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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사 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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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사 1:10-20)
  

우리나라도 이제는 동남아시아에서는 꽤 잘 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소위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무작정 입국하는 불법 체류자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인가 그런 불법 체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특별사면법을 마련하고 실시한다는 공고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즉 불법 체류자들이 자진해서 신고하기만 하면, 지난날의 불법 입국 및 체류에 대해서는 일절 불문에 붙이고 아무 처벌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따라서 정식 체류 자격도 부여해 주는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불법 체류자들이 그 특별법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대한민국 정부의 선의를 확실히 믿어야 하고 또 자진해서 신고를 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런 특별법 공고가 불법 체류자들을 색출해 내고 처벌하기 위한 함정에 불과하다고 의심하여서 자진 출두하지 아니하면, 그 특별법의 혜택을 받을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쪽에 있던 앗수르 제국이 그 세력을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북조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되었으며, 남조 유다 역시 주전 701년에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온 유다가 거의 황폐화되었으며 그 결과 "딸 시온" 즉 예루살렘만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은"(8절)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실로 유다라는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맞이했으며 백성들은 생존 그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던 이사야는 그 모든 총체적인 국난의 원인이 바로 유다 백성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깨우쳐 주려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래서 그들에게 닥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졌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죄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사면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신자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위기를 당하게 될 때 항상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점검 사항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겉치레와 형식만 남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혐오하시는 예배입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에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선민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던 유다 백성을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 즉 구약에서 그야말로 '악인의 대명사'와 같았던 자들의 이름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이 들을 때에는 펄쩍 뛸 노릇이었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적어도 그 당시에는 둘 다 '똑같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다 백성들의 예배생활이 순전히 '형식'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범죄 행위였습니다.

우선 유다 백성들은 예배라는 것을 그저 "무수한 제물"들만 갖다 바치면 다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수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 등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각종 제물들만 꼬박꼬박 갖다 바치면 완전한 제사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상적으로 드려진 제물이라면 그것이 문제가 될 리가 없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시 유다 백성들이 바치고 있었던 많은 제물들을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제사를 드리러 나아오는 자세부터가 순전히 겉치레만 남아 있는 형식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그런 모습을 두고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얼굴만 잠깐 내밀었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오늘날뿐 아니라 당시 유다에도 수두룩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일이 무척 바쁘지만 그래도 친구의 경조사에 인사치례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잠깐만 들렀다 가는 사람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저 '최소한의 예의'만 가지고 유지해 보겠다는 심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발만 성전 뜰을 한 번 밟고 지나가는' 예배란 교역자에게는 그나마 '출석 체크'를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그런 식으로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을 두고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매주일의 예배와 특별절기까지 꼬박꼬박 지키면서 교적부에 '출석률 A그룹'에 들어가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그처럼 '몸만 잠시 예배당에 왔다가 나가는' 예배생활이란 정작 하나님께로부터는 전혀 인정받을 것이 없는 허례허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형식적 예배'를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분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맡으시는 향기'라고 했는데, 그 냄새조차 '역겹게' 느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드리러 나아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처럼 위선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란 하나님께서 도저히 '눈뜨고 보실 수 없을' 정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한술 더 뜨시면서 그처럼 '겉치레만으로 가득 찬 제사와 절기 행사'들을 받으시는 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까지 토로하셨습니다. 
예배는 원래 하나님과 그 백성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기쁨으로 만나는 교제의 장인데,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그 시간이 지겹고 피곤하게 느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정도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라고, 그야말로 '치를 떠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펴는 것'은 구약에서의 기도 자세입니다.
즉 그 유다 백성들이 아무리 정중한 자세로 오랫동안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 편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눈을 감아 버리시고 스스로 귀를 막고' 계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의외의 말씀이십니까?
유다 백성들은 '제물만 바치면' 자동적으로 열납될 줄 알았습니다.
