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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타락한 도시를 위한 중보기도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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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도시를 위한 중보기도 (창 18:22-33)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 사회를 주도하는 장소입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지금 도시로 도시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입니다.  많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곳이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 도시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도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전도는 당시 그 지방의 중심도시였던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주님의 최후 사역은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마감되었습니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께서 오신 곳도 ‘예루살렘’이었고, 초대교회의 사역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마리아와 안디옥 등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를 따라 확장되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 또한 도시 중심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선교지를 보십시오. 에베소,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대표적인 도시들 모두가 바울 선교의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이처럼 도시는 세상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역사적으로나 영적으로 볼 때 도시는.. 좋은 것보다 문제점이 더 많은 곳이고, 하나님의 공의보다 어둠의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장소입니다.  ‘시골’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인심이 떠오르지만, ‘도시’하면 화려한 불빛과 어둠 컴컴한 뒷골목이 떠오르는 타락(墮落)의 장소입니다.  타락한 도시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심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관영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른 도시입니다.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빙산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던 타이타닉호와 같이 자신들 앞에 불 심판이 예비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죄악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죄악의 도성을 심판하기 위해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 앞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의 감동적인 모습을 봅니다.  이제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1. 소돔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22절)   여기 ‘그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이제 그들이 소돔의 죄악상을 직접 알아보기 위하여 소돔으로 향하여 가는 장면은 죄악의 도시 소돔을 심판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심판을 받으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은 사해 연안 싯딤 골짜기에 위치한 다섯 도시 중 대표적인 도시들입니다. 이곳은 요단강의 저지대에 자리 잡아서 물이 풍족했고, 부요와 환락으로 뒤덮여 있어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육신적인 눈에는 이 도시가 마치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와 보였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창 13:10)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 도시는 부패하고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풍요 속에서 썩을 대로 썩은 도시였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화려해 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죄악이 관영했던 곳이었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소돔 에서 가져온 영어 ‘sodomite' 란 말이 同性戀愛者를 뜻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 도시의 타락상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남녀의 性을 뒤집는 잘못된 性입니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질서를 거역하는 범죄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20절)  타락한 땅에는 항상 학대와 폭력이 있습니다. 그 땅의 억울한 사람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하나님의 귀와 눈에 그들의 죄악상이 생생히 드러났습니다.  얼마나 죄악이 가득했는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려는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악의 도성 소돔을 심판하려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어느 곳에나 계시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20절) 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셔서 심판할 소돔을 향하여 가신다고 합니다.   심판하시기 전에 또 한 번 직접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구약에 또 나옵니다.  

노아 홍수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흩어지라고, 온 땅에 편만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반대로 합니다. 흩어지지 않고 모입니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성(城)’입니다.  ‘성(城)’이란 곧 ‘도시(都市)’를 말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 도시를 만듭니다. 당시는 아직도 지구 곳곳에 노아 대홍수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거부를 하는 인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이면 계급이 생깁니다.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여, 평등하게 성과 탑을 쌓았을까요? 아닙니다. 모두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이름’입니다. 몇몇의 소수 지배자들의 이름만을 내는 것입니다. 이미 지배계층과 노예계층이 만들어 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성(=도시)에는 반드시 계급이 생깁니다. 권력과 힘을 몽땅 가진 사람과 아무것도 없이 착취만 당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 ‘성(城)이요 도시(都市)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심판을 초래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11;4, 5) 여호와 하나님께서 눈이 나쁘셔서, 하늘에서는 잘 안보이셔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겠습니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함부로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기 전에 직접 내려오셔서 보시기까지 하십니다. 또한 심판중에서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과는 정 반대로 우리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입만 열면 함부로, 쉽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해 버립니다. 또한 사람은 무자비합니다. 얼마나 잔인한지 모릅니다.  ‘고영순 원장님’의 간증을 통해서도 보았지만 약하고 어린 여자아이에게, 말도 못하는 벙어리에게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했는지..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까?  옛날부터 눈이 두 개요, 귀가 두 개요, 입이 한 개인 것은 두 번 보고, 두 번 들을 때, 말은 한 번만 하라는.. 말을 아끼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정말 쉽게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2.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22절)  죄악의 도시 소돔, 이제 곧 심판의 불이 떨어질    소돔, 거기엔 누군가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죄인에게 심판은 당연한 일이지만.. 심판은 즐거운 일도 아니고,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죄인이지만 죄인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심판을 막을 누군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죄악의 도성을 자기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자비를 부르짖은 ‘중보 기도자’ 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합니다. 그는 그 도시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끝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심판은 말 그대로 ‘끝’입니다. 그 다음은 없는 것이 ‘끝’입니다.  이제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그 도성을 덮어버리면 말 그대로 ‘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23절)  

심판의 시간이었지만 심판받을 당사자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마치 모두가 졸고 있는 깊은 밤에 혼자 깨어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서 있던 자리에서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고, 소돔성을 향한 간절한 심정으로 여호와께 다가갔습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24절)  

