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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나바의 신앙인격을 따라 ① (행 4:36-37,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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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의 신앙인격을 따라 ① (행 4:36-37, 11:24-26)


성도들의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좋은 것과 덕을 세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좋은 데 덕을 끼치지 못하여 불신자 또는 믿는 형제들에게서조차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덕을 세우지 못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1:5절에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에 덕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믿음에 따른 행함을 가지라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에 행함이 공급되어질 때 그 믿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교회를 유익하게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이러한 덕을 세워 하나님의 교회에 큰 은혜를 끼친 사람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집사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지만 그 어떤 집사보다 그 어떤 사도보다도 주를 위해 헌신하고 교회에 덕을 끼쳤던 사람입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하나님은 바나바 같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어떤 분이었는지 살피면서 이 시대 우리 교회의 바나바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누구인가?
바나바의 본명은 “더함”의 의미가 있는 요셉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자 정치적인 이유와 또는 경제적, 신앙적 이유 등으로 조국을 떠나 헬라 문화권에 흩어져 살았던 많은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 중에 한 사람으로서 지중해에 있는 섬 구브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가 언제 예루살렘에 돌아왔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듣고 예수를 믿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행 2:5절에 보면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라고 하였는데 그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레위 지파 사람으로서 경건한 유대인이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룟 유다가 주를 버리고 떠나 공석이 된 사도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제비를 뽑을 때 그는 뽑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를 뽑을 때도 그는 뽑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의 프로필 (profile)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위로의 사람 

행 4:36절에 의하면 요셉이라는 그의 이름이 있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 라고 일컬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본명을 놔두고 별명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명인 요셉이라는 이름보다 바나바라고 별명을 지어주고 그 별명을 즐겨 불렀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은 로마의 정치적 압박과 유대교의 엄격한 계율에 따른 종교적 억압 속에서 일반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심리적으로 평안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들어온 많은 교인들은 당연히 영, 육간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교인들에게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별명으로 위로자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고 사도들이 그것을 좋게 여겨 공식적으로 바나바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① 위로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줌으로 시작됩니다. 
② 위로는 격려하는 것입니다.
③ 위로는 칭찬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입에서 남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와서는 안됩니다. 헐뜻는 소리는 더욱 안됩니다. 공격적인 언어가 나와서도 안됩니다.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을 명심해야 합니다.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하는 말만 합시다. 

2.착한 사람입니다. 

행 11:24절에 의하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이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것은 선하다는 말과 동일한 뜻입니다. 그러나 착한 것 또는 선한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선할 수 없고 착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선하고 착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딤전 1:19절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착한 양심을 버리면 파선한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두신 하나님의 소리 방송국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성능이 많이 떨어진 양심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으로 양심이 새롭게 지음을 받아서 양심에 꺼리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라고 행 24:16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성도가 양심을 저버리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착한 양심으로 살아야 불신자들에게도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3. 헌신된 사람입니다.

행 4:36절에 의하면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당시 성도들은 바나바 뿐 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은 후에 자기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사도들은 그 물질로 가지고 구제와 봉사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왜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 바치라고 한다고 바치겠습니까? 누가 내라고 내겠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서로 앞 다투어 자기들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갔다 바쳤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가치관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으면 사람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가치관이라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자기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에 노예가 되어 삽니다. 그러나 물질은 삶의 수단이요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면 그는 물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기꺼이 물질을 쓰고 내놓을 줄 아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바쳤다는 것은 얼마를 바쳤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를 헌금하였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가치관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나바의 헌금에 자극 받아 똑같이 밭을 팔아 드렸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가치관의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다가 바치고도 저주받은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일군은 다음과 같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 변해야 참된 신자가 됩니다. 

㉠ 육신 중심에서 영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 자기 중심에서 남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 물질 중심에서 신령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 세속 중심에서 경건 중심으로 변화되어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되면 강단에 세속주의가 들어옵니다. 가치관이 변하지 않은 사람이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교회는 난장판이 됩니다. 가치관이 변화 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가치관이 바뀌면 하나님과 교회에 허신적인 삶이 됩니다. 헌신된 교인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헌신되지 않으면 일하지 않고 말만합니다. 문제만 삼습니다. 바나바처럼 헌신된 일군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돼지가 씩씩거리면서 소에게 달려 들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너희 소들만 칭찬하는 이유가 뭐야? 사람들은 우리를 언제나 멸시하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병이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너희들은 언제나 귀빈 대접을 받는 게 매우 기분 나쁘단 말이야. 너희들이 우유와 버터를 댄다면 우리는 햄과 베이컨 그리고 소시지를 대주지 않니?" 
이 말을 들은 소가 큰 눈을 껌벅거리면서 대답했습니다.
"글쎄 잘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살아서 우유와 주고 죽어서는 맛있는 고기를 사람들에게 주는데 너희들은 살아있을 때는 아무것도 안주고 죽어서만 고기를 주는 것 때문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소의 말처럼 죽어서 주는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지금 자신의 무엇인가를 희생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헌신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쓰십니다. 
어느 공산주의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해 피 흘려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자신들을 위해 죽은 그분을 위해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가 나에게 피 한 방울을 흘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신봉하는 공산주의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무엇을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했던 백성들이 며칠 후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 박으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우리들의 말뿐인 신앙고백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에 고난 받기 위해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헌신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처럼 헌신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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