 고통 속에서 몸의 구속을 기다렸습니다(롬 8:22). 그러면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고 고백했지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고전 1:8).

지독한 괴로움 속에서 요나단을 다시 찾은 다윗은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20:3b)고 하소연합니다. 두려움을 몰랐고 형통하기만 했던 그가 두려움과 절망을 배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 길 낭떠러지 한 걸음 앞에 있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결국 악인의 존재와 악의 상황조차 다윗에게 그리고 그분의 나라에 유익하게 작용했지요.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심을 감사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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