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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인생의 근본 문제와 해답 (엡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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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근본 문제와 해답 (엡 2:1-7)


레오 톨스토이가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동안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취해 기분 좋은 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톨스토이는 예수를 만나고 인생이 완전히 거듭난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를 정말 믿으면 삶이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믿으라! 예수 믿으라!” 하는 말에 견디다 못해 한번 나와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여전히 ‘착하게 살면 되지 예수를 꼭 믿어야 합니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예, 예수님 꼭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여러분이 오히려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마침 오늘 성경 말씀이 “사람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지” 말씀해 주는 성경입니다. 그 이유가 어떤 이에게는 너무 충격적일 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좀 황당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뜻입니다.

나비가 어느 날 하루살이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나비는 하루살이에게 “내일 또 만나 놀자!” 하니 하루살이가 “내일이 뭐니?”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비가 이제는 제비와 사귀었습니다. 매일 만나서 놀던 어느 날 제비가 “이제 나는 저 먼 곳으로 갔다 와야 해, 그러니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고 하였습니다. 나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습니다. “내년이 뭐니?” 

사람들은 하루 사는 하루살이와 다르고 한철 사는 노랑나비와 다릅니다. 그러나 제비와도 다른 존재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육체만 보면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제비와 다른 것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비는 “우리가 죽고 난 다음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나 재미있게 살자.”하면 “영원한 나라? 죽으면 끝이지 영생이 뭐니?”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고 난 다음에 있는 영생을 아십니까? 제비처럼 이 세상에서의 한해 한해는 열심히 살지만 영생은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영생을 모르는 것은 육체는 살아 있지만 영이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영이 왜 죽은 것입니까? 성경은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창조될 때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죽음이 들어왔고 육신의 죽음도 들어온 것입니다. 

창 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죄를 지어 영이 죽게 되니 하나님도, 천사도, 천국도, 악령도, 지옥도 영적인 존재와 세계는 다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표시가 납니다.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여기서 "그 가운데"란 "허물과 죄 가운데"입니다. 죄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죄짓는 것을 평범한 일로 생각하며 죄 속에서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죄의 실상을 알면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마시고 싶은 유혹 때문에, 사람들이 볼까 숨어서 홀짝홀짝 마시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독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만 뜨이지 않는다면 죄 지을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를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영이 죽은 사람은 세상 풍속을 좇아 삽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면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요!” 옳고 그른 기준이 세상이고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어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풍속을 따르는 것은 공중권세 잡은 마귀를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산다는 것입니다. 죄 짓기 위하여 노력해 보셨습니까?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선하게 살아지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들이 왜 한결같이, 죄 짓는 쪽으로, 나쁜 방향으로 끌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죄와 마귀에게 끌려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눈이 가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후 4:4)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이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렇습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아 영적인 눈이 가리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귀의 실상을 모릅니다. 마귀가 얼마나 교활한지, 인간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마귀의 존재와 그 실상에 대하여 정확히 드러나 있는 것은 성경 뿐입니다. 

