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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설적 은혜 (롬 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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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은혜 (롬 5:17-21)

 
내 용 

로마서 성경의 특징은 교리적으로 율법과 은혜를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성격을 쉽게 설명하면 재판석의 검사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너는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지 않느냐? 그래서 너는 죗값으로 죽어야 한다.”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면을 율법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이 되는 아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을 순종하지 않아서 죄 아래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받은 최고의 형벌은 죽음입니다.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형벌로 찾아온 이 사망은 우리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왕 노릇 하고 있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생활 가운데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사망하는 일이요, 죽인다고 하면 누구도 꼼짝 못하고 벌벌 떨게 되는 이 사망이 인간 범죄 죗값으로 인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왕 노릇한다고 했는데 왕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부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망의 왕 앞에서 우리는 꼼짝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죄의 왕권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한번 이 세력에 굴복 당하고 나면 그 후 부터는 노예가 되어서 먼저 지은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으라고 죄의 왕이 명령을 내리면 꼼짝도 못하고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 다음 왕은 나를 함부로 조롱합니다. “너는 죄인의 괴수다. 

너 같은 놈은 이제 영원히 그렇게 살아야 돼.” 우리 마음에 후회를 만들어주고 절망에 빠지도록 하고 나중에는 자기 학대를 하게 만들고 나약해지고 초라해지고 비참에 떨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향해서 “네가 갈 곳은 이제 지옥 밖에 없어. 너는 거기 가야 돼.”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여러분이 혹시 나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이런 대답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저는 교회 못갑니다.” “왜 못 오십니까?” “하도 죄를 많이 지어서 저 같은 사람이 교회를 가면 다른 교인들까지 욕먹습니다.” 매우 겸손한 것같이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과 영은 벌써 악령의 권세에 굴복 당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그 영 가운데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왕이 그의 영을 붙들고 “너 같은 놈은 절대 교회 가면 안 돼.”라고 명령한 것을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가끔 어떤 나쁜 조직에 가담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나쁘다고 판단이 되었으면 용감하게 뛰쳐나오면 됩니다. 혼자 힘으로 어려우면 부모님이나 선생님, 경찰관의 도움을 입으면 간단합니다.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데 그들 마음에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리 안 나가기로 작정하고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벌써 마귀의 영이 그의 영을 사로잡아서 “너는 이 조직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어. 만약 빠져나가면 너는 죽을지도 몰라.” 그 말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유흥가 직업여성들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포자기하고 자기에 대해서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나는 이대로 살다고 죽을 수밖에 없어. 여기서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어.’ 죄의 권세가 그의 영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죄의 왕권은 아주 무섭습니다.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죄의 권세가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이 뭔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훼방 놓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꽤 쓸 만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몸을 바치게 되면 마귀는 적당한 시험거리를 만들어서 그의 반대의 길을 가도록 방향 제시를 합니다. 어떤 교회가 꽤 쓸 만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간다면 마귀는 그것이 안 되도록 무슨 일을 누구를 시켜서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가 되도록 연구하고 실행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지요? 마귀들도 새벽기도를 합니다. 

교회 안에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마귀의 소리가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진리입니다. 저 풀러 신학교의 교회 성장학의 권위자 웨그너 박사가 말한 것이 있습니다. 미국 내에 사탄 숭배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사탄 숭배자들은 1년마다 지령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는데 미국사회에서 가장 훌륭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망가지라고 사탄의 왕에게 기도하라.”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교리적으로 약간 갈등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로마서 5장이 있는데 갈등 부분은 이 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해서 죄 아래로 떨어져서 벌을 받았다면 아담 하나로 끝나야지 왜 죄도 없는 그 후손들까지 그 벌을 받아야 되는가?”라는 교리적 질문이 나온 겁니다. 이 로마서 5장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첫째 아담, 둘째 아담이라는 말을 쓰는데 첫째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후손들이 다 죄에 물들어서 죄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둘째 아담 예수 한 사람으로 은혜의 왕권이 또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가 우리를 죄 짓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고 절망에 이르게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의 왕권도 누구든지 어떤 흉악한 죄에 빠졌든지 상관없이 다 구원을 주시는 은혜의 왕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진리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검사가 율법을 가지고 나섭니다.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심판합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많은 죄의 기록이 나오는지 판사 앞에 내가 죄 지은 것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습니다. 검사는 재판관에게 요청했습니다. “이러므로 이 피고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렇게 많은 죄 기록이 사실적으로 있지 않습니까?” 꼼짝 못합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이 다 기록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복음 변호사로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이 피고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죄가 많아서 검사의 말대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피고인을 위하여 대신 그 죄를 사하여 달라고 이 사람이 받아야 할 죗값을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았습니까? 이 피고인의 그 십자가의 믿음의 고백을 했고 회개하였고 예수를 믿고 이렇게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변호를 하면 하나님이 “아, 그렇다. 너의 모든 죄는 이미 사함 받은 죄다. 천국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이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지금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죄가 커도 다 용서해 주기 때문에 죄 많이 지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적은 사람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받은 것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설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예수님을 초대한 어떤 바리새인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기고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문제의 여자입니다. 