향만 피우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뻐하실 줄 알았으며, 기도의 말만 내면 무조건 다 들으실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뜻밖에도 '천만에'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라고 다 똑같은 예배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예배처럼 드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예배, 아니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예배까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 대부분이 착각하고 있었듯이, 오늘날도 '자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렸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고 있을 뿐'인 교인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어떤 교인들은 그냥 '구경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극장이나 연주회장의 자리에 앉아서 화면이나 무대 위에 나오는 장면을 감상만 하듯이, 예배당 강단에서 진행되는 순서들을 그저 '보기만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잠시 쉬는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예배 시간에 졸기만 하면서 실제로 육체적으로 쉬는 교인이나, 예배라는 것을 그저 주중에 복잡했던 자기 마음을 잠시 평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교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다고 다고 하는 예배'도 있습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무슨 빚 받을 것이나 많이 있는 사람처럼, 예배 중에 무슨 안수기도 따위를 통해서 감각적인 느낌이 와야 은혜를 받은 것 같고 예배 한 시간 참석하면 그 주중에 당장 뭔가 자기에게 구체적으로 응답되는 것이 있어야 계산이 맞는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예배 정신과 자세가 잘못되어 있는 교인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십니까?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예배생활'은 곧 '잘못된 대신(對神)관계'로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형식적인 예배'나 드리는 교인이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와 비교해 볼 때 그저 '오십보백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교인의 삶에 문제가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축복은커녕 시험과 환난만 계속 닥칠 때에는 일단 자기 자신의 예배생활에서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를 겸손히 살펴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 자복과 회개가 동반된 제사'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은혜로 응답해 주시는 예배가 됩니다.

16절 이하 20절에 기록하기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9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읽었던 15절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이유를 가리켜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피가 가득함'이란 꼭 '살인'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철철 넘치도록 많은 죄가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예배생활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라고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씻는다'는 것은 바로 죄 문제 해결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은유입니다.
더러운 것을 씻어야 '깨끗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예배생활에는 바로 이것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의 제물은 전혀 준비하지 않고 그저 몸만 제사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하의 말씀은 진실한 회개는 그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말'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회개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과거에 행하던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쳐야" 할 뿐 아니라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는" 새 삶이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예수님께서도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고 일깨워 주신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죄 회개'와 '죄 사함'의 문제야말로 예배에, 그리고 당신과의 바른 관계 정립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더욱 강력한 어조로 선포하십니다.
여기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은 피고를 재판정으로 출두시키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세상의 판사로부터도 소환장을 받으면 거부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정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리면 그 누구도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입니다.
즉 피고에게 과연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법적으로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형사재판을 할 때에는 국가 쪽에서 고소인이 되고 그 대표로 나온 검사에게 피고의 범죄 사실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 모든 인간에게 '죄가 있음'을 명백히 '변론'하실 자로서, 그야말로 승소 확률 100퍼센트의 자신만만한 검사와도 같이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죄를 고발하시면, 세상의 어느 누구가 그 예리한 심문을 피하고 그 추상같은 정죄를 반박하여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길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죄를 그토록 엄히 정죄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위한 변호사도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는 놀라운 말씀이 지금 우리를 향하여 조금 전에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라고 추상같이 호출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주홍빛이나 진홍빛의 물감은 둘 다 일단 옷감에 물들이면 쉽게 지워지지 아니하는 도료로 염색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완전 타락'과 '전적 무능력'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와 같이 명백한 죄가 물감색이 좀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눈"이나 "양털"처럼 완벽한 흰색으로 씻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과 '양털'은 두말할 것 없이 순수와 정결의 상징입니다.
비록 물감이 좀 시원치 않다 해도 주홍빛이나 진홍빛이 흰 천에 한 번 물이 들면 아무리 빨아도 그 천이 '눈'이나 '양털'처럼 하얗게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해서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전적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법정입니까?
