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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루터기 (사 1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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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사 10:20-23)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과 야곱 겨레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는 그들을 친 자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인 주님만을 진심으로 의지할 것이다. 남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고 하여도, 그들 가운데서 오직 남은 사람들만이 돌아올 것이다. 너의 파멸이 공의로운 판결에 따라서 이미 결정되었다. 파멸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주님, 곧 만군의 주님께서 온 땅 안에서 심판을 강행하실 것이다.]

• 겪을 것은 겪어야 한다

한 주간 고단한 일상을 살다가 주님 앞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얼마나 마음 조리며 사셨습니까? 남북간의 대치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빠끔히 열렸던 교류와 소통의 문들이 닫히고, 한반도에는 냉기만 흐르고 있습니다.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환율은 오르고, 주가는 떨어졌습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쌀과 라면을 준비하는 기민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또다시 가뭇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답답한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효창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물웅덩이마다 노랑붓꽃이 소담하게 피었고, 홍련도 피었고, 어리연잎 사이로 고개를 드는 개구리도 보였습니다. 하얀 마가렛과 산수국, 불두화도 무심히 피었습니다. ‘무심히’라는 단어가 떠오르면서, 인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참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꿈꿀 수 있을까? 내내 제 마음을 사로잡은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시리아의 침공을 받은 이스라엘을 떠올렸습니다.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오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친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사7:2)고 이사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을 찾아가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시리아 왕의 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그는 앗시리아의 그늘 밑에 들어가려 합니다. 그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금과 은을 모두 꺼내 앗시리아 왕에게 보냅니다. 앗시리아 임금 디글랏빌레셀은 아하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시리아를 물리쳐줍니다. 아하스는 감사의 뜻으로 신종臣從의 예를 갖추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갑니다(왕하 16장). 하지만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에서 가져온 종교문화의 잔재를 청산하고 독립을 얻어내려 했습니다. 그러자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대군을 이끌고 와 예루살렘을 압박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예언자는 이제 예루살렘의 파멸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그 백성이 수치를 당할 것이고, 기름진 포도밭은 찔레와 가시나무로 덮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차게 흐르는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백성을 덮칠 것이라고 말합니다(8:7).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이사야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고,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했습니다(10:1-2).

겪을 것은 겪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은 더러 풀무불이 되어 우리 속에 있는 맑고 순수한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겪어내야 할 고통을 생각할 때 예언자는 가슴이 아픕니다. 레바논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은 “나는 심장에 화살이 박힌 채 태어났나 보다. 빼려면 아프고 그냥 둬도 아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예언자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아픔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써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 낸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때나, 그 주는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함석헌 명상집, 김진 엮음, <<너 자신을 혁명하라>>, 145쪽)

• 근본을 붙들라

어려울 때일수록 근본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람에 흔들릴 때 더욱 단단하게 흙을 부여잡는 뿌리처럼 살아야 합니다. 바람이 불 때 집을 짓는 새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쭉정이는 걸러내고 알맹이를 찾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립니다. 임시방편의 해결책을 찾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근본을 살펴야 합니다. 이사야는 외세를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마 냉소로 응대했을 것입니다.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붙들라니요? 평화로운 시절이라면 ‘아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지만, 그 급박한 시점에 무슨 이상론이냐고 비웃었겠지요. 적들의 위협은 매우 구체적인 데 비해 하나님의 도움은 너무 먼 데 있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사람들에게 마술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위기가 고통 없이 끝나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시련과 고통 너머에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련의 때는 멍하게 흐려졌던 정신을 가다듬을 때입니다.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닌 것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작년에 유럽에 갔을 때, 저는 정수복 장미란 집사님과 파리거리를 이곳저곳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파리 꼬뮌의 마지막 격전지에 세워진 음식점에 들렀습니다. 