이 여자를 많은 신학자들이 다 막달라 마리아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의 직업은 창녀였다고 거의 정설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그 모양새가 하도 민망해서 예수님까지 비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선지자였다면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을 텐데 왜 선지자라는, 이 소문난 사람이 와서 자기를 만지는 것을 저지해서 보내지 않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가?” 이렇게 막 핀잔하지 않습니까? 그의 몸은 일곱 귀신이 들린 몸이요 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병적인 상태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는 예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선지자권을 의심하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빚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빚진 자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자. 갚을 것이 없어서 둘 다 주인이 탕감하여 주었다. 너희 생각에는 둘 중에 누가 더 주인의 사랑을 받은 것이냐?” 시몬이 대답하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도다. 이 여인은 너희가 생각하는 대로 너무나 많은 죄가 쌓였다. 그런데 그 많은 죄가 다 사하여졌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사랑이 이에게 임하였느니라.”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부터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설교하신 내용이 탕자 비유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의 몫을 다 가지고 나와 창기와 함께 소비하고 타락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거지가 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과거를 다 잊게 해주었습니다. 옛날 모습으로 회복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비의 큰 혜택을 받아서 정상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큰 아들이 이것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아버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저런 놈은 나가서 벌을 받아야지 왜 혜택을 주십니까? 그러면 나도 일찌감치 저 놈처럼 나가서 방탕하다 돌아올 것을 괜히 성실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나이다. 이런 대접은 내가 받아야지요. 그리고 저 놈은 벌을 받아야지요. 이게 하나님의 공평입니까? 아버지! 이게 뭐하는 일입니까?” 아버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네 것이 어디 갔느냐?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내 것은 네가 네 장래를 위해서 쓰지 않고 그냥 두었다. 만약 네 동생이 자기 몫을 가지고 나갈 때 네가 네 몫도 달라고 했다면 나는 너에게도 주었을 것이다. 

네가 안가지고 나간 것 뿐이다. 네 것이 어디로 갔느냐? 네가 너를 위해서 지금 쓰지 않고 있었을 뿐이야. 그리고 네 가치 판단으로 네 동생의 무엇이 부러우냐? 네가 나가서 방탕하고 타락하지 못한 게 부러우냐? 거지꼴이 되어서 맨발로 기어들어온 동생이 뭐가 부러우냐? 저렇게 되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지금까지 성실하게 깨끗하게 살아온 네가 더 좋은 삶을 살았고 복을 받은 것이지 네 동생이 뭐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냐?” 이게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은 그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왕권을 가지고 인간을 죄의 노예로 만들었다면 은혜의 왕권으로 다 사하여 주는데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탕자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게 했다.” 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왕권을 말씀 했더니 많은 사람이 큰 아들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면 나도 죄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짓고 이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탕감을 받아야 더 좋을 것 아니냐?” 이런 논리를 제의합니다. 

그래서 6장 1절에 보면 “우리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한 말은 그러한 경우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자유함을 얻은 은혜가 있다는 것이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의가 아니다.” 이런 논리적, 합리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누가 예수 잘 믿는 믿음 좋은 사람인가? ‘아!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주일학교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살아온 그 자체를 최고의 축복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제일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 나는 괜히 어려서부터 예수 믿는다고 고생만 했네. 재미도 못 보고 억울하게 살았네.” 이렇게 후회하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네가 더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았으면서 네 동생이 나가서 방탕하고 죄 지은 것을 못 해보고 산 것이 그렇게 부러우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작은 아들처럼 허랑방탕하다가 은혜 받고 예수 믿은 사람 퍼센트가 높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신앙 고백을 잘해야 됩니다. “아! 나는 아주 재수 좋네. 

세상 재미 볼 거 다 봤고,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대로 받았고! 와! 수지맞았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짓고 허송하고 쓸데없이 보낸 그 과거를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되고 “그렇게 젊었고 용기 있고 능력 있던 시절에 주님을 위해서 좋은 삶을 내가 왜 살지 못했나?” 안타까워하면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그게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작은 아들과 같이 타락해 보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때가 많습니다. 