사람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많이 배워서 죄가 나쁘고 욕심내면 안되고 싸우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배운 사람들이 더 거짓말하고 알만한 사람들이 더 싸우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살자가 속출하고 가정은 파괴되고 사회는 분열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참 평안과 안식이 없고, 허무함에 빠지고 살 의욕을 잃어버리고 모든 이들에 대하여 분노가 가득차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역사하는 악한 영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은 저주 아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은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며 결국 갈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옥을 부정합니다. 실제로는 믿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한 독실한 기독교 여신도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성경을 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비꼬면서 말을 했습니다. "그 책에 쓰여진 것 다 믿으슈?" "그럼요, 이건 성경이에요." "그럼 그 고래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도 아슈? "예, 요나였죠. 알아요." "그래, 고래 뱃속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슈?" "글쎄요,,, 나중에 천국에 가면 물어보죠, 뭐." "그 친구가 천국에 없으면 어쩔 꺼유?" 그러자 여자가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지옥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입니까?
3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이 말씀 역시 충격적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면 지옥간다!’ 왜 충격이 됩니까? 다르게 사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 결국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광고 카피에도 “본능에 충실하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는 얼마나 무서운 말인 지 모릅니다. 지옥이 있음을 모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이 살아 천국과 지옥을 아는 사람은 결코 육체의 욕구대로 살지 않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 인생에는 별의별 문제가 많지만 근본 뿌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이 죽어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육신은 살았고 세상 풍조 따라 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배후 영적 실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죽고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경만이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살아도 저주같은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일은 우리에게는 이것들을 거스릴 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생명 없는 죽은 고기들이 물살을 거스릴 힘이 없는 것처럼, 연약하고 무력합니다. 영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거슬려 범죄한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4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전에는 진노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복받는 자녀가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마귀에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어느 날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응, 사단이 자주 자주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소리칠 때가 있다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이 나가셔서 문을 열어 주신다네. 마귀가 `이 집에 루터가 살고 있지요?" 하고 물어오면 예수님은 `과거에는 루터가 살았지, 그러나 지금은 내가 살고 있어.' 라고 대답하신다네. 그러면 마귀는 대경실색해서 도망가 버린다네. 내가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이것이라네."

예수 믿으면 막연하던 천국 소망이 분명해집니다. 
예수 믿고 나면 “천국 가면 좋겠다.”가 아닙니다.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계시니 우리도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 14절에 보면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조건은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로써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누구나 구원받을 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존 뉴턴은 포학한 노예 상인이었으며 이름난 탕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 믿고 변화 받아 목사가 된 후 40여 년 동안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존 뉴턴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주님이 나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고 하지만 나 같은 노예 상인을 용서하셨을까? 정말로 나 같은 탕아를 용서하셨을까? 하고 문득 문득 과거의 죄가 떠오를 때에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려움에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벽에 이사야 43장 4절 말씀을 써 붙여 놓고 그 말씀을 되뇌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는 일생 동안 구원받고 용서받은 것을 잊지 않으려고 이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82세로 숨을 거두면서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가면 아마 세 번 놀랄 것이다. 처음엔 하나님 나라에 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가면 반드시 만나리라 기대했던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세 번째는 노예 상인인 내가 그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비밀을 믿게 하시려고 성경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노아 시대 ‘방주 안에 있는 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방주 밖에도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구원받는 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때, ‘양피 발린 집 안에 있는 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하지 못해서 안달하다가 결혼하고 난 다음,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 행복한 사람이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하면 행복할까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 선도 보고 이것저것 따져 보는 동기가 누구와 결혼하면 행복할까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으면서도 배우자 잘 만나서 행복하려고 한다면 그는 도무지 행복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사람을 어떤 배우자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한 결혼의 비밀은 예수 믿고 행복을 찾은 남자와 여자가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배우자에게 주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니 부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걱정이 사라집니다.

마 6:30-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가진 돈이 많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아버지가 부자인 아이는 가진 것이 없어도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가난하냐 부자냐의 구분은 소유가 많으냐 적으냐 차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배풀 수 있느냐 없느냐 차이입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예수 믿고 행복해진 사람은 전도하게 됩니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실제로 전도하는 일은 힘듭니다. 여러분을 전도하신 분들이 그동안 얼마나 기도한 줄 아십니까? 온 교회가 새벽마다 기도하고 철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선물도 준비하고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였다면 못하였을 것입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고, 운명과 저주의 굴레가 벗겨지고,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을 얻었고 가정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 예수 믿으라 전도 너무 많이 해서 싫다.” 는 말을 듣고도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초청 받아 오신 여러분,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생과 천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히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죄와 저주와 심판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축복의 길을 다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던 교우들에게도 초청하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음을 압니다. 예배도 힘들고 기도도 힘들고 속회도 힘들고 전도도 힘들고 사명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든 이들은 전도할 사람이 아니라 전도 받을 사람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빠져 있던 죄악과 저주의 수렁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고 나면 에수 믿었다는 것 만으로도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서나 소유나 환경에서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행복하니까요! 무엇이 부족합니까? 없습니다. 지금 보다 10배나 더 나쁜 환경에서도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더 큰 사명을 구하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모두 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유가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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