그가 이처럼 오십명에서 시작한 것은 소돔과 그 인근 네 성읍들(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에서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열 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을 것입니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 기도는 당돌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간이 어떻게 감히 이렇게 염치없고 건방진 요구를 여섯 번씩이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만큼 아브라함은 간절했습니다. 그는 조카 롯을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여 내 조카 롯은 어떡하나이까?’ 이런 식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중의 심판 받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간절한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기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책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 답이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던 그 때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 희생, 헌신..’이런 멋진 말들이 많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 책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부족합니다. 사람은 아예 죄인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거룩한 존재, 고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구나, 저 사람도 저렇게 힘들고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구나,  나도 저 사람처럼, 죄에 빠졌었지, 나도 저 사람처럼 저렇게 진흙탕에서 뒹굴었지, 나하고 참 같구나...’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나와 저 사람을 둘이 아니라 하나처럼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요,  구원받은 죄인이  아직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을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선민’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선민이었나, 내가 언제부터 열국의 아버지였나. 나도 우상을 숭배했었다. 나도 죄인이었고 지옥 갈 운명의 사람이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닌가?  저 소돔 사람, 저 고모라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얼마전까지 나의 모습이었다. 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저들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한 번 작정하신 일은 변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아브라함의 간절한 간구에 여섯 번이나 바꾸십니다.  주님은 중보 기도자를 존귀히 여기십니다.   중보 기도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중보 기도자의 눈물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할렐루야! 

  3.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도시를 가슴에 안을 사람은 누구인가요? 
 
본문은 중보기도자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소돔처럼 풍요 속에서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거대한 죄악의 도성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최빈국(最貧國)에서 국민소득 2만불이 넘어가는 잘사는 선진국으로 되면서 우리 사회도 어느덧 깊은 죄악으로 뒤덮여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술 소비 세계 1위의 나라입니다. -- 우리는 물 마시듯이 술을 마셔대는  국민입니다. 대학가 앞에 술집과 옷집으로 뒤덮여 있는 곳은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밤에 거리에 나가보십시오. 길거리에서 웩웩거리며 토하는 사람들, 남자에게 기대어 온몸이 풀어져 안기듯 걸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혼율 세계 1위를 다투는 나라입니다, -- 주택가에까지 러브호텔이 버젓이 지어져 성업중입니다. 교회보다 호텔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장사가 되니까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불륜은 이제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애인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딧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현실입니다. 연예인들의 혼전 임신을 최고의 결혼 선물이라고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 나라입니다. -- ‘돈이 최고다’라는 어른들의 배금주의와 쾌락주의는 이제 십대의 아이들에게까지 무작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15,6세의 여자 아이들이 100명이 넘는 어른들과 원조교제를 하다가 붙들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대생이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욕설과 멸시의 말을 당연한 듯이 퍼부었습니다. 미래의 어른을 키우는 학교에서는 교사의 권위는 사라졌고, 오직 성적만이 목표입니다.  돈이면 얼마든지 직장을 옮기고, 돈이면 무슨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법을 세우는 국회로부터 시작하여 사회 모든 영역에서 참 많이 부패해 있지 않습니까? 

성도여러분, 우리 살고 있는 오늘의 이 나라에 눈물의 중보기도자가 필요할까요? 필요 없을까요?  필요합니다. 심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예외가 아닙니다.   도시마다 ‘먹자’ 골목,  ‘씻자’ 골목이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고, 심지어 ‘자자’ 골목이 속속 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방이라도 축제의 시작은 제사입니다. 제사를 지내야만이 축제(인삼제)가 시작이 됩니다. 
이 땅의 밤은 쾌락과 환락으로 깊어가고, 우상숭배와 부패는 이미 소돔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돔 같고 고모라 같은 이 땅을 안고 기도할 아브라함이 나와야 합니다.  이 나라, 이 도시를 가슴에 품고, 피를 토하며 중보 기도하는 제2, 제3의  아브라함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 지켜져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중보기도 없이는 세상은 한시도 살아 있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겔 시대의 하나님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겔 22:30-31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두려운 말씀입니다. 유다 말기 온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순종의 길에 있을 때의 말씀입니다. 왕도, 제사장들도, 선지자들도, 그리고 백성들도 모두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 앞에 노출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시대의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찾다가 못 찾으셨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던 열흘간 그 목사님은 영국인 2명, 벨기에인, 일본인 한명과 함께 광주 전남방직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불안한 날들을 보내었답니다. 당시 회사원이었던 목사님은 엔지니어로서 이들의 통역을 맡아 함께 광주에 내려갔다가 바로 다음 날부터 집밖을 나오지도 못하고 발이 묶였습니다.  모든 언론 정보가 중단되고 공중의 헬기에서 뿌려지던 전단지와 거리의 확성기만 무성하던 날, 총성이 그치지 않은 살벌한 거리들, 지나가는 버스나 무개차에서 흔들어대는 젊은이들의 카빈 소총...   주일이 되어 방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동행 외국인들을 뒤로 하고 인근 어느 교회를 간신히 찾아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 입추의 여지 없이 모여든 성도들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모두 다 비장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의 목사님의 설교 본문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었답니다.  그 연세 높으신 목사님은 설교 시간 내내 오열하면서, “이 광주 도성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피하지 못하고 있노라”고 외치셨답니다. 