신앙 간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모이는 신앙 간증 집회는 어떤 집회인가? 간증자의 과거가 컴컴할수록 좋습니다. 흉악할수록 인기가 있는데 전과 3범 같은 것은 간에 기별도 안 옵니다. “전과 10범”처럼 과거가 흉악한데 나중에 예수 믿고 간증하면 인기가 있습니다. 보통 인기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겁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뭡니까?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임해서 새 역사를 쓰게 했다.” 그것을 간증하니까 사람들이 인기 있게 들으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간증할 수 있고 나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주일학교 모범생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세례 받고 교회에서 시키는 것을 거역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교회 봉사 뭐든지 다했고 나중에 믿는 자와 결혼해서 집사 되고 권사 되고 교회에서 직분 주는 것을 다 열심히 해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 다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 간증입니까? 그런데 이런 간증 가지고 강사가 되면 밥도 못 얻어먹습니다. 그게 정말 좋은 간증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간증거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죄를 짓겠느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나도 저런 강사가 되려면 어둠의 세계를 일부러 들어갔다 나와야 되겠구나.’ “그럴 수 없느니라. 네가 더 좋은 삶을 살았느니라. 큰 아들이여! 네가 더 하나님의 복을 받았지!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서 허랑방탕하지 아니한 삶을 산 네가 더 좋은 삶을 살았지. 거지꼴이 된 동생이 부러우냐? 죄 지어보지 못한 것이 한탄이냐?”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지금까지 자기를 만나러 왔던 모든 남자들의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동물적 욕심을 채워주는 도구로만 사용이 되었고 사용한 후에는 그들로부터 멸시의 소리를 끝없이 들어야 되는 일곱 귀신 들린 정신 나간 여자였습니다. 그 죄가 넘친 곳에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렸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서 대화를 하는 순간 그는 자기 평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격 대우에 가슴이 열려버리고 젖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는 죄의 권세에 눌려서 ‘나는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돼. 

나는 더 이상의 길이 없어.’ 그렇게만 생각하고 죄의 권세에 절대 순종하던 그가 예수의 복음으로 새로워져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죄의 권세를 깨버렸습니다. “네가 뭐야? 내가 주님의 딸인데 네가 왜 내 영을 붙잡고 나를 이 길로 몰고 가는 거야?” 팍 차버리고 그 순간부터 자신이 불러오던 자신의 그 처절하고 슬픈 노래를 그치고 예수를 바라보면서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순례자의 복음 성가를 부르기 시작하잖아요? 이렇게 변해버린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여기야. 못 나가. 나갈 수 없어. 이대로 살다 죽는 거야.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세례를 받고 무슨 교회를 가?” 거기에 눌려 있는 겁니다. 죄의 왕권 권세에 순종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사실 삭개오는 자신도 예수는 만나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청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들어가겠다.” 그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을 받고 대화를 하다가 그는 가슴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생애를 뒤엎는 소리를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돈만 알고 자기나라 돈 거둬서 로마 정부만 유익하게 만들어주고 자기 혼자 먹고 사는 사람으로 그렇게 돈 밖에 모르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그 많은 욕을 먹고 죄인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자기는 그것이 자기의 삶이라고 절대 순종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서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죠? “예수여! 내가 지금까지 삶에 가장 큰 가치관이라고 생각했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만약 이것을 내가 불의하게 모았다면 4배나 율법대로 갚겠나이다.” 여러분! 삭개오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 나오신 교인들 가운데 현재 자기 모든 재산의 50퍼센트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 활동비로 내 놓을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못 들으실 겁니다. 누구도 못하실 겁니다. 아무도 못합니다. 삭개오는 했습니다. 거짓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으로 남은 겁니다. 제가 어디 부흥회에 가서 이 설교를 했더니 중학생이 한번 손들더라고요. “네 소유가 얼마나?” 물었더니 2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 많은 곳을 통해서 더 크게 역사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는 항상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번 5월 교회 달력 사진은 제가 논산 훈련소에 가서 6,300명 앉혀놓고 세례를 주며 설교하는 모습입니다. 제 왼쪽 옆에 앉아있는 그 사람이 훈련소장입니다. 제가 6,300명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훈련 소장님은 장군인데 불교신자이십니다. 제 설교를 듣고 나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훈련 소장으로 훈련병들에게 명령한다. 목사님 말씀 들었지? 오늘 세례 받는 자들은 목사님이 나눠주시는 이 성경책을 훈련소를 떠날 때까지 완독할 것! 이상!” 불교신자 훈련 소장이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읽으라고 하면 안 읽습니다. 목사의 말은 다 비중을 크게 두지 않습니다. 목사들 다 압니다. 그러나 훈련 소장이 명령하니까 모두 “알았습니다.” “반드시 읽겠느냐?” “읽겠습니다.” 그래서 6,300명에게 세례를 준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거슬리는 어떤 죄를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이 말씀은 그 죄의 권세에 묶여 있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왕권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의 죄 때문에 묶여 있지도 말고 자유함을 얻어서 역설적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죄의 권세를 깨뜨려 버리고 은혜의 권세 속에서 살라.” 이것이 오늘 말씀 내용입니다.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이 주는 진리를 저희들이 잘 깨달아서 악령의 권세에 붙잡혀 있지 말고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은혜의 복음의 권세 안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역설적 은혜자들이 모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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