마땅히 죄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변론과 그에 따른 선고만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그런 정죄는 아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지도 않고 곧바로 '무죄 방면'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오로지 '스스로 씻고 깨끗케 하고자 하는' 죄의 자복과 회개만 있으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유죄 인정'(pleading guilty)만 하면 아무 변론조차 없이 당장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칭의의 선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은 분명히 재판인데 무죄 방면이 보장되어 있는, 실로 신기하면서도 고맙기 짝이 없는 재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이런 재판장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끝까지 추궁하고 싶어 하시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따져들지는 않으신다.(God does not contend with us as though he wished to pursue our sins to the utmost.)"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호출 앞에 사람은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고 하신 대로, 그런 하나님의 '특별 사면'을 믿고 스스로 회개하면서 나아가면 죄 사함은 물론이요 더 큰 축복까지 얻게 됩니다.
반면에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하신 말씀은, 통회 자복하는 심령의 제사를 드리면서 당신께 나아오라는 출두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면 이제는 더 이상 사면의 기회는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결론적으로 선언하고 계시는 대로 지금 하나님께서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라고 우리에게 자진출두를 명하시는 말씀은 '당신 앞에 나아와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의 보장'이 되는 동시에 '끝까지 거부하는 교만한 자에게는 필히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한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와 여러분이 주중에 얼마나 자주 회개를 하고 있겠습니까?
매일 새벽기도를 드린다 해도 주로 '무엇을 달라는' 기도로 거의 다 채워지고 있으니,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짓고 있는 온갖 자범죄에 대하여 꼬박꼬박 회개를 하면서 사는 신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최소한 주일예배 한 시간만이라도 진정 '자복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먼저 선행될 때 비로소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이 진정한 확신과 큰 감격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자진 출두'하고 '유죄 인정'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우리를 정죄할 검사가 아예 나타나지도 않으시며 오로지 우리의 변호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죄에 대한 그 어떤 변론조차 없이 오직 우리는 죄 없는 자라고, 우리는 이미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일사천리로 재판이 진행되면서 즉시 무죄선언의 판결이 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호사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모든 우리의 죄악을 당신의 십자가 대속으로써 이미 완전히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시간을 통하여 바로 이 최고의 은혜를 꼭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없는 예배는 제아무리 감동적인 순서들로 이어지고 풍성한 예물까지 드려진다 해도 실상은 결코 참된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죄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눈처럼 깨끗하게 씻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이 놀라운 십자가 밑으로 부르시는 초청을 듣고 그 앞에 나아가서 '그 보혈로 속죄함을 얻어 자신의 죄가 눈과 같이 희게 되는' 놀라운 은총을 모든 예배 시간마다 충만하고도 뜨겁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이 안보의 위협을 당하게 되거나 경기가 침체하게 될 때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생이 실패의 늪에서 헤어날 줄을 모를 때에 제일 먼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바로 '나 자신의 예배생활을 통한 대신(對神)관계'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어 있으면 출발부터가 벌써 꼬여 있는 것이며, 이것이 풀리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영혼이 잘 되는 자에게 범사의 형통이 따라오게 되는' 길이 활짝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면 돈 벌 시간이 줄어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겨우 한 시간의 예배조차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드리지 않고 있으니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학 1:6-9).
'내가 간절히 기도도 드리고 헌금도 바치는데 왜 내게 더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는가?'라고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축복의 문이 막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제사 자체부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속으로 계산만 하면서 올리는 예배'에 속으실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오로지 "주가 죄를 살피면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그러면서도 솔직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꼭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아무리 '양심적'으로 살고 '준법적'인 사람이라도 해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능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그저 '진실한 회개의 눈물 한 방울', 하나님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강수 같은 기름보다도 더 귀히 여기시는' 이 제물을 모든 예배 시간마다 항상 준비해 와야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아오는 성도는 주님께서 자동적이며 즉각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사죄 선언'의 감격과 기쁨으로 인하여 그 어떤 기도 응답이나 물질 축복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최고의 은혜를 이미 그 예배 시간에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뿐이며 축복의 길을 스스로 막아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통회 자복의 심령'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함께 올리는 예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는 축복'까지 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만 보이고' 성전의 '마당만 밟는' 겉치레만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희게 만들어 주시려고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라고 하시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는' 회개의 제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옴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와 축복을 예배드릴 때마다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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