오늘은 6월 6일 현충일(顯忠日)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평안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흘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정한 날이 오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소수가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땅을 위하여 가슴 시리게 아파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훗날 하늘나라에서 숨겨진 역사의 모든 뚜껑이 열리고, 모든 과장과 왜곡과 가짜의 베일이 벗겨졌을 때,  우리가 엎드려 기도했던 것들만이 가을 나무에 매달린 풍성한 열매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가슴을 크게 여십시오.  두 팔을 넓게 벌려서 우리의 도시를 품에 안읍시다. 그리고 이 타락한 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합시다.  오늘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기도하는 대사’ 라는 별명을 가진 ‘김하중’씨가 쓴 ‘하나님의 대사’(규장 2010. 1월) 의 내용 중 일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주한 중국대사를 지냈고,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씨의 이 책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분의 기도에 응답하신 많은 내용이 있지만 저는 아주 사소한, 가정적인 기도의 한 부분을 소개시켜드리고자 합니다.    1女 2男를 둔 그분이 아내에게서 큰 아들이 진지하게 여자를 사귀고 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혼자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큰아들이 요즘 여자를 사귄다고 합니다. 그 여자가 제 아들에게 합당한 아이입니까? -- ‘그 아이가 네 며느리다.’ 며칠 후 아들이 아가씨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나는 그 아가씨에게 내 옆에 앉으라 하고 말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아가씨가 내 며느리인가?” “예?” 그 아가씨는 너무 놀라 말을 잊지 못했다. 내가 말했다.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아가씨가 내 며느리라고 하셨어.” 내가 다시 물었다. “기도하지요? 기도하면서 간구하는 것이 있어요?”  “네, 방언이 하고 싶어서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 오늘 하루 정도 준비하고 내일 기도하지.” 다음 날 저녁 나와 아내, 아들과 예비 며느리 이렇게 넷이 방에 앉았다. 그리고 예비 며느리의 방언을 위해서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불과 수 분만에 방언이 터져 나왔다. 그런 후에 내가 물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지금 어떤 일을 하시지? 형제는 어떻게 되나?”

외손녀에게 아토피 증상이 나타났다. 딸은 아이를 데리고 계속 병원에   다녔다. 그러나 쉽게 치료가 되지 않았다. 2007년 12월 서울에 있는 딸이 이메일로 리스트를 보내왔다. 나는 딸이 보낸 리스트를 앞에 두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이에게 생우유를 먹여도 될까요?’ ‘안 된다’   ‘계란은 먹여도 될까요?’ ‘안 된다’   ‘브로콜리는 먹여도 될까요?’ ‘된다’   ‘시금치는 먹여도 될까요?’ ‘된다’   ‘두부는 먹여도 될까요?’ ‘된다’   ‘딸기는 먹여도 될까요?’ ‘된다’  ‘소고기는 언제부터 먹이면 됩니까? 금년 12월부터 먹일까요?’ ‘안 된다’ ‘내년 1월부터 먹일까요?’ ‘안 된다’  ‘내년 2월부터 먹일까요?’ ‘안 된다’  ‘내년 3월부터 먹일까요?’ ‘그렇게 해라’ 나는 다음 날 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생우유와 계란은 먹이면 안 되고 나머지는 다 가능함. 그리고 소고기는 내년3월부터 먹일 것’ 딸은 그것을 참고 해서 아이의 식단을 조절했다. 그러면서 외손녀는 조금씩 좋아졌다.   

그런 중에 딸의 가족이 미국에 가게 되었다. 2008년 가을 당시 나는 통일부 장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밤 11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현관 앞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서 있었다. 딸이 외손녀를 데리고 미국의 병원에 갔더니 미국의사가 과일과 채소를 먹일 때도 조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 과일과 채소를 조심해야 하는지는 아이마다 다르니 정확히 말할 수는 없고, 먹여봐서 괞찮으면 먹이고, 반응이 나타나면 먹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딸이 그즈음   뉴욕에서 먹일 수 있는 과일과 채소 리스트를 다 적어서 보낸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리스트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딸이 아이에게 먹일 과일과 채소 리스트를 보내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바나나 먹여도 되겠습니까? 망고 먹여도 되겠습니까?’ 나는 리스트에 있는 모든 과일과 채소를 O,X로 표시를 해서 딸에게 보냈다. 순종하는 딸은 그대로 외손녀에게 먹였고, 그 뒤로 손녀의 아토피는 거의 완치가 되었다. 

며느리 될 사람을 알려주시는 하나님, 외손녀의 아토피를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과 민족을 위한 기도에 응답을 하실까요? 안 하실까요?  문제는 ‘응답(應答)’이 아니라 ‘기도(祈禱)’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이 심판을 면하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이 땅의 죄악이 사라지기를 기도합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다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고 현충일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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