음식점 이름은 ‘체리의 시간’(Le Temps Des Cerises)이었습니다. 노동자생산조합이 운영하는 그 음식점 카운터에는 스티커가 한 장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주인을 해고하라’(영어로 번역하면 Fire the master!)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좀 거친 격문이다 싶었는데, 이 구호는 사실 상당히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자라고 해서 사용자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 형제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의 자기 배신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자기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인 숄로호프의 <인간의 운명>에 등장하는 소콜로프는 평범한 농부였는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히면서 기가 막힌 인생을 살게 됩니다.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불굴의 의지로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포로들에게 부과되는 과중한 노동량에 대해 불평을 터뜨렸다가 수용소장에게 불려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움을 내비치진 않으리라고 다짐합니다. 권총을 만지작거리던 소장은 그를 사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독한 술 한 잔과 비계를 얹은 빵 한 조각을 안주로 건네면서, ‘독일군의 승리를 위해’ 건배하라고 말합니다. 소콜로프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수용소장이 다시 ‘너 자신의 죽음을 위해’ 술을 마시라고 말하자 소콜로프는 단숨에 잔을 비웁니다. 하지만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첫 잔을 마신 후에는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 자기 원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장이 둘째 잔을 따라 주자 소콜로프는 역시 단숨에 잔을 비웁니다. 그리고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둘째 잔을 마신 후에도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 자기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세 번째 잔을 들이켠 후에야 빵을 조금 떼어 먹습니다. 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지켰던 것입니다.

• 남은 자가 돌아온다

가장 어려운 때에 자기 원칙을 지키기 위해, 혹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래서인가요?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길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십니다. 성 프란체스코, 다미엔 신부, 콜베 신부, 본회퍼 목사, 이현필, 장기려 박사, 손양원 목사…. 이들은 모두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이 거룩한 바보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은 자는 그루터기 같은 이들입니다. 밑동까지 싹둑 잘려나가도 뿌리가 남아있는 한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봄 되면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아납니다. 생명의 기적입니다. 산길을 걷다가 유난히 마음이 가는 것은 허리가 부러지듯 꺾인 나무에 새 순이 돋아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도 이런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사33:15)

어떻게 보면 이게 사람 사는 마땅한 도리인 데도 이대로 사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이들을 사람들은 불편해 합니다. 그렇다 해도 이들은 씨도리배추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씨도리배추란 배추통을 싹둑 도려내고 이듬해 씨를 받기 위해 겨우 밑동만 남겨진 배추를 이르는 말입니다. 꽁꽁 언 채 겨울을 견디다가 봄이 되면 노랑 물감 같은 장다리꽃을 피우고 마침내 씨를 만들어내는 것이 씨도리배추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힘 있는 자들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묵은 상처에서 돋는 새살입니다. 지금 감리교회의 현실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교권을 두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싸늘해져가고 있습니다. 속상합니다.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아 그렇지 정말 좋은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고 나면 답답했던 가슴에 햇살 한 줌이 비춰지는 것 같습니다.

•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앗시리아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구차한 생존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은 어둠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사야는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세상 말입니다(11:6-8). 어처구니없는 꿈입니다. 하지만 그 꿈이야말로 고단한 현실을 타고 넘을 수 있는 배입니다. 그 꿈은 허망해 보입니다. 하지만 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귀에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꿈은 성취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컬어 평탄하다 한다(視之不見, 名曰夷),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일컬어 희미하다 한다(廳之不聞, 名曰希) 했습니다(老子 14장). 우리 눈은 너무 큰 것도 보지 못하고, 너무 작아도 보지 못합니다. 망망대해 앞에 서면 우리는 말을 잊습니다. 우리의 작음을 실감합니다. 잎이 돋고 꽃이 피는 순간을 우리 눈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 귀는 나무가 자라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말합니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19:2-4a).

주님의 말씀은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세상 끝까지 번져 가고 있습니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그렇게 자랍니다. 본래 희망은 아주 작은 가능성을 이르는 말입니다. 바랄 ‘희希’는 드물 ‘희稀’와 바꿔 쓸 수도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남은 자’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하는 때에도 조용히 희망의 씨를 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피터 모린(Peter Maurin)은 “사람들이 더 쉽게 선해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We need to make the kind of society where it is easier for people to be good)고 말했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손해 보지 않는 세상,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악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거짓 평화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있던 때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했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그 믿음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의 어둠이 짙었을 때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고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노래를 잊지 않는 한 평화의 세상, 생명의 세상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믿음의 터 위에서 생명의 씨앗, 평화의 씨앗을 심는 기쁨으로 이 험한 세월을 건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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